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45강은 호남사림(湖南士林)의 은둔지로서 아름다운 정자(亭子)와 별서(別墅)가 즐비한 <담양고을>을 찾아갑니다.
흔히들 담양(潭陽) 하면 대나무가 유명하여 죽세공품과 죽순, 대통밥 등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곳은 예부터 호남사림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머물면서 학문을 논하고 시문을 지으며 많은 정자를 세웠습니다. 모든 정자와 별서들이 아름답지만 특히 여름이 깊어가는 계절에 활짝 핀 배롱나무가 절경인 명옥헌(鳴玉軒)이 으뜸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45강은 2017년 7월 23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45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담양IC-봉산면(송강정/면앙정)-담양읍(관방제림/객사리석당간/남산리오층석탑/담양향교)-대덕면(모현관/미암유물전시관)-창평면(삼지천마을)-점심식사 겸 뒤풀이(창평국밥거리)-창평향교-명옥헌-수남학구당-식영정-환벽당-취가정-소쇄원-독수정원림-서울의 순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45강 답사지인 <담양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추월산과 무등산에 감싸인 땅
담양의 산줄기는 북고남저(北高南低)의 지형으로 동서보다 남북이 깁니다. 북쪽은 추월산(731m), 산성산(573m), 광덕산(584m)이, 서쪽은 병풍산(822m)이, 남동쪽은 국수봉(558m), 무등산(1,187m)이 솟아 있으며, 남서쪽은 평야지대로 이어집니다.
물줄기는 담양의 용추봉에서 발원하여 전남 중서부 지역을 지나 서해로 흘러드는 영산강의 최상류인 증암천, 용천, 담양천이 담양의 중앙을 흘러가는데 특히 서남쪽을 흐르는 담양천 유역에는 봉산들, 수북들, 고서들, 대전들 등의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담양 지방은 삼한 중 마한(馬韓)에 속했으며 369년(근초고왕 24) 백제가 전남 지방을 지배하는 시기를 전후하여 백제의 영역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에 담양 지역에는 추자혜군(秋子兮郡)과 율지현(栗支縣)이, 창평 지역에는 굴지현(屈支縣)의 존재가 나타납니다.
담양 지방의 3군현의 위치를 비정해 보면 추자혜군(秋子兮郡)은 현재의 담양읍과 무정면(武貞面) 일대, 율지현(栗支縣)은 현재의 금성면(金城面) 일대, 굴지현(屈支縣)은 현재의 창평면(昌平面), 고서면(古西面) 일대로 추정됩니다.
신라시대는 757년(경덕왕 16) 대대적인 지방통치조직 개편과 군현의 이름에 대한 개정 작업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추성군(秋成郡)과 율지현(栗支縣), 추성군은 예하에 지금 곡성군 지역인 과지현(菓支縣, 현 玉果)과 금성면 지역인 율원(栗原, 현 原栗)을 영속하며, 창평 지역의 굴지현(屈支縣)은 기양현(祁陽縣)으로 개명되어 무주(武州)의 영현이 되었습니다.
고려시대는 940년(태조 23)에 기양현(祁陽縣)이 창평현(昌平縣)으로, 율원현(栗原縣)이 원율현(原栗縣)으로 개칭되고 추성(秋成)을 비롯하여 창평(昌平), 율원(栗原) 등의 여러 현이 무주의 영현으로 편제되었습니다. 그후 995년(성종 14) 추성군을 고쳐서 군사적 의미가 강한 담주도단련사(潭州都團鍊使)를 삼았으나 시행 10년 만에 폐지되고 1018년(현종 9) 새로운 군현제도에 따라 나주목(羅州牧)의 속군(屬郡)이 되었으며, 원율현과 창평현도 나주목의 속현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는 1395년(태조 4) 담양이 국사(國師) 조구(祖丘)의 고향이라 하여 감무관(監務官)을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고, 1399년 공정왕(정종)비 김씨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군(郡)에서 부(府)로 승격하였으며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都護府)로 바뀌었고 1435년(세종 17)에는 창평의 관할이었던 장평(長平)과 갑향(甲鄕)의 향과 부곡이 담양도호부(潭陽都護府)의 영역에 들어와 있어 이를 담양에 병합하였습니다.
