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총리의 교체가 기정사실화된 가운데 여권 일각에선 '책임 총리론'이 떠오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만기친람형 국정운영에서 벗어나 총리에게 실권을 부여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다.
청와대의 공식 입장은 "아직 아무것도 확정된 게 없다"는 것이다. 청와대와 내각의 인적쇄신이 임박한 과정에서 여러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파격적 총리에게 권한 나누는 방향으로 갈 수 도"
청와대 한 핵심관계자는 5일 저녁 일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사견임을 전제로 "국무총리는 변화의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쪽으로 파격적으로 가는 게 좋다고 본다. 그러면서 정치를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는 촛불집회 등을 거치면서 그립(장악력)이 셀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대통령이 권력을 나누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며 '책임총리론'을 말하기도 했다.
그는 "대통령실장은 전체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변화의 이미지는 총리를 통해 하는 것이 맞다"고 덧붙였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초대 한승수 총리는 정관계의 화려한 이력을 바탕으로 큰 잡음을 내지 않은 채 무색무취하게 국정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정운찬 총리는 '세종시 총리'라는 별칭을 마다치 않은 채 야권은 물론 한나라당 친박계와도 자주 충돌을 빚었다.
하지만 정 총리와 가까운 한나라당 한 의원은 최근 "정 총리가 주변이 시끄럽긴 했지만 실제 일할 수 있는 권한이 별로 없었다"고 평가했다. 이 의원은 "정 총리가 스스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면이 있지만 총리실 인사도 처음부터 자기 뜻대로 못하지 않았냐"고 말했다.
한나라당 친이계 의원들 사이에선 "(차기 총리로) 사람을 잘 뽑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누가 됐던 실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다.
"김영삼 대통령한테 '해임 건의권'을 보장받았었다"
김영삼 정부 마지막 총리와 노무현 정부 첫 총리를 역임한 고건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장은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정치현안에 대해선 말을 아끼면서도 "총리직을 잘 수행하려면 대통령과 구두계약을 잘 맺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각책임제 성격이 가미된 현행 헌법상 총리의 법적 권한은 막대하다. 각료 임명제청관과 해임건의권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총리가 '실세'냐 '얼굴마담'이냐는 순전히 대통령의 의중에 달려 있다. 김영삼 정부 시절 법에 나온 자기 권한을 다 챙기려했던 이회창 전 총리는 경질되다시피 했고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과 호흡이 척척 맞았던 이해찬 전 총리는 '책임총리'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고 위원장은 IMF의 전조가 된 한보 부도 사태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인 현철 씨 구속 까지 겹쳐 최악의 위기를 맞은 시기에 총리직 제의를 받았었다. 그때를 회고하면서 고 위원장은 "총리를 잘 하려면 대통령과 계약이 중요한데 나는 그 때 '각료 해임 건의권만 보장해달라. 그래야 내각을 통할할 수 있다'고 말했다"면서 "김 전 대통령이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고 말했다. 법적 권한과 별개로 자신이 실제 권한이 어디까지인지 대통령의 의중을 확인하는 절차가 사전에 필요하다는 것.
고 위원장은 "총리 임명을 받은 다음 대통령이 (총리가 임명 제청해야 할) 내각 명단을 쭉 불러 주는데 장관 두 자리에 대해 '다른 사람이 더 낫지 않겠냐'고 내 의견을 말했고 대통령이 바로 그 자리에서 수용했다"고 덧붙였다. 해임건의권을 넘어 실질적 임명제청권을 행사했다는 이야기다.
이후 고 위원장은 IMF 경제위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신한국당 탈당, 이인제 당시 후보의 경선 불복과 신당 창당 등 최악의 정국 혼란기에 국정의 중심을 잡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통령의 뒷받침 없이는 성공하는 총리가 나올 수 없다는 상식이 이번 여권 인사에서 구현될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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