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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교과서? 수천년 전 중국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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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교과서? 수천년 전 중국에서는…

[기고] 사기, 인간과 역사의 근본을 진술하다

배우고 때에 맞춰 이를 실천하니, 이 아니 즐거운가!

외부인들이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많이 읽는 책은 바로<사기(史記)>이다. <사기>야말로 오늘날까지 중국, 나아가 동양 사회의 문화와 정신을 조형(造型)해온 중요한 역사적 원천이었다.

이번 학기, 모교에서 <사기>를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아마 대학에서 <사기>라는 제목을 걸고 강의를 한 것은 처음이지 않나 한다. 그 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개척자적인 의미가 있을 듯했다. 강의를 진행하면서 20년여 전 <사기>책을 펴낸 이후 몇 권의 관련서를 내왔던 나도 다시 공부에 열중했다. 이미 알고 있던 것이든 혹은 이번에 다시 새롭게 알게 되는 부분이든 그 모두 자못 보람이었다. 명문(名文)은 너무도 많고, 내 마음 깊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평론 또한 적지 않았다.

이야말로 "배우고 때에 맞춰 이를 실천하니 이 아니 즐거운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가 아니랴!(여기에서 '習'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익히다'의 의미보다는 '실천'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習'이라는 한자의 본래 뜻은 '어린 새가 날기를 연습하다'는 것이며, 특히 공자가 강조한 것은 어디까지나 '學以致用'이었던 점을 감안해볼 일이다). 무덥던 날 전철을 환승해야 하고 한 시간이나 가야 하는 가깝지 않은 길이었지만, 그러나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국정 교과서의 역사왜곡 시대에 빛나는 <사기(史記)>의 실록 정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들 한다. 그런 생각 끝에는 곡학아세와 곡필의 역사 왜곡이 늘상 숨겨져 있다. 국사 국정교과서니 블랙리스트와 같은 어이없는 사태는 그러한 탐욕이 극단화된 형태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왜곡에 그치지 않고 근본적으로 인간 존엄에 대한 부정이다.

사마천은 어디까지나 객관적 '사실'에 충실했고, 이를 위해 본인이 직접 현지를 답사하고 당사자들의 증언을 채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의 황제, 한무제는 진황한무(秦皇漢武)라 해 중국 역사상 진시황과 더불어 불세출의 황제로 평가 받는다.

<사기>는 그 한무제를 신랄하게 비판한 저항의 역사 기록으로서 당연히 당대의 금서였다. 그러기에 죽은 뒤 수십 년이 흘러서야 비로소 인정받기 시작했던 그는 "거짓된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고, 악을 숨기지 않는(不虛美, 不隱惡)" 독보적인 역사가였다. 그는 세론(世論)의 추이에 부화뇌동하지 않았으며, 세상과 사람들의 갖가지 관습과 속박의 굴레를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언제나 자신의 정확한 시각을 제기했다.

그는 결코 단순히 지위의 높낮이나 성공 여부에 의해 인물과 사건을 평가하지 않았고, 기본적으로 역사와 사회에 기여하고 공헌한 인물을 높이 평가해 열전(列傳)과 세가(世家)에 수록했다. 특히 자신이 처한 역경을 딛고 분발해 이름을 드러낸(立名) 인물에 특별히 주목했다. 그리해 비록 세상에서 천한 직업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성실하게 고기 기름을 매매해 부를 일궈낸 인물이나 장(醬)을 판매해 부자가 된 인물을 "국가의 법에 저촉되지 않고 또 백성들의 생활에 해를 주지 않았으며, 매매는 시기에 따라 결정했다. 이렇게 그의 재부는 증가했고, 총명한 사람 역시 취할 바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기꺼이 그들을 탁월한 인물로 평가해 그 이름을 '화식열전'의 화식가 반열에 올렸다.

또 세상 사람들이 그저 불한당이라고 비난했던 유협(遊俠)들에 대해서도 "겉으로는 인의를 말하면서도 실은 대부분 위선과 아부로 가득 찼고, 일상적으로 부패를 일삼던 유학자나 권문세가"들과 달리 "말에 언제나 신용이 있었고 행동에는 항상 성과가 있었다. 그리고 한번 입 밖으로 나온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성심성의를 다했다(言必信, 行必果, 已諾必誠)"고 평가하면서 그들을 기려 '유협열전'에 기록했다.

인간에 대한 가장 통렬한 성찰의 기록


사마천은 특별히 '영탄(詠嘆)'의 표현에 장점을 가진 탁월한 작가였다. 인물과 사건에 대한 그의 평가에는 마치 자욱하게 겹겹이 쌓인 안개처럼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감정이 켜켜이 응축돼 있다. 이는 역사 기록이기에 많은 부분 필연적으로 담백하게 묘사될 수밖에 없는 문장 중에 오히려 뚜렷이 각인돼 가장 강렬한 서정미를 제공해주는 요소였다.