1895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전국을 23부의 체제로 나눌 때 담양과 창평은 남원부(南原府) 산하 20개 군 중 하나로 편제되었으나 1896년 13도제로 변경하자 담양군과 창평군은 전라남도에 속하게 되면서 담양군은 2등군, 창평군은 4등군으로 되었습니다.
담양 지역에는 담양읍과 창평면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담양향교(潭陽鄕校)는 1398년(태조 7)에 창건하여 수차 중수를 거듭하였고 1794년(정조 18) 부사 이헌유가 중건하여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며 대성전에는 5성 2현과 우리나라의 18현을 봉안하고 있는데, 현재는 대성전(大成殿), 동무(東廡), 서무(西廡), 내삼문(內三門), 명륜당(明倫堂), 서재(西齋), 외삼문(外三門), 고직사(庫直舍) 등이 남아 있습니다.
창평향교(昌平鄕校)는 1399년(정종 원년) 창건하였다고 <읍지>에 기록되어 있으며 1479년(성종 10) 현 위치로 옮긴 후 1689년(숙종 15) 현령 박세웅에 의해 대성전과 명륜당을 수리하였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내삼문, 외삼문, 고직사 등이며 명륜당 좌우에 있는 은행나무는 수령 500여 년이 넘는 것으로 창건 당시에 심은 것이라고 하며 경사면에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건물배치입니다.
담양에만 있었던 교육기관, 학구당
조선시대 교육기관은 관학(官學)으로 중앙에 성균관(成均館), 지방에 향교(鄕校)가 있었고, 사학(私學)으로 서원(書院), 서재(書齋), 서당(書堂) 등이 있었는데 이곳 담양만이 우리나라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학구당(學求堂)이 있습니다.
고려시대 불교진흥정책(佛敎振興政策)에 따라 사원(寺院)이 건립되었다가 조선이 건국되면서 사회적 이념이 척불숭유정책(斥佛崇儒政策)으로 바뀌게 되자 새로운 정치, 사회적 상황에 맞는 건물들을 전대(前代)의 구조물 자리에 새로이 건립하여 현재의 정책을 확립하려는 의도에서 학구당(學求堂)이 건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사찰(寺刹)이 있었던 것을 허물어버리고 그 자리에 사원(書院)이나 향교(鄕校)를 건립하여 전 시기의 잔유물(殘留物)들을 없애버리려 하였으며 담양의 수북, 수남 학구당(水北, 水南 學求堂)은 새로운 사회질서에 맞는 형태로 바뀌었던 유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남학구당(水南學求堂)은 창평학구당으로도 불리는데, 원래는 고려 말에 건립된 향적사(鄕績寺)라는 사찰이었으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척불정책(斥佛政策)에 의해 폐사(廢寺)의 지경에 이르자 1579년(선조 3) 창평에 살고 있는 25성씨(姓氏)가 숭고한 도의(道義)와 국가의 문무정책(文武政策)에 따라 학업을 연구하며, 유교(儒敎)의 기풍을 진작하기 위하여 명칭을 서원이라 바꾸어 중건하였으나, 1619년(광해군 11) 다시 ’창평학구당’이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수북학구당(水北學求堂)은 지역 출신인 진(陣), 남(南), 박(朴) 3성씨(姓氏)가 힘을 합쳐 창건하였으나, 호환(虎患) 등 여러 가지 사고로, 1623년(인조 1)에 이(李 성주), 김(金 연안), 우(禹 단양), 정(丁 영성) 4성씨(姓氏)가 당초의 학구당에서 300m 떨어진 현재의 이곳으로 옮겼으며 1769년(영조 45) 윤광현(尹光絢) 창평현령(昌平縣令)이 새로 복원하였습니다.
