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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봄에 떠나는! 예천(醴泉) 고택과 정자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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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초봄에 떠나는! 예천(醴泉) 고택과 정자 기행

2017년 3월 고을학교

3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41강은 산천이 수려하여 사대부의 고택과 정자가 많이 남아 있으며 십승지(十勝地)의 명당 중의 하나인 금당실마을과 낙동강변의 물도리동인 회룡포를 품고 있는 예천(醴泉)고을을 찾아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낙동강변의 물도리동의 하나인 회룡포Ⓒ금당실마을

고을학교 제41강은 2017년 3월 26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번 답사 코스는 서울-용문면(초간정/예천권씨초간종택/용문사)-금당실마을(추원재/금곡서원/반송재고택/사괴당고택/금당실송림)-예천읍(예천향교/신천서원/노봉서원)-점심식사 겸 뒤풀이-호명면(선몽대/연안이씨별좌공종택)-용궁면(회룡포/용궁향교/무이서당/청원정/황목근)-풍양면(삼강강당/삼강주막)-서울의 순입니다.

▲<예천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41강 답사지인 <예천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내성천이 빚어놓은 고을

예천은 백두대간의 남쪽에 있으나 이웃하는 영주나 문경처럼 백두대간에 직접 맞닿아 있지 않고 백두대간 상의 소백산에서 뻗어나온 산줄기와 그 산줄기를 감아 흐르는 내성천이 빚어놓은 고을입니다. 북부는 백두대간의 지맥이 뻗어내려 산지가 많고, 중부와 남부는 낮은 분지가 발달하여 북고남저(北高南低)의 지세를 보이며 낙동강과 내성천이 유역(流域)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예천의 물줄기는 동북쪽 봉화 오전약수에서 발원한 내성천이 명봉계곡에서 발원하여 예천읍내를 휘감아 흐르는 한천을 받아 안아 상주에서 흘러온 금천을 삼강주막 앞에서 만나 낙동강으로 흘러드는데 예천의 내수(內水)인 내성천과 한천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외수(外水)인 낙동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수태극(水太極)의 형국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천(醴泉)이란 <장자(莊子)>에 나오는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예천(醴泉)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는 신비의 물로서 <예기(禮記)>에는 “태평성대에 하늘에서는 단맛의 이슬이 내리고[天降甘露] 땅에는 단맛의 샘물이 솟는다[地出醴泉]”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학가산(鶴駕山 882m)은 백두대간에서 남으로 뻗친 문수지맥에 있는 산으로 동쪽은 안동, 서쪽은 예천, 북쪽은 영주와 접해 있으며 날개 있는 사람이 학을 타고 노닐었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달리 하가산(下駕山), 하가산(下柯山)이라고도 하는데, 위치에 따라 달리 보여 예천사람은 '인문봉', 영주사람은 '선비봉', 안동사람은 '문등봉'이라고 부릅니다.

이 산에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왔을 때 쌓았다는 학가산성이 있으며 학가산 자락 석탑리에 있는 돌무더기로 쌓은 네모난 탑에 대하여 <영가지(永嘉誌)>에는 이 산의 한 굴에 능인대사가 숨어 지내며 세속을 멀리 하였는데, 스님 1000여 명이 부석사에서 찾아왔으나 끝내 그를 만나지 못하자 각각 돌을 모아서 쌓은 탑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흑응산(黑鷹山 100m)은 예천의 진산으로, 덕봉산의 지맥이며 산의 이름을 딴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는 흑응산성이 축조되어 있고 장군암과 기우단이 남아 있습니다.

흑응산에 토석혼축으로 축조된 흑응산성은 주성인 내성과 외성인 익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성벽의 둘레는 1900m, 높이는 평균 3∼4m이고 주성의 성내지에 2개소의 우물과 1개소의 못이 원형대로 남아 있으나 군창이 있던 자리에는 농막이 세워져 있습니다. 산정에는 성황당이 남아 있고 무문토기, 신라토기조각과 지석묘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부족국가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국사봉(國師峰 732m)은 국가에서 봉화대를 세웠던 곳으로 산 정상에는 제단이 있어 가뭄이 심하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이러한 연유로 국사봉에 산불이 나면 하늘에서 비가 내려 불을 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덕봉산(德鳳山 373m)은 덕봉산(德逢山)이라고도 하며 지도에는 봉덕산(鳳德山)으로 되어 있고, 지맥이 동쪽으로는 흑응산에 닿고, 서쪽으로는 석정리 뒷산으로 이어지는데 산 능선에는 고분이 많이 있습니다.

