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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콜마저 떠났다…통독 주역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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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콜마저 떠났다…통독 주역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현대 세계사의 기적, 독일 통일 기여한 인물

결국 헬무트 콜마저 떠났다.

독일 '통일총리'의 16일(현지시간) 별세 소식은 현대 세계사의 기적이라는 평이 따르는 독일통일 주역들이 모두 역사무대로 퇴장했다는 의미가 있다.

콜은 1982∼1998년 역대 최장 16년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1989∼1990년 통일 정국 때 전광석화같은 판단과 추진력으로 통일을 가장 앞장서 이끈 인물이었다.

작년 4월에는 과거 콜과 더불어 세계의 통일외교 현장을 누빈 한스-디트리히 겐셔 전 외교장관의 작고 소식이 독일인들을 슬프게 했다.

겐셔는 1974∼1992년 헬무트 콜뿐 아니라, 그 이전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와 함께 호흡을 맞추어 연립정부 넘버투 외교장관으로 일하면서 통일 기반을 닦고 결국 통일을 일궜다. 무려 18년 외교장관을 지내면서 위협 방어를 위해 권총을 지니고 다녔다는 그는 격동의 독일현대사 고비마다 존재감을 보여줬다.

겐셔를 내무부에서 외교부 수장으로 옮기게 하고 그와 함께 냉전시대 빌리 브란트의 긴장완화 정책인 동방정책을 계승하여 수행하고 경제위기를 극복하며 통일의 또 다른 기반을 다진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는 2015년 11월 세상과 작별했다.

브란트와 동방정책을 기초하고 설계하고 집행한 에곤 바는 그해 8월 93세를 일기로 운명을 달리했다. 바는 1963년 '투칭 연설'로 알려진 그의 정책 구상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됐다.

독일-소련 간 전쟁이라 불러도 마땅한 2차 세계대전의 적국이자 승전국이던 구소련 및 동유럽에 가해국으로서 반성과 화해의 손길을 내밀며 다가가는 동시에 동독에 대해선 실체를 인정하고 '접근을 통해 변화'를 모색하는 정책이었다.

'작은 발걸음' 정책이라고도 불린 동방정책은 브란트 정권 외교철학의 근간을 이루고 나서 정권이 바뀌어도 큰 기조가 유지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역시 같은 2015년 1월 말에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 9일부터 329일을 내달린 1990년 10월 3일의 독일통일 현장을 지킨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이 타계했다.

1984∼1994년 대통령을 지낸 바이츠제커가 1985년 서독 의회에서 한 2차 세계대전 종전 40돌 기념연설은 독일인들에게 과거사 직시와 참회에 관한 통찰력 있는 안목을 제공했다.

그는 당시 연설에서 유럽의 2차 대전 종전 기념일인 5월 8일을 나치로부터 독일이 해방된 날로 규정하며 과거사 직시와 반성을 통한 화해를 강조했다.

한편, 2015년 11월에는 구동독 사회주의통일당(공산당) 선전담당 정치국원이던 귄터 샤보브스키가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공교롭게도 자신의 실수가 재촉한 베를린장벽 붕괴 26주년 기념일을 며칠 앞두고서였다.

샤보브스키는 1989년 11월 9일 저녁 당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서독으로의 여행자유화 시점을 잘못 알고 말하는 바람에 동독인들이 즉각 장벽 앞으로 몰려가게 만들었고, 이것이 장벽 통로 개방과 붕괴로 이어지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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