호남의 3대 산성, 금성산성
금성산성(金城山城)은 삼한시대 또는 삼국시대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문헌상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나옵니다. 1380년(우왕 6) 왜구에 대비해 개축하면서 ’금성(金城)’이라는 기록이 나오나 1256년(고종 43) 몽골의 차라대군(車羅大軍)이 담양에 주둔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13세기 중엽 산성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담양에는 읍성(邑城)이 없기 때문에 금성산성은 읍성적 산성(邑城的 山城)으로 관리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큰데, 전란시에 구원군이 올 때까지 저항하기 유리한 산상(山上)에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임란 이후 장성의 입암산성(立岩山城), 무주의 적상산성(赤裳山城), 담양의 금성산성이 호남의 3대 산성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옛 문헌을 종합해 보면 외성(外城), 내성(內城), 성문(城門), 옹성(甕城), 망대(望臺) 등을 갖춘 산성으로 성내에는 사찰(寺刹), 민가(民家), 우물 등과 관아시설 및 군사시설과 같은 각종 시설물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길이는 외성이 6,486m, 내성이 859m이며 동서남북문의 터가 있는데 이 4개소의 통로 외에는 절벽 등으로 통행이 불가능하여, 요새로는 더할 데 없이 좋은 지리적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관방제림(官防堤林)은 1648년(인조 26) 부사 성이성(成以性)이 수해(水害)를 막기 위해 제방을 축조하고 나무를 심기 시작하였고, 1854년(철종 5)에는 부사 황종림(黃鍾林)이 다시 이 제방을 축조하면서 그 위에 숲을 조성한 것으로 달리 ‘마을숲’이라고도 부릅니다.
아름다운 정자와 별서들
담양에는 호남사림들과 그들과 관련된 인물들의 정자와 별서가 많습니다.
소쇄원(瀟灑園)은 양산보(梁山甫)가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능주로 유배 가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1530년(중종 25년) 경 꾸민 조선시대 대표적인 별서정원(別墅庭園)의 하나입니다.
소쇄원 경영에는 송순(宋純)과 김인후(金麟厚)도 참여했는데 송순은 양산보와 이종사촌 간이며, 김인후는 양산보와 사돈 간이었습니다. 그밖에 담양부사를 지낸 임억령(林億齡)과 인근 환벽당의 주인인 김윤제(金允悌) 등도 이곳에서 함께 풍류를 즐겼습니다.
소쇄원의 공간구성을 기능면에서 보면 크게 애양단(愛陽壇)을 중심으로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 광풍각(光風閣)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內堂)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원(前園)은 대봉대(待鳳臺), 상하지(上下池), 물레방아 그리고 애양단(愛陽壇)으로 이루어져 있고, 계원(溪園)은 오곡문(五曲門) 곁의 담 아래에 뚫린 유입구로부터 오곡암, 폭포 그리고 계류를 중심으로 광풍각(光風閣)이 있고 광풍각의 대하(臺下)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습니다. 내원(內園)은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으로서 제월당과 오곡문(五曲門) 사이에는 두 계단으로 된 매대(梅臺)가 있습니다. 오곡문(五曲門) 옆의 오암(鼇岩)은 자라바위라 부르기도 하며 제월당 앞에는 마당이 있고 광풍각 뒤편 언덕에는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도오(桃塢)가 있습니다.
제월당(霽月堂)은 주인을 위한 집으로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이고, 광풍각(光風閣)은 손님을 위한 사랑방으로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죽림재(竹林齋)는 죽림 조수문(竹林 曺秀文)이 건립한 정사(亭舍)로서 창녕 조씨 문중에서 관리하는 강학(講學)의 장소입니다. 건물은 임진왜란 당시 귀중한 문적과 함께 소실되었고 1623년 (인조 1) 죽림선생의 6대손인 삼청당(三淸堂) 조부(曺簿)에 의해서 중건된 후 그의 아들 운곡(雲谷) 호(浩)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708년(숙종 34) 문인과 후손에 의해 죽림사(竹林祠)가 건립되었고 1751년(영조 27)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습니다.