예천은 신라시대는 눌지왕(訥祗王) 때 ‘수주촌(水酒村)’이라는 이름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실려 있고, 505년(지증왕 6)에 ‘수주현(수주현)’으로, 757년(경덕왕 16)에 영안(풍산), 안인(동로, 산북 일부), 가유(산양), 은정(상리, 하리)의 4현을 영속시켜 예천군이 되었습니다.

고려시대는 936년(태조 18) 보주로 개칭되고, 983년(성종 2) 양양이라는 별호가, 995년(성종 14) 청하라는 별호도 생겼으며 1018년(현종 9) 보주는 안동영지사부에 소속되었고 1172년(명종 2) 왕이 태자(22대 강종)의 태실을 용문사 부근에 마련하고 보주를 기양이라고 고쳐 현령을 두었습니다. 1204년(신종 7)에 기양현을 다시 보주로 고쳐 관원의 품계를 격상시켰고 1274년(원종 15)에 임지한 장군이 반적 최사의 무리를 토평한 전공으로 상주목 관할의 다인현을 예천군의 속현으로 삼았습니다.

조선시대는 1413년(태종 13) 보천군으로, 1416년(태종 16)에 예천군으로 옛 이름을 되살렸고 1894년(고종 31) 1896년(고종 33) 13도제 실시 때 경상북도 예천군이 되었으며 1906년(광무 10) 화장과 동로소를 문경군으로, 현내면, 현동면, 현서면, 현남면(이상 옛 다인현)은 비안군으로 이속되었고, 안동부 관내의 감천면을 예천군으로 편입하였습니다.

▲초간정Ⓒ금당실마을

정자와 누각 110여 곳이 넘었던 고을

<예천군지(醴泉郡誌)>에 보면 예천에는 향교가 두 곳, 정자와 누각은 110여 곳이 넘고 서원과 고택도 넘치고 용문사를 비롯한 사찰도 14곳, 절터도 15곳 이상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용궁향교(龍宮鄕校)는 1398년(태조 7)에 창건되어. 1400년(정종 2) 소실된 뒤 1512년(중종 7)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던 것을 1603년(선조 36) 대성전과 명륜당을, 1636년(인조 14) 세심루(洗心樓)를 각각 중건하였고,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하여 지금은 대성전, 명륜당, 세심루, 동재(東齋), 신도문(神道門) 등이 남아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예천향교(禮泉鄕校)는 1407년(태종 7) 서본리에 창건되어 1418년에 군수 김겸(金謙)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656년(효종 7) 군수 심유행(沈儒行)이, 1658년 군수 이휘조(李徽祚)가 각각 중수하였고 1770년 경에는 판관(判官) 최승(崔僧)이 중건하였으며 건축 당시에는 9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대성전, 명륜당, 외삼문, 주사(廚舍) 등이 남아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용궁척화비(龍宮斥和碑)는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와 1871년(고종8) 신미양요를 겪으며 전국의 주요 도로 등에 세운 척화비 가운데 하나로 비석 전면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이라 글을 새겼는데 원래 민가에 있던 것을 용궁중학교에서 찾아 용궁초등학교 동편 비석들이 있는 곳에 옮겼다가 1988년 만파루를 재건하면서 다른 비석들과 함께 그 옆으로 옮겼습니다.

신천서원(新川書院)은 맹암(孟岩) 김영열(金英烈)의 유지를 받들고 후손을 교육시키기 위해1945년에 설립하였는데 경내에는 배향공간인 경훈사와 강학공간인 강당, 남덕문(覽德門), 출입문 등의 건물이 있고, 밖에는 신도비가 있으며 사당인 경훈사에는 태종의 글씨인 단서(丹書)와 맹암의 영정을 모시고 있습니다.

맹암은 1400년(정종 2) 방간의 난(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으로 1404년(태종 4) 참판승추부사로 있을 때 왜선 1척을 싸워서 빼앗은 후 왜병을 포로로 잡은 공을 세웠고 사후에 우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양소(襄昭)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습니다.

노봉서원(魯峯書院)은 단종 때 순절한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의 절의를 본받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794년(정조 18)에 건립되었으며, 1866년(고종 3)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1년 안동의 도산서원, 병산서원(倂山書院), 역동서원(易東書院), 문경의 호계서원(虎溪書院)과 함께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재건하였는데 지금은 몽양재, 숭의사, 존사소, 정문, 신도문 등이 남아 있습니다.

