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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알 하나 찾아먹겠다고 갈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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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콩알 하나 찾아먹겠다고 갈라졌나?"

[인터뷰] 권영길, 민주노동당 10년을 말하다

'뉴밀레니엄'의 벽두인 2000년 1월 30일, 서울 잠실 역도경기장에서 민주노동당이 창당됐다. 민주노동당의 전사(前史)는 1997년 대선용 '가설정당'이었던 '국민승리 21'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총련과 전국연합 일부가 '비판적 지지'를 선언하며 막판에 김대중 지지로 돌아섰으나, 진보의 양축인 PD(진보정치연합)와 NL(전국연합)이 '국민승리 21'로 뭉쳤다. 물론 국민승리 21을 추동한 동력은 민주노총에서 나왔다. 1995년 11월 11일 서울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법외단체로 첫 깃발을 올린 민주노총은 1996년 말부터 1997년 초까지 노동법날치기 저지 총파업을 이끌며 정통성을 확보했다.

우리 노동운동과 노동자 진보정당 운동의 이러한 약사를 되돌아보면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서울신문 노조위원장, 언노련 위원장,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대표를 거쳐 해방 이후 첫 정치 총파업을 주도한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 국민승리 21 대선 후보, 민주노동당 초대 대표, 두 차례의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권영길이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내 영혼"이라는 그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 민주노동당 초대 대표, 민주노동당의 두번 대선에서 모두 후보였던 권영길ⓒ프레시안 (최형락)

2000년 이후 민주노동당과 권영길은 부침을 같이 했다. 의석 하나 없었던 민주노동당은 2002년 대선에 뛰어들었다. 노무현과 이회창의 쟁투 와중에 득표는 95만7148표(3.9%)에 그쳤다. 하지만 1997년 국민승리21 시절 39만 표에 비하면 대단한 약진이었다. 그뿐인가? 당시 권영길의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말은 아직도 국민들의 가슴에 남아 있다.

2004년 총선 때 민노당 돌풍의 주역도 그였다. 10명의 의원 가운데 지역구 의원은 그와 조승수 뿐이었다. 참여정부 시절 지역사무실이 압수수색 당했을 때 분기탱천한 권영길이 국회 본관 앞에 자리를 깔고 앉자 여당 386 의원들은 '문안인사'를 올렸고 총리 이해찬은 직접 찾아와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의 황금시절이었다.

그러나 2007년 대선 때 "브라질의 룰라도, 김대중도 네 번 출마했다"면서 대권 3수에 나서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노욕"이라느니, "자주파를 등에 업었다"느니 날선 비판이 쏟아졌고 국민들도 "좀 지겹다"는 반응이었다. 의석하나 없을 때도 95만표를 받았건만, 기호 3번을 달고 나간 권영길은 71만2121표(3.0%)로 사실상 정치 초짜였던 문국현에게도 뒤졌다.

민노당의 대선 참패는 심각한 후폭풍으로 이어졌다. 종북주의 논쟁과 패권주의 논쟁이 부풀어 올라 민노당은 창당 8년만에 결국 분당의 길을 걸었다. PD들은 진보신당으로 빠져나가거나 무당적파로 돌아섰다. 그들과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대의를 같이 해 온 권영길은 민노당에 남았다. 그리고 그는 오랜 침묵의 동굴 속에 자신을 가두었다.


"정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 권영길은 "민주노동당은 나의 영혼이다"고 말했다ⓒ프레시안 (최형락)
자신의 '영혼', 민주노동당의 열번째 생일을 맞은 권 의원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창당 이전 그야말로 '생고생'을 하던 시절을 회고할 땐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지만 세번째 대선 도전 등 자신과 당을 분기점으로 치닫게 한 계기 등에 관한 질문에는 적이 불편해 보였다.


권 의원은 민노당의 쇄신과 성찰 부족을 지적했다. 민주노총을 향해선 "영국 노동조합회의는 노동당을 지도했고, 프랑스 민주노동연합은 사회당을 지도했다. 민주노총당이어서가 문제가 아니라 그게 못 돼서 문제였다"고 일갈했다.