조수문은 어려서부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한 뒤 죽림정사를 건립하여 후진교육으로 여생을 보냈습니다.
죽림재에는 죽림사의 강당인 취사당(聚斯堂), 조유도(曺由道)의 묘각(墓閣)인 세일재(歲一齋), 조부(曺簿)의 효자 정려각인 충효각(忠孝閣), 죽림사유허비(竹林祠遺墟碑), 조원향기실비(曺沅享紀實碑), 장서각(藏書閣) 등이 있습니다.
명옥헌과 식영정
명옥헌(鳴玉軒)은 오희도(吳希道)가 외가가 있는 이곳에 망재(忘齋)라는 조촐한 서재를 짓고 글을 읽으며 지내다가 인조반정 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 기주관이 되었으나 1년 만에 천연두를 앓다가 죽고 말았는데 30여 년이 지난 1652년 무렵에 넷째 아들인 오이정(吳以井)이 아버지가 살던 터에 명옥헌을 짓고 건물 앞뒤에는 네모난 연못을 파고 주위에 배롱나무를 심어 정원을 가꾸었습니다.
연못 위쪽으로는 암반이 깔려 있고 그중 한 바위에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고 전해지는 ‘명옥헌 계축’(鳴玉軒 癸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명옥헌에 걸려 있는 현판은 이 글씨를 모각한 것이며 정자 뒤편 잡풀로 덮여 있는 건물터는 이 지방의 이름난 선비들을 기려 제사 지내던 도장사(道藏祠)가 있던 자리로 1825년에 창건되었다가 1868년 대원군 때 철폐되었습니다.
명옥헌의 오른편에는 인조대왕 계마행(仁祖大王 繫馬杏)이라 불리는 300년 이상 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인조가 왕이 되기 전에 전국을 돌아보다가 오희도를 찾아 이곳에 왔을 때 타고 온 말을 매어둔 곳이라 이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오희도는 1602(선조 35)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3(인조 1)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의 관원으로 천거되었고, 기주관을 대신하여 어전에서 사실을 기록하는데 민첩하여 여러 대신들의 칭찬을 받고 검열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나간 바로 그해에 천연두에 걸려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식영정(息影亭)은 1560년(명종 15) 서하 김성원(棲霞 金成遠)이 창건하여 장인(丈人)인 석천 임억령(石川 林憶齡)에게 증여한 정자입니다. 식영정 바로 곁에 본인의 호를 딴 서하당(棲霞堂)이란 또 다른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최근 이를 복원하였으며, 제봉 고경명(齊峰 高敬命), 송강 정철(松江 鄭澈) 등과 함께 ’식영정 사선(息影亭 四仙)’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김성원은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60년(명종 15)에 침랑(寢郞)이 되었으며 1581년(선조 14)에 음보로 제원도찰방(濟原道察訪)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 동복현감(同福縣監)으로 각지의 의병들과 제휴하여 현민(縣民)들을 보호하였습니다.
송강의 처외재당숙으로 송강보다 11년 연상이나 송강이 성산(星山)에 와 있을 때 같이 환벽당(環壁堂)에서 공부하던 동문이었습니다.
송강과 <성산별곡> <사미인곡>
정철은 식영정, 환벽당, 송강정(松江亭) 등 성산 일대의 자연경관을 벗 삼아 머물며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었습니다. 또한, 송강은 이곳에 머물며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 하서 김인후(河西 金仁厚),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承) 등 당대의 명유들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제봉 고경명(齊峰 高敬命), 옥봉 백광훈(玉峰 百光勳),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 등과 교우하면서 시문을 익혔습니다.
환벽당(環璧堂)은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낸 김윤제(金允悌)가 낙향하여 창건하여 인재를 기르던 곳으로, 환벽(環璧)이란 당호는 신잠(申潛)이 지었고 송시열이 쓴 제액(題額)이 걸려 있으며, 임억령(林億齡), 조자이(趙子以)의 시가 현판으로 남아 있습니다.
