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가 40일 남짓 남았다. 정당마다 후보를 뽑는 경선이 시작되었으니, 분위기는 더 달아오를 것이다. 여느 사람들도 모인 자리마다 대선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요 정치의 시기다.
안타까운 것은 이 선거에서 전혀 '진보'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거와 정치가 주체와 그 역량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라면, 강점과 함께 모자람과 약점도 그대로 드러난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강점이 커졌거나 약점이 극복되었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갑자기 치러지는 선거라고 하지만, 꼭 그 때문만이겠는가. 한국의 정치는 지지부진이다.
정당의 현실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대의 민주주의의 기본이라 할 정당의 역할은 구태의연하다. 구성원 개인이 아니라 정치세력이 경쟁해야 하건만, 정당은 어떤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그리하여 정치세력을 대표하지 못한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 서로 나누어 경쟁할 만큼 중요하고 의미 있는 정치세력이 존재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결국 이번 선거도 '개인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생각하면 심각한 문제다. 정치세력이나 정당이 아니라 개인에 의존하는 한, 누가 대통령 노릇을 잘할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용모, 언변, 분위기, 인터뷰가 다 무슨 소용인가. 어디를 찾아다니나 누구를 만나나 주변 사람이 누구인가로 판단할 것인가. 그도 아니면 성명서와 발표문, 연설로? 어떤 말을 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를 보라고 하지만, 그도 다 무용하다. 언론이 즐겨 쓰는 말을 빌려오면, 이번에도 '깜깜이' 선거가 불가피하다.
우선 우리부터 패러다임을 바꾸자. 개인 대통령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직을 '만드는' 것으로. 이미 그들이 준비한 지향과 정책도 어느 정도 사회적 여망과 압력에서 출발했지만, 어떤 약속을 더 내놓을지 또는 선거에 이겨 무엇을 할지는 유권자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달렸다. 백 퍼센트 그리된다고 할 수는 없어도, 지금보다는 더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 틀림없다.
그들뿐 아니라 시민(유권자, 주권자, 인민 등 무엇이라 불러도 마찬가지다)의 역할도 중요하다. 그들이 이미 내놓은 약속이나 앞으로 나올 공약은 유력한 제안일 뿐,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공약이 개인과 정당을 규율하기 위해서는 선거 시장의 상품이 아니라 '공동의 약속', '공동의 생산물'이어야 한다.
무슨 요구나 아이디어, 한두 가지 정책을 제안하는 것으로는 '공동'이 되지 못한다. 대통령과 정권이 차이가 난다면, 개별 정책과 프로그램이 아니라, 전체이자 구조, 지향이어야 한다. 정책, 사업, 프로그램은 당연히 그 '보편성'에 복무하기 마련이다. 공동으로 만든 보편성이야말로 공약의 진정한 특성이 되어야 한다.
전체, 구조, 지향이 보편성을 갖겠다는 순간 공약은 논쟁적이고 경쟁적이다. 기성품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강조한다.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그것을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더 적극적으로 토론을 조직하고 논쟁하라. 여러 단체와 조직, 운동은 요구와 이해관계를 지렛대로 삼아 이들을 압박해야 한다.
어떤 의제가 논쟁의 한복판에 들어와야 하는지, 이 자리에서 모두 열거할 수는 없다. 우리의 관심은 권리와 불평등을 중심으로 주로 '사회정책'에 집중되어 있으니, 여기서는 그중 몇 가지만 꼽는다. 이는 중요한 것 전부가 아니고 같은 차원도 아니지만, 논쟁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다.
1. 불평등
소득, 교육, 건강, 주거 등 모든 영역에서 불평등은 시대적 현상이다(☞바로 가기 : <서리풀 논평> 2017년 3월 20일, 대선에서 '불평등' 이슈가 사라진 이유). 어느 불평등 할 것 없이 구조적, 종합적, 정치적이란 점이 정말 어렵다. 불평등이 무슨 문제냐고 하는 쪽도 있고 보면, 논쟁과 (잠정적) 합의는 피할 수 없다.
2. 노인 빈곤
현재 어떤 상태인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판단과 예측은 차고 넘친다. 현실을 아는 가운데에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심각한 딜레마다. 국민연금이 정착되려면 오래 기다려야 하고, 기초연금은 크게 올리기 어렵다. 경제활동을 통해 소득을 올려야 한다고 하지만,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 가능성은 적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3. 일자리
산업구조가 일자리를 줄이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데다, 경제성장은 정체 또는 후퇴할 것이 명확하다. 공공부문에서 추가 일자리를 찾고 기업을 압박한다고 하지만, 누가 이를 근본 대책이라 생각할까. 다들 내세우는 '제4차 산업혁명'은 일자리를 줄이지 않을까?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는 대안이 될 수 있는가?
4. 비정규 노동
설마 비정규 노동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중요하다는 정도와 해결 방법은 일치하지 않는다. 다들 비정규 노동을 줄이는 데 동의하는가, 또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이 구조적 문제 그리고 시장의 문제라면, 정부는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5. 저출산
출산을 수단으로 보는 한(예를 들어 경제성장, 노동력, 부양 등), 모든 저출산 대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살만한 사회 애를 낳고 기르는 것이 행복한 나라가 되어야 결과적으로 저출산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다음 정부는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사회 구조와 삶의 방식을 크게 바꾸어야 한다면, 그 준비가 되어 있는가?
6. 교육
한국에서 교육은 직업과 소득, 권력과 직접 연관된다. 그 어떤 미시 정책도 자본주의 시장의 압력을 이기기 어려운 이유다. 고리를 끊는 구조적 변화가 없으면 진전을 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근본 대책이 가능하기는 한가?
7. 노인의 의료와 요양
모든 개인과 가족을 짓누르고 있는 문제다. 더 큰 비용이 들겠지만 생산과 경제로는 연결되기 어려우므로, 현재의 사회경제체제와는 모순되고 충돌한다. 누가 얼마나 많이 내고 누가 쓸 것인가? 개인은 얼마나 큰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리고 그 악명 높은 '시장'의 역할은?
아직도 한참 남았지만, 이 정도에 그치는 것이 좋겠다. 논쟁하자고 들면 한 가지만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다. 정답이 없으니 결론을 내기도 어렵다. 그뿐인가, 구조와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하는 문제가 수두룩하니 사회적 토론과 논쟁의 성과도 장담할 수 없다.
낙관하기는 어렵지만 현실 조건을 생각하면 포기할 수 없다. 지금 이대로 가면, 누가 집권하든 다음 정권 또한 성공은 고사하고 역사적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논쟁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우리 사회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최소한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당사자들은 다들 열심히 공약을 만드시라. 다만 한 가지, 그 공약은 우리 사회를 둘러싼 두려운 의제들과 그 실마리에 봉사해야 한다. 제발 화끈한(?) 해결 방법이라고 약속하지 말라. 그렇게 말하고 싶은 유혹도 물리쳐야 한다.
그 대신, 논쟁을 촉발하고 끌고 가는 좋은 '브로커' 노릇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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