죽림은 단종의 이모부로 단종이 즉위할 때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으로 부임했는데 세조의 왕위찬탈이 일어나자 두 임금 섬기기를 거부하여 낙향했습니다. 1456년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일에 가담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한탄하다 끝내 자살하여 관직을 박탈당하고 자손들도 백 년 동안 벼슬길이 막혔다가 1789년(정조 13) 신원복관((伸寃復官) 되어 이조참판, 1885년(고종 21)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충민(忠愍)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도정서원(道正書院)은 선조 때 좌의정 약포(藥圃) 정탁(鄭琢)과 그의 셋째 아들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640년(인조 18)에 세운 사당이었으나 1697년(숙종 23)에 지역 사림과 후손들의 정성을 모아 강당채를 새로 세워 도정서원(道正書院)으로 승격하였고 지금은 사당채, 강당채, 동재, 서재, 전사청, 누각 등 5동의 건물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정탁은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예조판서, 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몽진(蒙塵)하는 선조를 호종하였으며, 곽재우, 김덕령, 이순신 등을 천거하였고 1603년 영중추부사에 올랐으며,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금곡서원(金谷書院)은 1568년(선조 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충좌(朴忠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뒤 박눌(朴訥)과 박손경(朴孫慶)을 추가로 배향한 함양 박씨 3인을 추모하는 서원으로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유림에 의해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경내에는 묘우(廟宇), 강당,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전사청(典祀廳), 장판각(藏板閣), 신문(神門), 외문(外門), 주소(廚所) 등이 남아 있습니다.

삼강강당(三江講堂)은 청풍자 정윤목이 광해군의 실정에 불만을 품고 벼슬을 사양하고 내려와 후진을 양성키 위해 세운 사설 학원으로 강당채와 학당채가 남아 있습니다.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현판 글씨는 정윤목이 1589년(선조 22)에 부친을 따라 중국에 가서 백이숙제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올 때 모사해온 글씨입니다.

청풍자는 류성룡(柳成龍)과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경사와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 특히 필법이 탁월하여 초서의 대가로 존경받은 학자로, 광해 8년에 소촌도 찰방 벼슬에 부름을 받았으나 광해군의 난정으로 윤리와 기강이 문란함을 통탄하고 자적하면서 후진양성에 정력을 쏟았으며 초서(草書)의 대가였습니다.

미산학사(眉山學舍)는 “학사가 없으면 뜻을 펼 수 없다(不有舍側 志不事業)”는 미산(眉山) 김이도(金以道)의 홍학이념을 실현키 위해 1670년(현종 11)에 세운 사설학원으로 1750년에 중수한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으며 학당인 삼경당(三慶堂)과 안채인 정침(正寢)이 각 1동씩 남아 있습니다.

대청마루에는 세 가지의 경사라는 뜻으로 ‘삼경당(三慶堂)’이란 당호가 걸려 있는데 ‘삼경’이란 김이도의 아들 매죽헌(梅竹軒) 김영진(金英震)이 인조 26년 생원시에 장원을 한 일, 회방(回榜, 장원을 한 지 60년을 맞는 날)을 맞아 잔치를 연 일, 그 날에 미산이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증직된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무이서당(武夷書堂)은 여주이씨(驪州李氏) 시조(始祖)인 태사공(太師公) 이인덕(李仁德)의 20세손인 이지섬(李之暹)과 21세손인 이식(李湜)이 1710년에 후손들에게 면학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세운 서당으로, 서당 뒤편에는 여주이씨 무이입향조(武夷入鄕祖)이며 승사랑(承仕郞)으로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증직(贈職)된 이윤수(李潤壽)를 봉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 있습니다.

▲사괴당 고택Ⓒ금당실마을

'물에 떠있는 연꽃' 금당실

금당실[金堂谷]은 '물에 떠있는 연꽃'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의 주산인 오미봉에 오르면 북쪽의 매봉, 서쪽의 국사봉, 동쪽의 옥녀봉, 남쪽의 백마산으로 둘러싸인 명당입니다. 남사고(南師古)는 <정감록(鄭鑑錄)>에서 금당실을 “금당과 맛질을 합하면 서울과 흡사하나 큰 냇물이 없어 아쉽다”고 하면서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병화(兵禍)가 들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임진왜란 때도 온전했다고 하며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신하에게 닭을 주면서 “이 닭이 울기 전에 용문에 도착하면 도읍을 정하겠노라”고 했는데 닭이 먼저 울었기 때문에 도읍지를 취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금당실은 약 600년 전인 15세기 초 감천문씨가 처음 터를 잡았고 그 뒤로 사위인 함양박씨 ‘박종린’과 원주변씨 ‘변응녕’의 후손이 대대로 마을을 일궜는데 지금 이곳에는 함양박씨 3인을 모신 금곡서원, 함양박씨 압향조 박종린을 모신 추원재 및 사당, 조선 숙종 때 도승지 김빈을 모신 반송재 고택, 원주 변씨 입향조 변응녕을 모신 사괴당 고택, 구한말 세도가 양주대감 이유인의 99칸 저택 터가 남아 있습니다.