김윤제의 호는 사촌(沙村)이며 1528년 진사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나주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였으며 관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을 썼습니다.
그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정철(鄭徹)과 김성원(金成遠)이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과 김덕보 형제는 그의 종손으로 역시 김윤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특히 정철은 16세 때부터 27세에 관계에 나갈 때까지 환벽당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는데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는 김윤제가 어린 정철을 처음 만난 사연이 깃든 곳입니다.
조부의 묘가 있는 고향 담양에 내려와 살고 있던 당시 14살의 정철이 순천에 사는 형을 만나기 위하여 길을 가던 도중에 환벽당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때마침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가 꿈에 창계천의 용소에서 용 한마리가 놀고 있는 것을 보고 꿈을 깬 후 용소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비범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고 합니다.
김윤제는 소년을 데려다가 여러 가지 문답을 하는 사이에 그의 영특함을 알게 되었고 그는 순천에 가는 것을 만류하고 슬하에 두어 학문을 닦게 하였으니 정철은 이곳에서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등 명현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웠고 후에 김윤제는 그를 외손녀와 혼인을 시켜 27세에 관계로 진출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취가정(醉歌亭)은 충장공 김덕령(金德齡)이 출생한 곳으로서 환벽당 남쪽 언덕 위에 있으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고 그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1890년(고종 27) 후손 김만식(金晩植) 등이 세웠습니다.
정자의 이름은 정철의 제자였던 석주 권필(權糧)의 꿈에서 비롯되었는데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이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한 맺힌 노래 취시가(醉時歌)를 부르자, 권필이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고 합니다.
은사(隱士)의 고절(高節) 담은 독수정(獨守亭)
독수정(獨守亭)은 고려 말에 북도안무사(北道按撫使) 겸 병마원수(兵馬元帥)를 거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한 서은(瑞隱) 전신민(全新民)이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 72현(杜門洞 72賢)과 함께 두 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이곳에 은거하면서 지은 정자인데 현재의 건물은 1891년(고종 28)에 후손에 의해 재건된 것입니다. 정자는 제외되고 정자 주변의 원림이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전신민(全新民)은 계류(溪流)가 흐르는 남쪽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후원(後園)에는 소나무를 심고 전계(前階)에는 대나무를 심어 수절을 다짐했으며 독수정의 좌향은 북향(北向)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침마다 송도(松都)가 있는 북쪽을 향하여 곡배(哭拜)하기 위해서였으며, 독수정이란 명칭은 이백(李白)의 시에 나오는 ’이재시하인 독수서산아(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에서 따온 것으로 은사(隱士)의 고절(高節)을 나타낸 것입니다.
면앙정(俛仰亭)은 송순(宋純)이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내려와 지은 정자로 이곳에서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비롯하여 강호제현(江湖諸賢)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제봉 고경명(齊峰 高敬命),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백호 임제(白湖 林悌), 송강 정철(松江 鄭澈) 등이 그에게 사사했습니다.
송순은 자(字)가 수초(守初), 호(號)는 기촌(企村), 면앙정으로 1493년(성종 24) 담양군 봉산에서 출생하여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別試文科)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1547년(명종 2) 봉문사(奉聞使)로 북경에 다녀왔으며 이후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1550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었고 1569년(선조 2) 대사헌(大司憲),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으며, 의정부 우참찬(議政府 右參贊) 겸 춘추관사(春秋館使)를 지내다 사임하였습니다.
송강정(松江亭)은 송강 정철이 1584년(선조 17)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동인(東人)들이 합세하여 서인(西人)을 공박하여 마침내 양사(兩司)로부터 논척(論斥)을 받아 다음해 조정을 물러나자 이곳 창평으로 돌아와 4년 동안을 평범한 인간으로서 또한 시인으로서 조용한 은거생활하며 <사미인곡(思美人曲)>을 썼던 곳입니다.
