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양승태 대법원장은 일부 판사들의 사퇴 요구에 직면했다. 1988년 김용철 대법원장의 용퇴이후 30년 동안 없었던 일이다. 지난 19일엔 사법사상 세 번째로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소집돼 판사 블랙리스트 추가조사 등을 요구사항으로 결의했다. 양 대법원장은 시민단체에 의해 직무남용혐의로 검찰에 고발당한 상태이기도 하다. 국회법사위도 조사청문회를 벼르고 있고 국회개헌특위는 법관인사권과 사법행정권을 대법원장에서 사법평의회로 이양하는 개헌안을 내놓았다.
이 모든 움직임은 지난 3월 5일 법원행정처의 사법개혁 저지 의혹이 언론보도를 탄 이래 계속 진행돼 온 저강도 사법파동의 후과들이다.
사법파동의 1단계 산물로 이인복 진상조사위가 구성돼 지난 4월18일 조사결과 보고서를 냈다. 그러나 부실조사로 말미암아 다시 판사들이 들고 일어나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재조사 및 전국법관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사법파동의 2단계였다. 지난 19일 개최된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아예 사법개혁 저지 의혹 및 판사 블랙리스트의혹 추가조사소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사권한 위임을 요구했다.
이번 사법파동의 성격상 양승태 대법원장은 한국 사법부의 마지막 제왕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아니, 꼭 그렇게 돼야 한다. 우리 사회는 촛불시민혁명으로 공사 분간 못한 제왕적 대통령을 쫓아냈다. 드디어 제왕적 대법원장도 도마 위에 올라와있다.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력은 지금까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사법 부문의 영순위 제도 적폐라고 할 수 있다.
청산 대상 사법 적폐라고 하면 유전무죄, 특히 재벌 총수에 대한 집행유예 판결을 제일 먼저 떠올리기 쉽다. 전관예우와 정치사법도 빠뜨릴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사법적폐들이 단연 대법원장의 제왕적 법관인사권에 그 뿌리와 토대를 두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사법파동은 처음으로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력을 본격적으로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한국 사법 역사의 획기적 사건이다.
우리 헌법과 법률은 대법원장에게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전방위적 법관인사권을 부여한다. 대법원장은 모든 법관에 대해 첫째, 최초 임용 여부와 10년 주기 재임용 여부를 정할 수 있다. 둘째, 전국 어디로나 정기적으로 전보시킬 수 있다. 셋째, 해외연수를 보내줄 수 있다. 넷째, 고법부장 승진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다섯째, 법원행정처의 모든 보직에 발탁할 수 있다. 대법원장은 또한 여섯째, 모든 지법원장과 고법원장을 임명할 수 있고, 일곱째, 모든 대법관에 대해 임명제청권을 갖는다.
대법원장의 법관인사권 행사를 견제하기 위해 대법관회의, 대법관후보추천위, 판사회의 등이 없는 건 아니지만 현실적으로는 통과의례를 위한 들러리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대법원장은 사법부 안에서 누구한테도 견제 받지 않는 막강한 권력을 누린다. 제왕적 대법원장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거꾸로 한국의 법관들은 대법원장의 제왕적 인사권 앞에 장기판의 졸처럼 무력감을 느끼며 사법부 관료로 길들여진다. 매년 전보와 승진, 재임용이 대규모로 이뤄지는 현행 법관인사제도 아래서 한국의 법관들은 꽃보직과 승진, 좋은 임지와 주요 재판부를 향해 경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면 대법원장과 그의 대리인인 소속 법원장에게 잘 보여야 한다. 주요 사건을 판결할 때도 혹시 튀지나 않을까, 혹시 밉보이진 않을까 신경을 써야한다. 이처럼 대법원장의 제왕적 인사권은 법관독립의 관점에서 수용할 수 없는 제도다.
비교법적으로 한국의 대법원장처럼 제왕적 인사권을 보유한 외국의 대법원장을 찾아보기 어려운 건 그래서다. 선진국에서는 법관의 독립성 보장을 위해 법관의 전보마저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소신파 법관을 오지나 한직으로 좌천 인사할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기 위해서다. 재임용 제도도 소신파 판사를 해임하는 데 악용될 소지가 높기 때문에 운영하지 않는다.
