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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묵향(墨香)! <직지(直指)>를 세상에 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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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묵향(墨香)! <직지(直指)>를 세상에 펴다

2017년 5월 고을학교는 <청주고을>

5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43강은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자리잡았고 임진왜란의 명장이었던 동래부사 송상현과 항일독립열사 의암 손병희, 단재 신채호 등이 잠들어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直指)를 인쇄한 흥덕사지가 있는 청주(淸州)고을을 찾아 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청주를 상징하는 대표 문화유적인 상당산성Ⓒ청주시

고을학교 제43강은 2017년 5월 28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43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증평IC-의암 손병희유허지-정북동토성-송상현 묘역-흥덕사지-고인쇄박물관-청주동헌(청녕각)-점심식사 겸 뒤풀이-중앙공원(망선루/압각수/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조헌전장기적비)-용두사지철당간-청주향교-상당산성-단재 신채호사당—문의문화재단지(문산관/문의향교)-문의IC-서울의 순입니다.

▲<청주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43강 답사지인 <청주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시가지 중앙부에 무심천(無心川)이 흐르고

청주의 산줄기는 동쪽에는 백두대간 상의 속리산에서 갈라져 나온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백족산, 선두산, 선도산, 낙가산, 상당산으로 이어지면서 산악지대를 형성하고 서쪽에는 부모산, 팔봉산, 망일산, 국사봉, 봉무산, 작두산, 노고봉 등의 잔구성(殘丘性) 산지가 산재하고 있으며 물줄기는 국절봉(564m)에서 발원한 무심천(無心川)이 시가지 중앙부를 통과하며 북쪽으로 흘러 청원에서 미호천(美湖川)과 합류합니다.

청주 지역은 삼국시대에 백제가 먼저 이곳을 차지하여 상당현(上黨縣) 혹은 낭비성(娘臂城), 낭자곡(娘子谷)이라 한 후, 군사상 요충지로서 백제와 신라의 각축장이었던 곳입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인 685년(신문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고 아찬(阿飡) 원태(元泰)로 사신(仕臣)을 삼았고, 689년 서원경성(西原京城)을 쌓았으며 757년(경덕왕 16)에 서원경으로 승격되었습니다.

후삼국 때에는 태봉(泰封)과 후백제의 국경이었으며, 청주와 주변 지역의 많은 산성 터들이 대부분 이 무렵에 축성된 것으로 청주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대변해줍니다.

고려 940년(태조 23) 처음으로 지금 이름인 청주(淸州)가 되었고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牧)이 설치되면서 청주목으로 승격되었으며, 995년 12목이 폐지되고 10도(道), 12절도사(節度使) 체제로 개편될 때 전절군(全節軍)이라는 절도사가 파견되고 중원도(中原道)에 속하였습니다.

1011년(현종 2) 거란의 침입으로 왕이 나주로 피난했다가 개경으로 돌아갈 때 이곳에 들러 행궁(行宮)에서 연등회(燃燈會)를 열기도 하였는데 다음해 절도사를 혁파하고 대신 안무사(安撫使)를 파견했으며, 1018년 전국에 8목을 설치할 때 다시 청주목이 되었습니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복주(福州. 安東)로 피난했다가 다음해 이곳으로 옮겨 7개월간 머물렀는데, 이곳이 삼도(三道)의 요충으로서 곡식을 운반하기 쉽고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어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조선 1395년(태조 4) 한양 천도와 동시에 양광도 일부가 경기에 이속되고 나머지 지역이 충청도로 개칭되면서 충주목과 함께 그 계수관(界首官)이 되었으며 1449년(세종 31) 충청도관찰사로서 판목사(判牧事)를 겸하게 했다가 곧 폐지했고, 세조 때에는 진(鎭)을 설치했으며 2개 군, 10개 현을 관할하였습니다.