<사미인곡>은 제목 그대로 연군지정(戀君之精)을 간절한 마음을 한 여인이 남편을 이별하고 사모하는 정에 기탁해서 읊은 것인데 송강 자신의 임금에 대한 충정을 표현한 노래라 할 수 있으며 이때가 심각한 실의에 빠져 있었던 시기라 송강은 세상을 비관하고 음주와 영탄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척서정(滌暑亭)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다른 정자들이 선비들의 시문학과 원림문화의 본거지로 기능하면서 대부분 강변 등의 경승지에 위치하는데 반하여, 마을 한가운데에 있어 교류와 교육공간으로 기능하는 특징이 있는 정자입니다.
정자에는 현판과 야은 이정태(野隱 李鼎泰)의 시 2수, 이인(李璘)의 시, 1849년의 이동욱(李東勖)의 기문, 1893년의 시와 기문 등이 기록되어 있는 편액도 10개가 있으며 이들 기록으로 미루어 척서정은 17세기에 건립되어 1827년 등 몇 차례 중수하였고 원래는 강호정이라 했다가 뒤에 척서정으로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소산정(篠山亭)은 1927년에 환학 조여심(喚鶴 曺汝諶)이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 등과 더불어 소요하던 유적을 기리기 위해 후손인 창녕인 동호당 조은환(桐湖堂 曺殷煥)이 용담대(龍潭臺) 위에 건립한 정자입니다. 조여심은 문장력이 뛰어나고 효성이 극진했던 사람으로 그와 교유한 인물은 면앙정 송순, 양곡 소세양, 석천 임억령, 고봉 기대승,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등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만옹정(晩翁亭)은 무등산을 바라보며 광주호에서 내려오는 증암천을 끼고 자리잡고 있는 정자로 1928년에 창녕 조씨 만옹 조유환(晩翁 曺宥煥)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정자 안에는 <만옹정기(晩翁亭記)>를 비롯하여 10개의 현판이 걸려 있고 재실 벽면에 1점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전통부락 삼지천마을
담양에는 ‘삼지천마을’이라는 전통부락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삼지천(三支川) 마을은 1510년경에 형성되었는데 동쪽에는 월봉산, 남쪽에는 국수봉이 솟아 있고 마을 앞을 흐르는 내의 모습이 봉황이 날개를 뻗어 감싸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삼지천(三支川)이라 불렀으며 마을에는 ‘고재선가옥’을 중심으로 여러 채의 전통한옥이 잘 남아있어 전통마을로서의 가치를 더하고 있습니다.
이 마을 담장의 구조는 전반적으로 돌과 흙을 사용한 토석담으로 비교적 모나지 않은 화강석 계통의 둥근 돌을 사용하였고, 돌과 흙을 번갈아 쌓아 줄눈이 생긴 담장과 막쌓기 형식의 담장이 혼재되어 있으며, ‘S’자형으로 자연스럽게 굽어진 마을 안길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고가들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담양의 모현관(慕賢館)에는 미암 유희춘(眉岩 柳希春)의 친필일기인 <미암일기(眉岩日記)>가 보관되어 있는데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 1일부터 1577년(선조 10) 5월 13일까지 대략 11년간의 일기로서 중간에 몇 군데 빠진 데가 있으나 조선시대 개인의 일기 중 가장 양이 많은 것이며 동시에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도 매우 큽니다.
일기에는 일상생활에 일어난 모든 일을 상세히 적었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당시 상류층 학자들의 생활상황을 엿볼 수 있으며 미암이 중앙의 요직에 있었던 만큼 선조 초년에 조정에서 일어난 사건은 물론 경외(京外)의 각 관서의 기능과 관리들의 내면생활 및 사회, 경제, 문화, 풍속 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선조 25년 이전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소실되어 <미암일기>와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경연일기(經筵日記)>는 <선조실록(宣祖實錄)> 첫 10년의 사료가 되었으며 <미암일기>의 판본을 포함하여 일괄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이 중 3매를 전남대박물관에서 일시 보관했다가 현재는 후손들의 보존각인 모현관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대성사(大成祠)는 공자(孔子)와 주자(朱子), 그리고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를 배향한 사우(祠宇)로 1931년에 건립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사우 앞에는 이산재(尼山齋)라 명명된 강당이 있습니다.