대법원장이 대법관제청권을 갖는 나라도 없다. 대법원장 덕에 대법관이 된 이가 대법원장과 대등한 입장에서, 때로는 대법원장과 맞서며, 판결하는 게 쉽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법원장도 소속법관의 호선으로 뽑고 사무분담과 사건 배당도 법관자치에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법행정권과 법관인사권 자체를 대법원장이 아닌 별도의 헌법기관(사법평의회, 사법최고위 등 다양한 명칭)에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에선 법관인사권과 사법행정권이 대법원장 1인에게 속한다는 엄청난 사실이 알려지면 외국의 대법원장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잠시 부러움과 자괴감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으나 곧바로 한국의 사법부를 매우 얕잡아볼 게 틀림없다. 법관인사권이 대법원장 1인에게 집중되면 법관사회의 관료화와 법관독립(사법독립)의 손상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법관사회를 눈치 보는 난쟁이들의 관료사회로 타락시키는 제왕적 대법원장의 존재는 민주법치국가의 품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대법원장이 제왕적 권력을 누리는 대가는 누가 지불하는가? 일차적으로 법관이 지불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법이용자인 국민이 지불한다. 세상의 이목이 쏠린 주요 사건에서 법관이 인사권자인 대법원장과 소속법원장의 의중을 살피게 되면 공정사법이 멀어지고 사법불신이 확산된다. 우리나라 법관들은 이구동성으로 지금의 제왕적 대법원장 아래서는 소신파 판사들이 발붙이기 어렵다고 토로한다.
이거 놔두면 진짜 큰일 난다. 한시바삐 바로잡아야 한다. 제왕적 대법원장 탓에 소심법관이 소신법관을 대체하면 사법부의 권력통제는 시늉에 그치고 약자보호는 지체되며 사법불신은 심화된다. 이것이 기관과 제도로서 제왕적 대법원장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인권보장에 미치는 해악이다. 그로 말미암는 사회적 비용은 힘없는 국민 순으로 몸으로 부담한다.
그럼에도 제왕적 대법원장에 대한 우리사회의 문제의식은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문제의식과 비교해볼 때 너무나도 일천하고 미약하다. 그 업보는 결코 간단치 않다.
첫째,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와 인권보장을 위한 아주 중요한 실천과제를 오랫동안 놓쳤다. 제왕적 대법원장을 그대로 둔 채 사법독립과 공정사법,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논하는 어리석음에 너무 오래 빠져있었다.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력은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보다 훨씬 안정적이다.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은 국정원과 검찰의 시녀화, 총리의 각료제청권 형해화 등 불법과 편법에 빚지는 부분이 적지 않다. 하지만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력은 100% 헌법과 법률에서 나온다. 양대 제왕적 권력의 합헌성과 합법성 차이는 어째서 대통령의 권력행사가 수시로 정치문제로 비화한 반면 대법원장의 권력행사는 그런 일이 없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 대법원장처럼 합헌적, 합법적 제왕에 대해서는 외부 비판이나 시비 논쟁이 몹시 어렵다.
둘째, 지난 역사에서 제왕적 대법원장은 제왕적 대통령에게 합법성과 정당성을 부여하며 제왕적 대통령을 뒷받침해온 가장 중요한 기둥이었다. 정권의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린 정치적, 정책적 사안에서 대법원장은 서울지법과 서울고법의 요로에 배치된 심복법관들과 대법원장의 제청권 행사로 구성된 대법원을 통해 구원투수 노릇을 했다. 코드가 맞는 제왕적 대법원장이 결정적인 순간에 판결로 정권의 손을 들어주지 않으면 제왕적 대통령도 운신의 폭이 좁다. 그럼에도 우리사회는 제왕적 대통령을 청산하려면 동시에 제왕적 대법원장도 청산해야 한다는 진실을 좀처럼 깨닫지 못했다.
지금은 촛불시민혁명으로 제왕적 대통령을 쫓아내고 다시는 제왕적 대통령이 등장하지 못하도록 관련 제도 개혁을 강구하는 중이다. 이런 시점에서 제왕적 대통령의 강력한 동맹인 제왕적 대법원장을 본격적으로 문제 삼게 된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또한 판사들이 앞장서서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매우 자연스럽다. 실은 법학자나 법운동가도 사법부의 내부사정을 아는 게 쉽지 않다. 하물며, 재판받을 경우를 제외하면 사법부의 권력을 체감할 일이 전혀 없는 일반시민에게 사법부의 내부사정은 너무나 먼 얘기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법관들이 제왕적 대법원장의 관료적 사법행정제도를 법관독립의 관점에서 비교법 연구를 통해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건 법관들의 연구모임, 우리법연구회가 1988년에 등장하면서부터다. 그러나 국제인권법의 관점에서 유엔과 EU, OECD 등 국제기구의 관련규범까지 본격적으로 검토하며 더 체계적인 연구조사를 진행한 건 이번에 문제가 된 국제인권법연구회가 2011년에 출범하면서부터다. 국제인권법연구회는 현재 5백 명 가까운 현직 법관을 연구회원으로 둔 최대 법관연구모임이다.