사마천은 그러한 심오하고도 더 이상 비할 바 없을 강렬한 감정을 인물과 사실에 대한 냉정한 기술과 분석에 성공적으로 결합시켜내 마침내 감정과 사실(史實)이라는 양자를 절묘하게 통일시켰다. 그리해 각각의 인물과 사건에 생명력을 불어넣음으로써 마치 인물과 사건이 마치 지금 우리 눈앞에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을 주게 된다. 본디 인간의 감성이란 인간들에게 널리 공유되고 소통돼 보편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기에 <사기>는 결코 범상하지 않은 사마천의 경력을 바탕으로 해 인간과 하늘의 철리(哲理)에 대한 심오한 사색 그리고 가장 인간적이고도 명징한 감성의 함축미가 더해져 가장 빼어나게 묘사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모이고 이익이 없으면 떠나가는" 인간세상의 염량세태(炎凉世態)에 대한 사마천의 냉정하되 신랄한 묘사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도 동시에 눈을 지그시 감고서 현실을 인정하게 만든다.

사마천은 '급정열전'을 마치며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하규 사람 적공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처음 정위(廷尉)가 됐을 무렵 손님들이 집의 대문에 가득 찼었다. 그러나 관직에서 물러나자 손님들이 없어져서 대문에 그물을 치고 참새를 잡을 정도로 사람들의 왕래가 없었다. 그러나 다시 정위가 되자 손님이 또 모두 방문하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문에 크게 이렇게 적어서 붙여 두었다. '한번 죽고 한번 살아 사귀는 정의 진실한 여부를 알게 되고, 한번 가난하고 한번 부자가 돼 사귀는 태도를 알았으며, 한번 귀해졌다가 한번 천해져서 사귀는 정의 진실함을 알게 됐다.

'혁명의 시대' 혹은 난국에 사는 우리의 훌륭한 등불, <사기>

역사는 결국 인간 활동의 기록이다. 역사가로서 사마천의 눈은 필연적으로 인물로 향한다. 비범한 인재에 대한 사마천의 애정은 <사기> 전편의 곳곳에서 발현된다. 그는 인물의 탁월함을 묘사할 때, 특별히 '아름다울' '가(嘉)'와 '능력이 있다'는 '능(能)' 자를 자주 사용했다. 그는 단언한다. "현능(賢能)한 자가 기용되지 않음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의 수치다." 그리고 또 말한다. "국가의 안위는 명령에서 비롯되고, 국가의 존망은 인사에서 결정된다." 사마천이 2천 년 지난 오늘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금언이다. 하지만 사마천의 관심은 비단 황제나 제후 그리고 영웅에게만 머물지 않았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지혜란 결코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에 독점돼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한 고조 유방이 천하를 얻어 문신(文臣)들이 비와 같고, 맹장들은 구름과 같았다. 그렇지만 강대한 흉노에게 속수무책이었으므로 도읍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변경을 지키던 유경(劉敬)이라는 수졸(戍卒: 변경을 지키던 군졸)이 수레를 끄는 막대를 내려놓고 양털 가죽옷을 걸친 채 한 고조 유방을 뵙고는 관중에 도읍해 흉노와 화친할 것을 건의했다. 결국 이 건의는 받아 들여졌다. 이 대목에서 사마천은 일개 말단 병사의 제안으로부터 민중의 지혜를 발견한다. 그리고 특별히 유경(劉敬)을 위한 열전을 짓고 나아가 "지혜가 어찌 독점될 수 있는가!"라는 철리(哲理)의 차원으로 높인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천금의 값이 나가는 가죽 옷은 여우 한 마리의 털로 만들 수 없고, 높은 누대의 서까래는 나무 한 그루로 만들 수 없으며, 3대(三代)의 성대함은 한두 명 선비의 지혜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고조는 미천한 신분으로 몸을 일으켜 천하를 평정했는데, 그것은 여러 사람의 지혜가 합해진 결과이다. 그러나 유경은 수레를 끄는 막대를 내던지고 한 번 도읍을 옮기라고 유세함으로써 만세의 안정을 이루었으니, 지혜라고 하는 것을 어찌 한 개인이 독점할 수 있겠는가!

<사기(史記)>가 불후의 명작이요 명품인 까닭은 그것이 우리 인간과 역사의 본질을 진정성으로 관통하고 있으며, 인간과 역사에 대해 가장 통렬하면서도 동시에 진정성 있는 애정으로 가득한 그 절절한 서사(敍事)는 역대 어느 당대인들에게도 언제나 어둠을 밝히는 반짝이는 등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 '혁명의 시대' 혹은 난국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대단히 훌륭한 스승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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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준섭

1970년대말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학생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몸담았으며, 1998년 중국 상하이 푸단(復旦)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2004년 국제관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회도서관 조사관으로 일했다. <변이 국회의원의 탄생>(2019), <광주백서>(2018), <대한민국 민주주의처방전>(2015) , <사마천 사기 56>(2016), <논어>(2018), <도덕경>(2019)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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