향후 민노당의 갈 길은? 그는 최근 민노당이 '반MB연대'에 가장 앞장서는 듯한 모습에 대해 "진보 통합이 먼저"라고 했다. "신자유주의와 양극화에 대한 민주당의 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권 의원은 "정당이면서도 정당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있다. 정당이 뭐냐? 권력을 잡아야 한다. 가장 핵심이고 기본적인 이 생각을 안 한다. '우리 투쟁 열심히 했다'고만 한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는 "우리는 정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면서 "'민중'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지만 국민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을 왜 주저하나? 내가 민주노총위원장 시절에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노총'이라고 했다가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이게 비판받아야 하는 일인가?'라고 되물었다"고도 말했다.


그도 올해 나이 70이다. '말술'로 통하던 시절은 옛일. 이제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 지난 대선 뒤에는 허리가 안 좋아져 수술도 받았다. 권영길의 시대와 함께 민주노동당의 호시절도 이제 지는 것일까?

"1997년 대선 이후 창당까지 3년 동안 자갈밭에 들어가 손갈퀴로 돌을 걷어내고 농사지을 땅을 만들었다. 황폐해진 논밭,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을 다시 옥토로 가꾸는 것이 앞으로 내가 할 일이다."

노동운동, 진보정당 운동의 큰 버팀목은 아직 할 말도, 할 일도, 그리고 해야 할 일도 많아 보인다.

"보약만 먹다 독약을 제거 못했다"

프레시안: 30일로 창당 10주년이다.

권영길: 그 날의 감동을 되새기며 오늘의 좌절을 뛰어 넘어 내일의 희망을 만들어가는 느낌이다. 민주노동당 창당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격이었다. 개혁적이라 불리는 많은 정치인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새로운 세상을 위해 자기 몸을 던졌던 많은 사람들조차도 진보 정당은 이 땅에서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권영길이 이야기하는 식으로 진보정당이 되면 기적이다.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지라'던 사람들도 있었다. 매달 당비 내는 당원이 1만 명이 될 때 창당 선언을 하겠다고 주장했지만 다들 불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8000명 당원으로 창당 준비위를 발족시켰고, 2000년 1월 30일 창당 깃발을 올렸다.

프레시안: 1987년 이후만 하더라도 백기완 선생 대통령후보 임시 추대위원회, 한겨레민주당, 민중당 등 진보정치세력의 움직임들이 적지 않았지만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결성된 국민승리21만 진보정당으로 발전했다. 차별점이 뭐였을까?

권영길: 실제로 정당을 만드는 형태가 달랐기 때문이다. 민중당의 경우, 물론 노동자 중심의 정당을 표방했었지만 사실 명망가 중심의 정당이었다. 진보 정당은 노동자, 농민들, 민중이 중심이 돼야 하는 것이고 그들이 정당의 주체가 돼야 하는 것이었다. 자유당 때 진보당도 사실 엘리트 중심으로 위에서 밑으로 내려간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다르다. 실제 창당의 주역들이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현장 활동가들이었다. 97년 대선 때 결성 됐던 국민승리21은 단순히 선거용 정당이라고만은 말하기 어려운, 아주 특이한 정치조직이었다.

국민승리21은 처음에 97년 대선을 생각하는 면도 있었지만, 실제 진보 정당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민주노총과 전국연합 중심으로 나왔었다. 그래서 '97년 대선에 후보를 내면 사람들이 모일 것 같다. (창당은) 1년 정도 논의 후에 한다'고 합의했었다. 국민승리21은 일제 시대 신간회 이후 최초라고 말할만큼 모든 진보정치세력이 모인 조직이었다. 당시 선거 사무소가 마포 가든호텔 뒤쪽에 있었는데 활동가만 250명이 넘게 북적거렸다. 그런데 대선 다음 날 다 흩어졌다. 여당에 가서 국회의원이 된 사람도 여럿이 있다. 어쨌든 대선 다음에 짐을 정리해서 삼선교 작은 사무실로 옮긴 사람들이 15명에 불과했다. 비오는 날이었다.

