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영화제에서 만나는 외국 감독들은 '한국은 다큐멘터리 감독들의 천국'이라며, 저희들을 부러워합니다. 거리에, 하늘에, 바다에, 섬에…. 일상을 잃어버린 사람들, 아니 싸우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린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2015년 2월 서울시 중구 소공동 우표박물관 앞 20미터 광고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는 단신 덕분에 SK브로드밴드 노동자들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하지만 알았더라도 곧 잊었습니다. 가끔 서울에 가 보면 거리에는 천막이, 하늘에는 고공농성 탑이 너무 많아서 누가 누구인지 구별하기 힘들었습니다. 모든 천막마다 사연이 있고 모든 탑마다 이야기가 있을 텐데 다른 작업 때문에 어디에도 가보지 못한 채 돌아서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모든 곳은 아니더라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그 시간들을 기록하고 있었더군요.
변규리 감독의 <플레이 온>은 시작부터 상큼합니다. 마이크가 보이고 '방송중'을 알리는 온에어 램프에 불이 들어오면 어떤 손이 오디오 믹싱 콘솔의 키를 만집니다. 그리고 자유로운 차림새의 젊은 남자들이 즐거운 얼굴로 프로그램의 이름을 말하면서 영화는 시작합니다. 해이의 '쥬뗌므'라는 노래를 배경으로 노래만큼이나 상큼한 화면들, 그러니까 이른 봄의 꽃집 풍경, 맑은 기름에 새우를 튀기는 노점상,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는 손, 전철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이는 한강 등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드럽게 펼쳐지는 일상의 한 풍경처럼 인터넷을 설치한 후 가입자에게 사용법을 설명하거나 전신주에 오르는 모습으로 영화의 주인공들이 등장합니다.
<플레이 온>은 마을방송 구로FM 라디오의 한 꼭지 'SK브로드밴드 노조와 함께 하는 노동자가 달라졌어요'의 '보이는 라디오' 형식을 띠고 있어서 우리는 영화를 통해 목소리의 주인공들을 볼 수 있습니다. SK브로드밴드 금천광명센터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호, 김준홍, 남훈, 전봉근, 이진환은 2주에 한 번씩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방송 사이사이로 주인공들의 일상이 펼쳐집니다. 아니, 어쩌면 일상들이 잔잔히 펼쳐지는 가운데 주인공들의 방송이 내레이션처럼 흐른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들은 소탈하고 자유롭고 유머가 넘칩니다. 선한 눈매의 젊은 남성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그러나 처참합니다. 통신대기업인 SK그룹과 LG그룹의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인 주인공들은 주 70시간에 이르는 노동에, 최저임금에, 수당도 없으면서 장비나 소모품은 다 직접 사야 하는, 말 그대로 극한 직업의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결국 이들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가 불이익을 당하고 '생존권 보장과 노동인권 보장'을 위해 파업농성에 들어가지만 회사 측 교섭단은 시간만 끕니다. 싸움이 길어지자 대부분이 분윳값과 기저귓값이 필요한 젊은 아버지들이라 현재처럼 농성을 할지, 일터로 복귀하여 파업을 지속할지 선택해야 합니다. 조합원 수가 적은 지회라 일터로 복귀해서 파업을 지속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용호는 말합니다.
"일하는 게 알바(생계투쟁)하는 것보다 낫잖아."
그다음 화면이 이 말의 의미를 알게 해 줍니다. '생계투쟁'이라 불리는 아르바이트는 도심에서 열리는 수문장 교대식의 배우로 참여하는 일입니다. 고궁 정문에서 옛날 옷을 입고 부동자세로 서 있는 남훈 옆에서 선글라스를 쓴 관광객이 셀카봉으로 열심히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눈동자 하나도 움직이면 안 되는 일이라 굳은 채로 서 있는 남훈의 큰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수치심.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여러 번 "쪽팔리다"라는 말을 합니다. 수치심은 인간다움의 징표이지만, 동시에 존재를 부정하는 감정이라지요. 그가 느꼈을 수치심이 그대로 제 가슴에 와서 꽂힙니다. 신작전 중 한 편인 <안녕 히어로>(한영희 감독, 2016)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를 아버지로 둔 현우가 고등학생이 됩니다. 교복 후원 행사에 참여하고 기념사진을 찍던 현우의 얼굴에 어리던 어떤 그림자.
'광고판 화면에 늘어뜨려진 플래카드'와 '공장 하늘 위에 떠 있던 헬기'로 표상되던 두 사건은 이렇게 영화를 통해 다시 기억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 고공농성 돌입'이나 '쌍차사태'와 같은 뉴스들에서 짧고 건조한 단어들로만 불리던 그 시간들이 색색의 감정들로 채워집니다. 종이에 말라붙어 있던 검은 활자들에 피가 흘러들어가고 살이 붙어 가며 부드러운 몸체가 만들어집니다. 내가 없었던 그 시간들, 내가 가지 못했던 그 장소들, 기억해야 하는데 누군가 애써 묻어 버린 말들, 투쟁 조끼와 주먹질로 포장해 버려 볼 수 없었던 당신들의 눈동자…. 영화는 그 모든 것들을 만나게 해 줍니다.
저만의 생각은 아니겠지만, 영화를 보는 일은 여행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감독들은 자신이 방금 다녀온 그 여정에 관객들을 데려가기 위해 처음 자리로 돌아와 머리를 쥐어뜯으며 구성과 형식을 고민해서 영화라는 기차를 만듭니다. 끝까지 가 봤기 때문에, 그 여정에서 무언가를 만났기 때문에 감독들은 쑥스러워하면서도 세상에 영화를 내어놓습니다. 내가 만난 세계를 관객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는 열망, 그리하여 내가 목격하고 내가 기록한 것이 공동체 모두의 기억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그 열망과 희망을 동력 삼아 긴 시간을 버티며 영화를 만들어 냅니다.
기억의 패권을 쥔 자들에 맞선 그 작은 카메라들의 성취를, 빛나는 기억들을, 그 뜨거운 열망들을 기쁘게 만나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문의 : 인디다큐페스티발 사무국 02-362-3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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