1591년(선조 24) 해미(海美)에 있던 병사(兵使)를 청주로 옮겨와 읍성 안에 머무르게 하고, 1594년 옥천에서 진(鎭)을 옮겨와 영장(營將)은 성 밖에, 우후(虞候)는 상당산성에, 찰방(察訪)은 율봉역(栗峰驛)에 각각 주재하게 했으며. 다음해 원균(元均)이 병사로 부임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장 구로다(黑田長政)에게 점령당했는데, 박춘무(朴春茂)가 맨 먼저 복대동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조헌(趙憲)과 영규(靈圭)의 의병이 청주성을 수복하였습니다. 1870년(고종 7) 청주목으로 복구되었고, 1895년에는 청주군(淸州郡)이 되었으며 1908년에는 충주에 있던 관찰부(觀察府)가 청주로 이관되어 관찰사가 부임하였고 1931년 청주읍으로 승격되었다가 1949년 청주시로 개칭되었습니다.

▲문의문화재단지에서Ⓒ청주시

상당산성의 유래

청주 지역의 산성(山城)으로는 상당산성(上黨山城), 당산토성(唐山土城), 정북동토성(井北洞土城), 우암산성(牛岩山城), 부모산성(父母山城) 등이 있습니다.

상당산성(上黨山城)은 고상당성(古上黨城)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후기에 새로이 고쳐 쌓은 현재의 상당산성보다 앞선 시기에 존재했던 석축산성을 고상당성이라 합니다. 상당(上黨)은 백제 때 청주의 지명인 상당현(上黨縣)에서 유래하였으며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청주의 별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685년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한 후 689년 서원경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김유신(金庾信) 열전>에 신라 문무왕 때 김유신의 아들 김원정(金元貞)이 서원술성(西原述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서원경성과 서원술성이 같은 성을 말하는 것인지, 혹은 고상당성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상당산성고금사적기(上黨山城古今事蹟記)>에는 상당산성에 궁예(弓裔)의 도읍터가 있었다고 하여 상당산성, 또는 그보다 앞서 쌓은 산성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벽은 상당산을 돌아가며 둘레 4.2km, 높이 4~5m로 쌓았으며 성 안에는 5개의 연못과 3개의 사찰, 관청건물, 창고와 공남문(남문)과 미호문(서문), 진동문(동문) 3개의 문과 2개의 암문, 치성(雉城) 3곳과 수구 3개소가 남아 있습니다.

지금의 상당산성은 임진왜란 중인 1596년(선조 29)에 수축된 이후, 1716년(숙종 42)에서 1719년(숙종 45)까지 충청도병마절도사 유성구(柳星樞)의 감독으로 대대적인 성벽 개축이 이루어졌고, 이듬해 성내에 구룡사(九龍寺)와 남악사(南岳寺)의 2개 사찰과 암문(暗門)이 세워졌는데 이것은 성문 무사석(武砂石)의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당산토성(唐山土城)은 백제의 상당현 치소(治所) 또는 통일신라의 서원경성(西原京城)으로 추정되는 성곽으로, 당산(唐山)이란 지명은 당산(唐山)이나 당산(堂山)으로 표기되며 이곳에 옛 서낭당과 같은 신앙처가 있었던 것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당산(唐山)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당이산(唐羡山)이라 하며 주치(州治)의 동쪽 1리 거리에 있는 청주의 진산(鎭山)이라 하였고 이곳에는 옛 토성 터가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성터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당산토성은 와우산(臥牛山)의 남쪽에 있는데 이곳에서는 청주가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와우산(臥牛山)과 연결된 동쪽 능선을 제외하면 3면이 가파른 경사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동서쪽과 동쪽으로는 비교적 완만하게 와우산토성과 연결되었는데 평탄한 대지가 조성된 곳에 낮은 토루(土壘)가 2중으로 단을 이룬 곳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독립된 작은 산성의 역할을 하였으나 와우산토성의 내, 외성과 연결되면서 나성(羅城)의 일부로 기능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곳에 모충사와 일본신사가 들어서면서 크게 파괴되었고 최근에는 정상에 체육시설이 들어서면서 점차 토성의 흔적이 훼손되고 있습니다.