2015년 7월 국제인권법연구회 안에는 사법행정과 법관인사 관련제도를 하나씩 잡아 매달 집중 토론하는 '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연구모임'(인사모)가 결성됐다. 법원행정처는 인사모의 활동상황과 토론결과를 비상한 관심과 경계심을 갖고 감시했다. 법원행정처는 인사모를 법원행정처를 반대하는 불온한 조직으로 규정했다. 지난연말 국제인권법연구회가 법관독립 강화의 관점에서 법관인사제도에 대한 공동학술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자 법원행정처는 금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탄압과 회유의 양동작전을 전개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법원행정처는 법관인사제도 학술대회를 어떻게든 내부행사로 축소하거나 양승태 대법원장의 임기종료(9월 24일)이후로 연기하려고 공작 차원의 꼼수를 몇 가지 동원했다. 통틀어서 법원행정처의 사법개혁저지의혹 또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불리는 일련의 사태가 지난 3월 5일 언론보도로 알려지면서 이번 사법파동이 점화된다.
이런 흐름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번의 사법파동은 문제의식과 조직력을 갖춘 단단한 주체들이 형성돼 있을 뿐 아니라 오랜 조사연구에 의해 탄탄한 논리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전례 없이 '준비된' 사법파동이다. 사법제도의 부분개혁을 내걸었던 과거의 사법파동과 달리 이번엔 법관인사제도와 사법행정시스템의 전면개혁을 내세운 사실도 이번의 특별한 준비태세를 보여준다.
다른 어느 때보다도 주체와 역량이 준비돼 있다는 점에서 이번에는 쉽게 물러서거나 중간에 포기할 것 같지 않다. 전국법관대표회의도 오는 7월 24일, 2차 회의 때부터 법관의 독립성을 국제규범과 선진국 수준으로 보장하는 데 필요한 법관인사제도의 전면 재설계 논의에 착수할 전망이다. 하필이면 양승태 대법원장 말년에 이렇듯 과거와 차원이 다른 사법파동이 터졌다. 소장법관들이 보기에 양 대법원장 시절에 대법원장의 제왕화와 법원행정처의 관료화가 부쩍 심해졌기 때문이다.
지난 3월 25일에 공표된 현직법관 507명의 설문조사결과는 양승태 대법원장의 법관인사와 사법행정에 대한 소장법관들의 진단과 평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절대다수의 응답법관들은 현행 사법행정/법관인사시스템의 주요제도들을 빠짐없이 반드시 고쳐야할 나쁜 제도로 평가했다. 법관독립의 관점에서 볼 때 지금의 대법관제청제도와 법원장임명제도, 법관전보제도와 법관승진제도, 사무분담제도는 조금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절대다수의 현직법관들은 또한 법관독립 침해주범을 다름 아닌 제왕적 대법원장과 관료화된 법원행정처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일반법관들은 대법원장의 제왕적 인사권이 법관독립과 상극이며 본원적인 사법적폐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었다. 이제 법원 안팎의 누구도 이 설문조사결과를 외면하거나 덮을 수 없다. 더 이상 그 문제의식과 처방전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딴청부릴 수 없다. 사법개혁 문제의식의 관점에서 볼 때 대한민국 사법제도사는 법관설문조사결과가 공표된 지난 3월 25일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로 확연하게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개혁파 법관들은 현재의 제왕적 대법원장과 법관인사제도에 대한 유력한 대안으로 사법부와 사법행정의 법관자치방안을 제시한다. 대표적으로 차성안 판사는 첫째,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사법정책 최고결정기관으로서 제왕적 대법원장을 대체한다, 둘째, 대법원장이 임명해온 법원장을 소속법관 호선으로 선출한다, 셋째, 법원장의 사무분담권한을 판사회의 운영위를 선출해서 넘겨준다, 넷째, 지법-고법 이원화를 통해 고법부장 승진제도를 없앤다, 다섯째, 법원행정처를 상근법관 중심에서 비법관 전문가조직으로 대체한다는 방안을 제시한다.
위의 방안들은 기본적으로 지금의 제왕적 사법행정/법관인사를 최대한 법관자치형 사법행정/법관인사로 바꾸자는 내용이다. 이러한 대안은 개헌 없이 법원조직법과 대법원규칙을 고치기만 해도 가능한 점이 장점이다. 또한 법관설문조사결과가 말해주듯이 절대다수의 법관들이 이러한 5종 세트 개혁안을 지지하는 것도 장점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개헌의지를 표명하고 국회개헌특위가 구체적 개헌안 마련에 나선 지금 시점에서 대법관제청권을 행사하고 법관인사권을 가질 최고사법정책기구를 어떤 원칙과 모습으로 구성할지는 좀 더 검토와 논의가 필요하다.