대성사는 몽성산(夢聖山) 산기슭에 있는데, 몽성산 지형(地形)이 공자 출생지와 비슷하다 하여 지방유림회의에서 사우를 건립할 것을 결의하고 지방유림인 문병구(文炳九), 이재묵(李載?), 이필순(李弼淳), 이진기(李鎭基), 오학수(吳鶴洙) 등 5명이 주축이 되어 대성사(大成祠)를 건립하였습니다.
조선후기에 건립된 사우는 대부분이 본래의 교화 교육기능에서 벗어나 문중이나 지역의 세력을 과시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경향이 많았는데 대성사는 창평현의 관할구역으로 지리적으로 읍치구역과 멀기 때문에 향교 고유기능인 제사와 교육을 대신할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몽한각(夢漢閣)은 태종의 고손이며 양녕대군의 증손인 이서(李緖)의 재실(齋室)로 양녕대군의 후손들인 당시 담양부사 이동야(李東野)와 창평 현령 이훈휘(李薰徽) 등이 이 지방에서 관직을 보내면서 오랫동안 이서(李緖)의 재실(齋室)이 없음을 알고 1803년(순조 3)에 건축하였습니다.
이서는 1507년(중종 2) ‘이과(李顆)의 옥사(獄死)’로 인하여 전라도 창평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후 14년 동안 귀양살이 끝에 풀렸으나,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 담양군 대덕면에서 일생을 마쳤는데 유배시절에 지은 시에서 몽한각의 이름을 따왔습니다.
두현운산장(斗縣雲山壯) / 말처럼 매달린 구름 산 씩씩도 하여라
한창세월다(寒窓歲月多) / 차가운 창에는 세월만 무수히 흘렀나니
금명금야몽(今明今夜夢) / 오늘 아침 오늘 밤 꿈에서라도
비도한강파(飛渡漢江波) / 한강 물결 날아서 건너고 싶어
‘송진우고택(宋鎭禹 故宅)’은 고하(古下) 송진우가 성장했던 곳으로 안채와 사랑채 겸 문간채, 곡간채 등 3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안채는 조선 말기에 지어진 것으로 1970년대 대대적인 보수로 변형되었던 것을 2008년 옛 모습을 살려 초가지붕으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말 호남의병의 영수인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이 1차 의병을 일으켰다가 조정의 해산조치에 반항하여 체포된 후 감옥서 탈출하여 은거했던 곳으로, 여기에서 기삼연은 송진우를 교육하였고 후일의 의병활동을 구상하여 3차 의병의 중심역할을 했던 호남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객사리석당간’은 당간의 바로 옆 비석 1좌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1839년(헌종 5)에 중건한 것인데 “큰 바람에 꺾여 나무로 대신 세웠다(大風折以木代立)”는 내용으로 보아 큰 바람으로 넘어진 것을 이때 다시 복원한 것으로 보이며, 양지주(兩支柱)는 그 양식이 고려시대 것으로 추측되고 특히 인근 오층석탑이 고려시대에 조성되었음을 감안할 때 이 석당간의 건립연대를 견주어 추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첨단에는 삼지창(三枝槍)과도 같은 예리한 철침이 솟아있는데 이같은 부속물로 보아 이 당간은 장식적인 유구가 비교적 잘 남아있는 귀중한 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산리오층석탑’은 평지의 광활한 지역에 경영된 가람(伽藍)으로 짐작되며 절터의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이 오층석탑만 남아있으며 탑의 형태는 1층 기단에 오층석탑으로 일반형과 약간 다른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양식은 비인(庇仁)오층석탑, 만복사지오층석탑 또는 월남사지석탑 등에서 볼 수 있는 형상인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들 석탑 모두가 백제의 영역 내에서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백제계 양식의 조형인 정림사지오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을 모방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필히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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