▲평지형 토성인 정북동토성지Ⓒ청주시

평지형 토성인 정북동토성지

정북동토성지(井北洞土城址)는 미호천 변 평야의 중심에 자리한 평지형 토성으로 정확한 축조연대를 알 수 없으나, 1744년(영조 20)에 상당산성의 승장으로 있던 영휴(靈休)가 쓴 <상당산성고금사적기(上黨山城古今事蹟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신라 말에 궁예(弓裔)가 양길(梁吉)의 부하로 있다가 군사를 나누어 동쪽을 공략할 때에 지금의 상당산성을 쌓고 근거지로 삼았다. 후에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궁예의 상당산성을 빼앗고 작강, 즉 까치내 옆에 토성을 쌓고 창고를 지어 부세(賦稅)를 거두어 쌓아 두었다가 상당산성 안으로 운반해 들였다. 이러한 이유로 후세 사람들이 시로 읊기를 들판의 토성은 백제 때를 지나오고, 암자의 금부처는 삼한(三韓) 때를 거쳤다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정북동토성이 후삼국의 항쟁기인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하였으나, 평지에 축조된 방형 토성이라는 점과 돌화살촉, 돌창, 돌칼 등의 출토유물로 보아 삼국시대의 전, 중기에 축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4면의 성벽 중간쯤에는 문터로 보이는 절단부가 있고 이들 가운데 동, 서, 북쪽의 것은 지금도 통로로 사용되며 특히 남문 터와 북문 터는 좌우의 성벽이 엇갈리게 축조된 독특한 형태로서 옹성(甕城)의 초기 형식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성 밖은 해자(垓字)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암산성(牛岩山城)은 청주읍성(淸州邑城)의 동북쪽으로 이어지는 산기슭을 따라 토루(土壘)로 축조되어 있으며, 배후에는 상당산성(上黨山城)이 위치하고 있으며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나성(羅城)구조로 내성은 안쪽으로 3~4개의 토루로 구분되어 있고, 그 아래쪽의 외성은 평지까지 이어져 있으며 외성의 동쪽 성벽은 당산토성까지 연결된 흔적이 있습니다.

부모산성(父母山城)은 해발 231m의 야산의 지형을 이용해 성벽을 구축하였으며, 성벽의 둘레는 1,135m, 성벽의 너비는 7m안팎으로 성의 윗부분은 일부 무너졌으나, 기저부가 온전히 남아 있어 성벽의 원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산성 내에서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 후기에 이르기까지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1999년 정밀 지표조사 결과 중부 이남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계단식 보축(補築) 성벽이 조사되었으며 2004년 1차 발굴조사 결과, 내외 겹축의 체성벽(體城壁), 북문지(北門址), 수구지(水口址), 배수시설 등이 확인되었고, 기와류, 토기류, 확쇠 등 부모산성의 역사적 시기 검토 및 당시 사회상을 복원할 수 있는 자료들이 발굴되었습니다.

▲청주읍성 망선루. 청주읍성은 축조연대를 문헌으로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성이다.Ⓒ청주시

유서 깊은 청주읍성(淸州邑城)

청주읍성(淸州邑城)은 청주목(淸州牧)의 읍성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 685년(신문왕 5) 3월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하고, 689년에 서원경성(西原京城)을 쌓았던 기록이 있어 청주읍성의 전신은 아마도 통일신라가 구주오경제(九州五京制)를 갖추던 신문왕대 특히 685년부터 689년까지에 걸쳐 축조되었다고 여겨지며 우리나라 읍성으로서 축조연대를 문헌으로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성입니다.

통일신라에서 중요한 지방 도시에 해당되는 9주와 5소경의 도시 구조는 문무왕과 신문왕대에 이르러 주성(州城)과 소경성(小京城)의 축조가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이러한 축성은 도시의 방어목적과 보민용(保民用)으로 사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청주읍성에 관한 것은 고려 태조 대에 나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상당산성에서 ‘사량부속장지일(沙梁部屬長池馹)’의 명문와(名文瓦)가 출토되기도 하였으므로 7세기 후반의 서원경성이 어떤 것인지 알기 어려우나, 읍성 자체가 서원경성일 가능성은 있습니다.

읍성 내에 있는 고려 초의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鐵幢竿)은 고려 초부터 이곳이 읍치의 중심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읍성이 있던 지역의 도로망이 남문에서 북문까지 대로를 중심하여 방격(方格)으로 짜여 있는 것은 고대의 경성방리제(京城坊里制)를 연상케 합니다.