모택동이 연안으로 간 대장정, 사실 후퇴고 쫓겨간 것이었지만 거기 이르러 역사가 바뀌지 않았나? 우리도 마포의 짐을 삼선교에 풀면서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대장정의 시작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3년간 풍찬노축의 준비기간을 거쳐 민주노동당이 창당됐다. 하루 만에 뚝닥 정당 만드는 나라에서 3년 준비를 해서 창당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남다르지 않나?

1997년 대선 직후 사람들이 다 흩어질 때 '아 이 땅에선 진보정당은 안 되는구나'고들 했지만 창당으로 인해 '이 땅에도 진보정당이 된다'는 인식을 줬다.

▲ 권영길은 민주노동당 창당 과정을 모택동의 대장정에 비유했다ⓒ프레시안 (최형락)

프레시안: 그 3년 동안에 민주노총, 전농 등을 어떻게 설득해서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견인해갔나?

권영길: 1997년만 하더라도 '내가 집권하겠다'고 해서 권영길이 출마한 것은 아니다. 그 때 우리가 뭘 외쳤나? 대선 이후 노동자 농민 중심의 정당을 만들자는 것 아니었나. '권영길이 39만표 밖에 못받았으니 포기해야 한다'는 말들이 있었지만 "그럼 몇 표를 받아야 시작할 것이냐? 100만표 정도 받으면 시작할 수 있나? 그건 아니다. 표수와는 관계없는 것이다. 실제로 이제부터 (진보정당 창당 운동이)되는 것이다"고 답했었다.

프레시안: 민주노동당의 역사를 거칠게 보면 창당에서 2004년을 거쳐 2006년 초 정도까지 승승장구했고 2006년 지방선거 즈음부터 꺾인 느낌이다. 결국 분당까지 이어졌고. 왜 이렇게 됐을까?

권영길: 정당이나 사회단체나 노동조합이나, 쇄신이 없으면 조직은 정체된다. 관료화다. 그런 현상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막고 항상 살아있는 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당원이 주체는 쇄신 작업이 끊임었어야 되는데 게을렀었다. 2004년 총선 당시 10명 국회의원 탄생은 민주노동당의 대성과일 뿐 아니라 진보정치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꿈을 안겨줬었다. 그런데 그것이 보약이 되면서도, 동시에 독약이기도 했다. 독약이 된 부분은 빨리 깨닫고 풀었어야 하는데 보약만 너무 먹어서 오히려 독약을 제거하지 못한 면이 있었다.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은 뛰어난 스타급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당의 정강 정책을 구현하는 데는 실패한 부분도 있다. 민주노동당이 구호만 있고 알맹이는 없는 정당이라고 국민들에게 (그런 인식이) 다가간 면이 있었다.

"첫째는 진보진영의 통합"

프레시안: 정파 문제가 갈등의 중심축 아닌가?

권영길: 정파 간의 대립도 있고, 그 정파가 갈라 선 것은 외형적으로는 맞지만, '정파 대립 때문에 분당됐다'고 얘기하는 것은 너무 과도하다.

프레시안: 2004년 총선 당시 당 공약개발단장을 맡았던 인하대 정영태 교수가 엊그제 토론회에서 "독식구조가 문제였다"더라. '종북주의보다 패권주의가 문제였다'와 비슷한 말일수도 있겠다. '팽팽한 양 정파가 있는데, 일인 다수 투표제도가 있는데다가 한 정파(자주파)는 계속 자체적으로 활동가들을 뽑아올리니 나머지 한 쪽(평등파)는 천년만년 가도 아무것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식의 견해였다.

