좀 황당하지만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장관의 비극을 짤막하게 요약하자면 이런 이야기가 된다.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특채작전'이 일사불란하게 이뤄졌다고 했다. 응시대상에서 해외통상업무와 연관성이 있는 국제변호사나 '관련학사 경력 4년인 자'는 빼고 유 장관 딸의 자격인 '석사 취득후 2년인 자'를 끼워 넣었다. 영어성적도 토플(TOEFL) 등은 밀쳐내고 장관 딸이 성적표를 제출할 예정인 텝스(TEPS)로 한정 했으며, 영어 성적표 준비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보통 시험 공고 후 10여일 정도인 원서접수기간을 재공고후 26일이 지나서야 마감했다. 장관 딸이 특채에 응시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시험위원이 될 수 없는데도 외교부 공무원 2명은 5명의 면접위원 중 내부위원으로 참여해 면접심사회의에서 "외교부 근무 경험자를 우대해야 한다"(유 장관 딸은 근무 경력이 있다)고 역설, 유리한 결과를 위해 분투했다.
이들의 작전은 채점과정에서 절정을 이룬다. 외부시험위원 3명은 이번 특채에서 탈락한 2등의 응시생에게 더 높은 점수를 주었으나, 내부 시험위원인 2명의 공무원은 유 장관 딸에게 19점 씩(20점 만점) 주고 2등 응시생에게는 17점과 12점만을 주는 바람에, 유명환 외교부장관의 딸은 여유 있게 합격의 영예를 차지하게 된다.
'일자리 하나'에 눈 부릅뜨며 바늘귀만한 기회라도 거머쥐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이번 사태가 안겨준 절망과 분노의 크기는 얼마만 할까. 그들에게 '공정한 사회'란 슬로건은 어떤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을까.
유 장관 딸 파동이 어제 오늘 생겨난 새로운 유형의 비리가 아닌 것은 다 알고 있다. 문제는 그 같은 '불공정'(不公正)이 특히 이 정권 들어 갖가지 형태로 사회전반에 만연되면서 체질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번 총리·장관 청문회에서 우리는 이 정권의 이른바 상류지도층 인사들이 바로 '체질화된 불공정'의 진원지임을 똑똑히 보았다. 필수과목 학점취득 하듯이 위장전입을 일삼고, 투기에 탈세까지 외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능수능란하게 해치우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레샴 법칙이 온통 판을 치고 있는 사실을 똑똑히 보았다. 얼마나 '불공정'이 심각했으면 대통령이 공정한 사회를 만들자는 깃발을 들어 올렸을까. 겉보기에는 유명환 전 장관 사례가 지극히 적은 한 분야에서의 일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데 이론이 없어 보인다.
심각한 일은 드러난 '불공정'에 대한 사후처리방식이다. 위장전입은 엄연한 주민등록법 위반인데도 "자녀교육 때문이라면 봐 준다"고 했다. 대통령도 그랬기 때문에(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그런 편법이 등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모든 '불공정'이 죄의식도 없이 그런 식으로 처리돼서는 법치(法治)를 한다는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명환 전 장관은 딸의 사태가 터지자 "특혜 의혹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看過)한데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야말로 별 죄의식 없이 그냥 그 정도 선에서 어물쩍 넘어가는 처리방식을 택하려 했던 것 같다. '간과'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깊이 관심을 두지 않고 대강 보아 넘김'이다. '불공정한 일'을 그렇게 대강 보아 넘겼다는 이야기다.
대통령도 '간과'와 비슷한 뜻인 '불찰'(不察)이란 말을 쓰면서 '불공정'으로 빚어진 '곤경'을 넘긴 적이 있다.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이던 2007년 11월에 그랬다. 자신의 빌딩을 관리하는 회사에 아들과 딸을 '건물 관리인'으로 허위등재하고 8800만 원의 급여를 준 사실이 드러나 '탈세'와 '횡령'이 거론되었다. 그때 이명박 후보는 "본인의 불찰이다. 꼼꼼히 챙기지 못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불찰'은 '조심해서 잘 살피지 아니한 탓으로 생긴 잘못'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대통령이나 유 전 장관은 "자신들이 저지른 '불공정'은 '간과'나 '불찰'일뿐 고의성은 없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의 '불공정'을 곰곰이 따져보면서 필자는 지금도 "적어도 본인들은 아닐지라도 분명히 고의는 있었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그것은 범죄일수도 있다.
특히 대통령의 딸은 세계적인 명성의 줄리아드 음대 출신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줄리아드 출신의 건물 관리인'에게 '불찰'로 월급이 나갔다는 사실을 믿을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겠는가. 건물 관리인 급여가 나가고 있을 때 대통령은 서울시장이었다. '불공정'은 말끔히 정리하고 넘어가는 게 '공정'이다. 그게 바로 요즘 '강조기간'이 설정된 것처럼 보이는 '공정한 사회'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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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온 나라가 '공정'이란 화두로 요란하다. "균등한 기회를 주는 게 공정사회"라는 뻔한 목소리도 들리고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처럼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게 공정한 사회"라는 청와대 참모의 주장도 들린다. '공정사회' 용도의 전면적인 감사원 감사가 시작된다는 보도도 있다.
분명히 해둬야 할 게 있다. 말하는 쪽은 '공정'이고 듣는 쪽은 '불공정'이라는 '불공정한 선입견'이 있는 듯하다. 웃기는 말씀이다. 지금부터라도 '공정한 사회'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각오를 새롭게 하고 덤벼야 한다는 소리다.
이명박 대통령은 9월5일 김태호 씨와 유명환 전 장관의 사태와 관련, "보통 때 같으면 오래된 관습이라고 통과될 수 있는 문제일지 모른다. 하지만 공정사회를 기준으로 보면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말한다.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장차관 워크숍에서였다. 대통령의 말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혹시 대통령이 '체질화된 불공정'을, '공정 강조기간'에나 문제되는 '보통 때'의 '관습' 쯤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 '공정사회'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에 회의를 갖게 된다는 이야기다.
'공정사회'는 따지고 보면 '강조기간'이 따로 설정돼서는 안 되는 명제다. 적당히 '불공정'하다가 어느 시점부터 일정기간 바짝 힘을 들여 '공정'해야 하는 그런 명제가 아니다. 애당초부터 끝없이 공정해야 한다. 그게 진짜로 '공정한 사회'다.
이 나라에서 그런 '공정한 사회'를 이루는 아주 쉬운 방법이 있다. 바로 대통령이 솔선해서 공정의 본을 보이면 된다.
정책에서 그렇게 하고 인사에서 그렇게 하면 된다. 예컨대 대통령 스스로 "운하는 하지 않겠다"고 두 번이나 약속한 4대강 사업도 이쯤해서 '개인적인 욕심'을 털어내고 국민들을 안심시키는 게 좋다. 그게 '공정'한 거다. 지금의 4대강 사업이 정부의 주장대로 홍수예방과 맑은 물 공급 등 수자원문제 때문에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드러나 있다. 그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도 별로 없다.
또 하나, 대통령 주변의 청소가 필요하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는 소리다. 이 정도 선에서 '형님 문제'도 고민을 끝내는 게 '공정'이다. 그렇게 윗물에서 맑은 물이 흘러내리면 아랫물이 흐려질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바로 그게 '공정'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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