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정운찬 총리가 공식 퇴임했다. 10여 개월 동안 재임하면서 청와대와 호흡을 충실히 맞췄다는 평가를 받은 정 총리는 이임사에서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정 총리는 "10개월 남짓 제가 재임한 기간은 짧고도 긴 시간이었는데 크고 작은 국정 현안을 챙기는 과정에서 느꼈던 소회도 적지 않다"면서 "이 시대 경제학자의 과제는 정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는 것"이라는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발언을 인용했다. 경제학자인 정 총리는 케인지언으로 분류된다.
"민간인 사찰, 부끄러운 일이다"
정 총리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정부나 모든 일을 다할 수 있다고 믿는 정부는 나라와 국민에게 똑같이 해악을 끼친다"면서 "국정철학을 구현하는 정책의 절차적 정당성 또한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서민 중심의 중도실용 정책을 추구하다 보면 때때로 순수한 시장경제 원리를 보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될 것"이라면서 "'선의(善意)의 관치(官治)는 무방하다'는 유혹에 빠지기 때문지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냐"고 말했다.
절차적 정당성을 강조한 정 총리는 "공직자는 언제나 국가권력의 전횡을 염려하고, 만의 하나라도 국민의 존엄성과 기본권이 훼손되지 않도록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면서 "민간인 사찰 같은 구시대적인 사건은 그 어떤 목적이나 명분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검찰은 이인규 전 공직윤리지원관 등 총리실 공직자들만 기소하는데 그쳤고 정 총리가 공직윤리지원관실의 폐지를 이명박 대통령에게 건의했지만 이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민생이 따로 있고 상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면서 "아동 성폭력, 청년 실업, 사교육비 급증, 그리고 나날이 심각해지는 양극화와 부와 빈곤의 대물림 같은 사회문제 역시 국민의 생명과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직결돼 있다는 점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현안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 총리는 "저도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세대간·계층간·이념간 갈등을 조정하는 균형추의 역할을 하겠다"고 예고하기도 했다.
"안국포럼 출신들이 하극상 연출했다"
하고 싶은 말이 담긴 정 총리의 이날 이임사는 상당히 공이 담긴 것으로 보이지만 '만시지탄'이라는 평가를 피하긴 힘들 것 같다.
또한 정 총리 퇴진을 포함한 8.8 개각에 대한 뒷말도 있다. 정 총리는 6.2 지방선거 직후 세 차례나 사의를 표했지만 이 대통령은 '총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다'면서 이를 물리쳤다.
이와 함께 청와대 발 '서민경제 드라이브'가 나오면서 정 총리의 유임설이 높아졌다.
하지만 11일 <경향신문>은 "지난 달 16일~17일 '안국포럼' 출신의 이 대통령 측근 차관급 인사 몇몇이 정 총리를 찾아와 "친박 측이 (이·박 회동 등) 국정협조를 전제로 정 총리가 물러나기를 원한다면서 사퇴를 요구하는 '하극상'을 연출한 것으로 전해졌다"고 보도했다.
이에 정 총리가 주변에 모욕감을 토로했고 재·보선 전날인 지난달 27일 이 대통령과 독대, 사퇴의사를 전했고 대통령도 말리지 않았다는 것.
실제로 정 총리 압박에 총대를 멘 인물로 차관 1명, 차관급 인사 1명의 실명이 거론되고 있다.
호사가들을 비롯해 일부 언론은 정 총리를 이른바 '친이 6룡'에 포함시키면서 차세대 후보군으로 꼽고 있지만 정 총리의 퇴임이 '아름다운 이별'만은 아닌 것 같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