권영길: 정파의 어떤 노선 때문에 분당된 것은 아니다. 서로 NL인지 PD인지 모르고 당 만들었나?. 사람은 살아가면서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목숨 버리도록 사랑하겠다면서 결혼한 남녀 간에도 틈새가 벌어져 헤어진다. 당에서 실제로 숫자 놀음도 있었고, 지역위원회에서 위원장을 선출하는 문제, 당직자 선출 문제 등이 있을 때마다 조금씩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나중에 분당되는 시점에서는 쌓여 있던 것이 폭발한 측면이 있다. '정파 대립으로 인한 분당'이라고 하는 것은 분당을 포장하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민주노총당'이어서 당이 몰락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의문스럽다.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 앞에선 무기력하기도 했지만, 과연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은 통제하거나 견인했었나? 지도력을 발휘했나? 해외 진보정당사를 보면 항상 노총(내셔널 센터)이 진보정당을강력하게 지도하면서 발전해나갔다. 그렇지 못해서 문제 아니었나?

권영길: 나도 그렇게 보지 않는다. 실제로 민주노총이 더 제대로 역할을 했다면 민주노동당이 이렇게 됐겠나. 나중엔 영국 노동당의 부정적 요소로 지적이 됐고 블레어가 신노동당 노선을 주창하면서 깨뜨렸지만, 노동당 초기에는 영국노동조합회의(TUC)가 당 대의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노동자가 노동당을 조직하고 주체가 되면서 책임도 진다는 것이다. 독일? 독일노총(DGW)이 독일 사민당의 중심이다. 프랑스 사회당은 CFDT(민주노동연합)가 프랑스 공산당은 CGT(노동총연맹)에서 완전히 중심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당으로 치부된 것은, 당과 총연맹 양 쪽에 책임이 있다.

프레시안: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들 '원칙적으로는 통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원칙적'이라는 단서의 의미가 복잡하지 않나? 상층부에서 통합을 이야기해도 과연 기층의 평당원들이 다 받아들일지도 의문스럽다. 통합의 전제는 무엇인가?

▲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합쳐야 한다"는 권영길ⓒ프레시안 (최형락)
권영길:
나는 당원들도 받아들일 것이라고 본다. 물론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종북주의'를 거론하며 당을 쪼갠 사람과 다시 하겠느냐"는 사람도 민주노동당에 있고 진보신당 당원들 중에서도 "저들하고 다시는 같이 못한다"고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내가 만난 (진보진영) 사람들 다수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통합해야 한다고 하더라. 그것은 진보정치의 활성화 뿐 아니라, 그것이 우리 민중들, 농민들, 국민들에게 끼친 죄 값에 대한 보상이다.

분당으로 인해 우리는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 그래서 '우리 헤어진 것 잘못했다. 다시 합쳐서 잘하겠다고' 해야 한다. 그게 통합이다.

임성규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가장 앞에서 부르짖던 것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이었다. 그가 위원장직을 내놓는 그 순간까지도 그랬다. 일부에서는 '현장 노동자이 먼저 뭉치면 정치조직도 통합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 두 정당이 통합되지 않으면 현장도 찢어질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이 제대로 역할 하기 위한 선결과제가 진보정당의 통합을 통한 부활이라는 임 전 위원장의 말이 맞다.

프레시안: 분당 이후 민주노동당 이야기를 해보자. '반MB연대'가 민주노동당의 지방선거 전략이라고 한다. '비판적 지지'에 맞선 '진보정치의 독자적 세력화'가 민주노동당의 역사적 뿌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한다.

권영길: 국민들은 실제 진정성, 사람의 행동 됨됨이를 보고 감동을 받는다. 정당도 됨됨이를 보고 판단한다. 지금 국민들이 뭘 요구하고 꾸짖고 있나. 간단하다. '진보정당이 어려워 먹을 게 콩알 하나밖에 없는데, 그 콩알 찾아 먹겠다고 갈라졌나, 싹수가 노랗다' 이렇게 말한다. 지방선거의 '반MB 연대' 좋다. 하지만 순서라는 것이 있다. 그 첫째는 진보 진영의 통합이다. 거기에 무게와 중심을 실어야 한다. 그 통합에 이어 반MB연대를 해야 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이명박 정부가 워낙 문제가 많아서 반MB연대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많다. 그런데 1997년에도, 2002년 대선에서도 '이회창을 막아야 한다' '김대중·노무현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이야기 많이 듣지 않았었나?