동문은 개인문(開寅門, 闢寅門), 서문은 청추문(淸秋門), 남문은 청남문(淸南門), 북문은 현무문(玄武門)이라 불렀으며 1910년 한일합방으로 국권이 침탈되자 관찰부 대신 도청이 설치되었고, 1911년에서 1915년까지 시행된 시구 개정사업으로 사방의 성벽을 헐어 도로를 내고 성채의 돌을 이용하여 하수구를 만들었습니다.

충청도병마절도사영(忠淸道兵馬節度使營)은 원래 충남 해미현(海美縣)에 있었다가 1651년(효종 2)에 이곳으로 옮겼는데 병마절도사는 관찰사가 겸직하거나, 따로 종이품(從二品) 절도사를 두기도 하는데 이곳에는 전임(專任)의 절도사가 있었고 충청도의 육군을 총괄하였습니다.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忠淸道兵馬節度使營門)은 충청도병마절도사 본영의 정문으로 병영의 출입문은 보통 원문(轅門)이라고 부르며 좌우로 담장이 이어져 병영을 에워싸고 있는데 건물양식은 조선 후기 병영(兵營)이나 수영(水營)의 출입문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방형초석에 세운 2층의 누문(樓門)입니다.

삼석당(三錫堂)은 충청병마절도영(忠淸兵馬節度營)에 세워졌던 건물로 병영의 군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병영 소속의 군관들이, ‘백성들에게 세 가지를 베풀어주라’는 뜻으로 건물의 명칭을 삼석당(三錫堂)이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읍청당(挹淸堂)은 충청병마절도영(忠淸兵馬節度營)의 중영(中營)에 세워졌던 건물로 병영의 군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병영 소속의 군관들이 청렴결백하게 업무를 집행해야 한다는 뜻을 담아 건물의 명칭을 읍청당(挹淸堂)이라 한 것으로 보입니다.

망선루(望仙樓)는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는 청주목 관아의 누각으로 옛 이름은 취경루(聚景樓)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1361년(공민왕 10)에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을 피하여, 안동으로 몽진(蒙塵)하였다가 이곳에 옮겨와 수개월 동안 머물렀었다고 합니다.

망선루는 청주가 임시수도가 된 상황에서 치러졌던 문과(文科)와 감시(監試)의 합격자 방을 게재했던 유서 깊은 곳으로 전해지며, 고려시대 읍성의 존재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문화유산입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데 오랫동안 헐어 있었던 것을 1461년(세조 7)에 목사 이백상(李伯常)이 새로이 중수하고 한명회(韓明澮)가 누각의 편액을 고쳐서 망선루라 하였다고 합니다.

청녕각(淸寧閣)은 청주동헌(淸州東軒)의 중심 건물로 서원현감(西原縣監) 이병정(李秉鼎)이 창건하였고 현재 상당구청 내에 있습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근민헌 목사정당 십칸((勤民軒 牧使政堂 十間)’이라 하여 이 건물의 명칭이 근민헌((勤民軒)이고 규모는 10칸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1868년(고종 5) 목사 이덕수(李德洙)가 중수하면서 지금과 같이 23칸 규모로 확장하였고 편액은 충청병마절도사영문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옮겨 달았습니다.

▲문의현 객사였던 문산관Ⓒ청주시

삼남 제일의 향교로 이름 날려

청주향교(淸州鄕校)는 고려 때인 987년(고종 6)에 양성산 아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1609년(광해군 1) 현의 남쪽 기산리로 옮겼다가 1683년(숙종 9)에 현감 이언기(李彦紀)가 우암산(牛岩山) 남서쪽 자락인 현 위치로 이전하여 중건하였습니다.

건물 배치는 강학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이 외삼문과 서향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고, 내삼문을 기준으로 배향공간인 대성전(大成殿)이 후면에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5성(五聖), 송조6현(宋朝六賢) 및 동국18현(東國十八賢)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특이사항은 1444년(세종 26)에는 세종(世宗)이 초정(椒井)에 행차했을 때 청주향교에 <통감절요(通鑑節要)>, <소학(小學)> 등 서적을 하사한 것과, 1464년(세조 10) 세조(世祖)가 요양 차 초정에 머물면서 문묘제향을 주관하여 삼남 제일의 향교로 이름을 날렸으며 1663년 송시열이 기문을 쓴 <청주향교지(淸州鄕校誌)>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항서원(莘巷書院)은 1570년(선조 3)에 호서지방에서 보은(報恩)의 상현서원(象賢書院)에 이어 두 번째로 건립된 서원으로 창건 당시의 이름은 서원이 위치한 마을이름을 따라 유정서원(有定書院)이라 하였다가 1660년 사액을 받으면서 신항서원으로 바뀌었는데 ‘신항(莘巷)’이란 이름은 중국 송나라 주희(朱熹)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규약에서 따온 것입니다.