이미 언급했지만 대부분의 국가들은 우리나라와 달리 사법행정권과 법관인사권을 대법원장에게 주지 않고 별도의 헌법기관에 준다. 보통 사법평의회나 사법최고위 등의 명칭이 붙는데 구성 원리에 따라 세 유형으로 대별된다. 법관대표로만 구성하는 순수법관자치기구형, 법관대표를 중심으로 법률가직역(검찰, 변호사, 법학교수)대표를 망라하는 법관·법률가자치기구형, 국회대표와 법관대표를 중심으로 변호사대표와 법학교수대표를 섞는 국회·법률가혼합기구형이 그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임명직이나 당연직이 아니라 각 직역이나 국회에서 선출된 ‘대표’들로 위원회가 구성된다는 점이다.
어떤 유형이든 상관없이 법관인사권과 사법행정권이 별도의 합의제헌법기관에 부여될 경우 법관은 인사권자의 눈치를 볼 일이 없다. 인사권자가 합의제 대표기구이기 때문에 특정한 한두 사람의 눈치를 봐도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모든 위원들의 눈치를 보는 건 물론 불가능하다. 또한 법관독립성도 강화된다. 일단 대법원장이나 소속법원장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데다 법률가들이 주도할 사법정책기관이 법관독립에 역행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양승태 대법원장은 어떻게 해야 하나? 28일 전격 발표한 판사회의 상설화 정도로는 부족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제일 필요한 것이 과거의 잘못에 대한 정직한 고해와 철저한 반성이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다음, 과거의 잘못을 책임지고 바로 사퇴해서 새 길을 앞당겨주든가, 모든 사심을 버리고 전국법관대표회의와 함께 사법개혁에 앞장설 것을 약속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만약 어정쩡한 제3의 길을 선택하면 고작 1, 2주 안간힘을 쓰다 결국 소장법관들에게 떠밀려 그만둘 수밖에 없다.
두 가지만 생각해보면 왜 그런지 답이 나온다. 양 대법원장이 이도저도 아닌 대응으로 면피하려들면 법관들의 집단행동, 즉, 사퇴요구가 빗발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국회가 인사청문회국면이 끝나는 즉시 사법파동 청문회 개최를 벼르게 될 것이다. 시민단체들의 고발장을 접수한 검찰도 수사의 칼을 뽑을 시점을 저울질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을 피하려면 양승태 대법원장은 오직 사법부의 명예와 법관의 독립을 위해서 어떤 길이 최선인지만 고민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작금의 상황에서 남은 임기를 채우려면 최소한 국민들과 법관들에게 막판 감동과 믿음을 줘야 한다.
그래서 말이다. 나는 이번의 사법파동을 계기로 양승태 대법원장이 제왕적 대법원장 시대를 본인의 대에서 끝내겠다고 깜짝 선언하고 전국법관대표회의에 발본적인 개혁방안을 마련해달라고 당부하는 파격적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만약 양승태 대법원장이 지난 과오를 진솔하게 사과하며, 전국법관대표회의의 개혁주도권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대승적으로 뒷받침해줄 경우 전국법관대표회의도 양승태 대법원장 임기 중에 치고나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새 대법원장이 임명되면 아무리 개혁적인 인물이라도 권한의 대폭 축소를 달가워하지 않고 타협안을 제시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반면 양 대법원장의 경우 허물이 큰데다 임기도 다 돼 어떤 개혁안을 내밀어도 적극적으로 저항할 힘이 없다. 일반적인 예측과 달리 제왕적 대법원장의 해체 및 사법행정시스템 재설계 방안에 대한 합의가 전국법관대표회의와 양승태 대법원장의 몫일 수도 있는 이유다.
양 대법원장의 임기가 90일도 채 남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양 대법원장의 임기 내에 그와 같은 합의까지 기대하는 건 무리일 수 있다. 그럼에도 양 대법원장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제왕적 대법원장의 해체와 법관독립의 강화라는 사법개혁의 목적과 방향을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서 확립하는 역할이 그것이다. 드물지만 진보의 역사가 가장 맞지 않는 사람을 통해 스스로를 실현하는 때가 있다. 어쩌면 지금이 그와 같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작동하는 때일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번의 잘 준비된 사법파동의 결과로 사법부에서 제왕적 존재가 제거되고 사법독립과 법관자치가 획기적으로 강화될 것으로 낙관한다. 머지않아 전개될 개헌국면도 사법개혁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 것으로 기대한다. 후세의 역사가 2017년의 대한민국은 촛불시민혁명의 힘으로 제왕적 대통령에 이어 제왕적 대법원장을 청산하고 법관독립과 공정사법을 보장하는 새로운 사법행정시스템을 만들어냈다고 기록할 것으로 상상하며, 양승태 대법원장의 올바른 결단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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