권영길: 많은 사람들이 1997년에는 '김대중과 이회창이 같다는 말이냐', 2002년에는 '노무현과 이회창이 같다는 말이냐'면서 나를 공격하고 비난했다. 나는 "같지 않다. 다르다. 하지만 김대중·노무현과 이회창 차이가 한강 샛강이면 나와 차이는 한강 본류다"고 답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남북 분단 상황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없는 성과를 남겼다. 하지만 과오도 범했다. IMF 신자유주의 체제를 그대로 받아들여 앞으로 풀어가기 어려운 사회양극화를 만들었다. 이후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를 굳혔다.

민주당이 개혁을 외치는데, 이 부분을 인정하지 않고선 (반MB연대가) 안 된다. 그런데 말을 안 하고 있다. 그래서 혼란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민주당 뿐 아니라 한국정치의 비극이다.

프레시안: 요즘 개그콘서트 보나? 강기갑 대표를 패러디한 개그맨이 막상 하는 말은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다. 권영길의 컨텐츠다. 10년을 가고 있는 것인데, 아까 말한대로 하면 2002년 대선 당시의 '됨됨이와 진정성'이 아직 인정받고 있는 것인가?

권영길: 우리는 정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정치라는 것은 뭐냐. '민중'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지만 국민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도 왜 주저하나? 내가 민주노총위원장 시절에도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노총'이라고 했다가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그 때도 "이게 비판받아야 하는 일인가?"라고 되물었다. 사회과학적 개념으로만 해석하면 안 된다. 민주노동당 선거를 통해 집권하고자 하는 정당이다. 이것을 잠시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을 시켜야 한다. 요즘에는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고 하면 국민들이 "너희 앞가림이나 잘해라"고 말한다. 이 부분을 풀어야 한다.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프레시안: 왜 그게 안 될까? 민주노동당의 무엇이 잘못됐을까?

권영길: 가장 잘못된 부분은 정당이면서도 정당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당이 뭐냐? 권력을 잡아야 한다. 가장 핵심이고 기본적인 이 생각을 안 한다. 대신에 "우리 투쟁 열심히 했다"고만 한다. 다수는 "민주노동당이 반대만을 위한 반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보수정권이 설치해놓은 프레임 안에서 "이건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고 단식 하고 길거리에 나앉지 말자는 것이다. 역으로 "부유세 실시하라"는 식으로 단식투쟁하고 거리투쟁해야 한다. 우리 정책을 가지고 해야 한다. 왜 보수정권이 설정해놓은 곳으로 말려들어가나? 지금도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프레시안: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에서 2017년 집권이 목표라더라. 브라질 PT(노동당)가 25년 만에 집권했다지만 민주노동당이 그게 가능할까? 얼마가 걸릴까?

권영길: 당 대표 시절 "10년 집권 계획을 수립하자. 할 수 있다"고 외쳤던 사람이 나였다. 이 10년 이란 말이 숫자 10년이 아니다. 실제 10년 내 집권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건 민주노동당 뿐 아니라 진보신당도 마찬가진데, 선거에 나가면 '내가 당선된다'고 생각하고 뛰어야 한다. 그러면 행동이 달라지고 정책이 달라진다. '10년 내 집권? 꿈도 꾸지마. 이 분단의 땅, 국보법이 살아있는 땅에서 집권? 안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틀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집권할 수 있다. 승리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행동이 달라지고 정책이 달라진다.

프레시안: 정치인 권영길, 앞으로는 뭘 하나?

권영길: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은 권영길의 영혼이다. 참으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인데, 민주노총도 민주노동당도 지금 제대로 못 서있다. 1997년 대선 끝나고 창당을 위해 뛰었던 3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그 때는 진보정당을 탄생시키고 말겠다는 큰 꿈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다. 자갈밭에 들어가 손갈퀴로 돌을 걷어내고 농사지을 땅을 만드는 데 역할을 했다. 지금 홍수도 나고 땅이 다시 황폐화됐다. 진보정당이 다시 옥토가 되야하지 않겠나? 내가 앞으로 할 역할은 황폐화된 논밭,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가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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