남계(南溪) 경연(慶延), 강수(江叟) 박훈(朴薰), 충암(冲菴) 김정(金淨),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등 4인을 제향하기 위하여 창건되었고,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32년(인조 10) 복원하면서 송재(松齋) 한충(韓忠)을, 1650년(효종 1)에는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을, 1656년에는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추향하였습니다. 1660년(현종 1) 사액되면서 신항서원(莘巷書院)으로 개칭되었고 1665년 서원 건립을 주도했던 이득윤(李得胤)을 추향하는 한편 제향인물의 위치를 조정하여 이이를 주향으로 정하고 나머지 7인을 함께 배향하였습니다.

구계서원(龜溪書院)은 1613년(광해군 5)에 1613년 청안현감 조인행(趙仁行)과 신경행(辛景行) 등이 약재(樂齋) 서사원(徐思遠)과 수암(守庵) 박지화(朴枝華),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을 제향하기 위하여 건립하였고, 1666년(현종 7)에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과 이당(李塘)을 추향하였으며 이때 송시열에게 위차 조정을 의뢰하여 이준경(李浚慶)을 주향으로 하고, 나머지 네 사람을 배향으로 정하였습니다.

문산관(文山館)은 조선시대 문의현(文義縣)의 객사(客舍)로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고 <문의읍지(文義邑誌)>에 1666년(현종 7)에 현령 이명하(李鳴夏)가 옮겨 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지붕의 암막새 기와에 ‘옹정 76년 무신 4월(雍正 七六年 戊申四月)’이라 새겨진 글씨로 보아 1728년(영조 4)에 한차례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79년에는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문산관이 수몰지역에 있게 되어 문의향교 옆으로 옮겼다가 다시 1997년에 문의문화재단지의 현 위치로 옮겨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습니다.

문의향교(文義鄕校)는 원래 양성산(養性山) 아래에 있던 것을 1609년(광해군 1)에 문의현(文義縣)을 다시 세울 때 향교를 현에서 남쪽으로 3리 떨어진 기산리(箕山里)로 옮겼고 1683년(숙종 9)에 현령 이언유(李彦維)가 땅이 평탄하지 않다고 다시 서쪽으로 2리 떨어진 양성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겼습니다.

▲송상현 충렬사Ⓒ청주시

못 잊을 그 이름 조헌·영규대사·송상현·단재·손병희

조헌전장기적비(趙憲戰場記蹟碑)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청주성을 탈환한 의병장 조헌을 기리기 위하여 1710년(숙종 36) 서문동에 세웠던 비로 일제 강점기 때 현 위치로 이전하였습니다.

조헌(趙憲)은 본관은 백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號)는 중봉(重峯), 시호(諡號)는 문렬(文烈)이며 1567년(명종 22)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국정을 바로잡는데 헌신하였고 학문 연구에 힘써 학자로도 널리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靈圭大師)와 합세하여 1592년 8월 임진란 최초의 승전인 청주성을 탈환하였으며 그 후 영규대사와 700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적과 싸워 막대한 타격을 주었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원 전사하였습니다.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임진사충신(壬辰四忠臣)의 하나로 거명되는데, 매년 청주성 탈환일에 조헌, 영규대사, 박춘무 장군과 의병들을 추모하는 추모제가 중앙공원 기적비(記蹟碑) 앞에서 거행되고 있습니다.

영규대사전장기적비(靈圭大師戰場紀蹟碑)는 임진왜란 때 육상 전투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둔 청주성 전투(淸州城戰鬪)에서 승군(僧軍)을 이끌었던 영규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4년에 세운 전적비(戰蹟碑)입니다. 비문에는 영규대사가 임진왜란 때 800여 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조헌의 의병과 더불어 1592년 8월 청주성 탈환작전을 벌여 이튿날 성공하였고 그 뒤 금산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현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송상현(宋象賢)의 묘소는 원래 동래(東萊)에 있던 것을 1610년(광해군 2)에 고향인 현 위치로 이장한 것입니다. 강촌 뒷산인 묵방산 중턱에 자리 잡고 상석(床石), 양(羊), 문인석(文人石),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묘비(墓碑)가 갖추어져 있으며 신도비(神道碑)는 묘소 입구에 있는데 1659년(효종 10)에 세웠으며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썼습니다.

충렬사(忠烈祠)는 송상현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祠堂)으로, 1595년(선조 28)에 묘소를 동래에서 이곳으로 이장하고 1610년(광해군 2)에 사당을 창건하였으며 여러 차례 중수하였습니다.

송상현의 호는 천곡(泉谷), 시호(諡號)는 충렬(忠烈)로, 1576년(선조 9) 문과급제 후 1591년(선조 24)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동래성에 육박하자 군사를 이끌고 항전하다 왜병에게 살해되었습니다.

단재영당(丹齋影堂)에는 1981년에 한광일(韓光一)이 그린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묘소는 단재가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복역하던 중 1936년 2월 21일에 여순(旅順)감옥에서 순절함에 따라 그가 어린 시절에 살던 옛 집터에 안장한 것으로 묘역(墓域)에는 한용운(韓龍雲), 오세창(吳世昌), 신백우(申伯雨) 등이 세운 묘표(墓表)와 1972년에 세운 사적비(事蹟碑)가 있습니다.

손병희 유허지(遺墟地)는 1861년(철종 12) 4월 8일에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선생이 출생하여 자란 집으로, 손병희 선생은 일찍이 동학(東學)에 입문(入門)하여 1894년 동학혁명(東學革命) 때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10만의 민중(民衆)을 이끌고 관군과 싸웠습니다.

그후 일본을 거쳐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1897년에는 동학의 3세(三世) 교주(敎主)가 됩니다. 1904년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였고 1907년에 귀국하여 천도교라 개칭하고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경술국치 이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敎)와 보성중학교를 천도교 명의로 인수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1919년에 3.1만세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천도교의 수장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직지(直指)>의 산실 흥덕사지(興德寺址)

흥덕사지(興德寺址)는 1985년에 시행하던 '운천지구택지개발사업' 때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공사를 중단하고 청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발굴된 옛 절터입니다. 발굴조사 결과 출토된 청동금구(靑銅禁口)와 청동불발(靑銅佛鉢)에 ‘흥덕사(興德寺)’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 이곳이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金屬活字本)인 <직지(直指)>를 인쇄한 흥덕사임을 입증하게 되었습니다.

<직지> 하권(下卷)의 간기(刊記)에 1377년(고려 우왕 3)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하였음이 기록되어 있으나 사찰의 창건 연대와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습니다. 발굴 결과 남북 일직선상에 중문(中門)과 탑, 금당, 강당이 배치되어 있고 주위에 회랑이 돌아간 단탑가람식(單塔伽藍式)으로 밝혀졌으며 ‘대중3년(大中三年)’이라 글씨가 있는 기와가 출토되어 849년(신라 문성왕 11)에 이미 이곳에 불사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직지>는 고려 승려 경한(景閑)이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선문염송(禪門拈頌)> 등의 사전(史傳) 관계 문헌을 섭렵하여 부처를 비롯한 조사와 고승들의 게(偈), 송(頌), 찬(讚), 명(銘), 서(書), 시(詩), 법어(法語), 설법(說法) 등에서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 데 긴요한 내용을 뽑아 엮은 책으로 상하 2권으로 되어 있으며 정식 서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고, 간략하게 <직지심체요절> 또는 <직지>라고 합니다.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鐵幢竿)은 두 개의 화강암 지주와 20개의 철통(鐵桶)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당간의 밑에서 3번째 단에 당기(幢記)가 양각되어 있어 962년(고려 광종 13)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준풍(峻豊)’이라는 고려 독자의 연호를 널리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의 주체성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용두사(龍頭寺)의 규모 및 창건과 폐사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현재 조성 연대가 명확한 당간은 청주의 용두사지 철당간, 공주 갑사의 철당간, 나주 동문 밖 석당간, 담양 읍내리 석당간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필히 긴바지),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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