특히 용문면사무소 터는 변응녕 선생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심은 4그루의 느티나무가 있던 자리로 큰 홍수가 난 뒤로 3그루의 나무는 사라졌지만 마을 중심부에 남은 한 그루의 느티나무와 사괴당(四槐堂)이라 불리는 전통가옥이 역사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금당실송림’은 금당실의 지형이 낙동강 지류인 복천과 용문사 계곡과 청룡사 계곡으로 흐르는 계류가 만나는 삼각주를 형성하고 있어 여름철 하천물의 범람을 막고 겨울철 북서한풍을 막기 위하여 주민들이 조성한 마을 숲으로 달리 임수(林藪)라고도 합니다.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노비구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마구 벌채하자 1895년(고종 32년) 당시 법무대신이던 이유인이 금당실에 99칸의 집을 짓고 거주하면서 이 숲을 보호하여 왔다고 합니다.

추원재(追遠齋)와 사당(祠堂)은 금당실마을 뒤 오미봉을 진산으로 남향하여 자리잡은 사학의 공간이며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박종린)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아들 영이 1665년에 세웠는데 토석 담장 안에 사당과 내삼문, 강당, 대문칸 등 4동을 튼ㅁ자로 배치하여 배향공간과 강학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반송재(伴松齋) 고택은 숙종대에 도승지, 예조참판 등을 지낸 갈천 김빈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살았던 집으로서 처음 지은이는 갈천의 아우 정인데 그의 자손들이 가세가 쇠미하여 타인에게 전매될 때 구한말 법무대신 이유인이 매입하여 1899년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영남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배치와 평면구성법을 띠고 있습니다.

사괴당(四槐堂) 고택이 있는 상금곡리는 원주변씨와 함양박씨의 집성촌입니다. 사괴당 고택은 첨주공파의 입향조인 귀계 변희리의 증손 사괴당 변웅녕(邊應寧)이 터를 잡았는데 고택의 배치는 튼ㅁ자형으로 정침과 양익사가 ㄷ자형을 이루면서 앞쪽에 일자형 문간채가 자리하고, 우익사 동편에 이층 대문채가 있습니다.

미산고택(味山古宅)은 함양박씨 정공랑의 후손인 독처재 박세주가 1650년(효종 원년) 금당골에서 이 마을로 옮기면서 지은 것을 5대손인 미산 박득영(朴得寧)이 1825년(순조 25) 이곳으로 옮겨지었다고 하는데 사랑채 마루 위의 미산재(味山齋)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글씨입니다.

예천권씨 초간종택은 별당과 연결된 고가로 초간 권문해의 조부인 권오상이 지은 별당과 권문해가 지은 안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종택은 별당과 연결되어 ㅁ자 아래에 ㄴ자를 연결한 형태이고 별당은 잡석으로 여러 단의 축대를 쌓아 건물 자체가 높고 웅장하며 고졸한 맛을 풍깁니다.

예천권씨 영사당종택은 임란 의병장 권우(權祐)가 1580년 경 자신의 살림집으로 지은 것으로 1780년을 전후해서 중수했다고 전해지는데 안대청 좌우에 놓인 도장방, 사랑방 공간의 미발달, 도장방 상부의 더그매 및 대청 뒷벽 구성 등의 평면 형식과 구조 양식에서 당시의 모습이 일부 남아 있어 주택변천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의성김씨 남악종택(義城金氏 南嶽宗宅)은 병자호란 때의 척화신(斥和臣) 불구당(不求堂) 김왕(金迬)이 태어난 곳입니다. 국사봉 지맥을 배경으로 동남향하여 배치된 이 고택은 영남 북부지방 민가의 기본적 평면을 가진 공간구성으로 매우 간소하고 고졸하며 사랑채의 가구 방식은 민가의 전통적인 누각형식의 구법을 따랐으며 1981년 지붕을 고칠 때 발견된 ‘숭정 칠년 갑술 삼월일 용문사승 운보조’라고 새겨진 명문기와로 미루어 보아 이 종택이 1634년(인조 12)에 창건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연안이씨 별좌공종택(延安李氏別坐公宗宅)은 선조 때 퇴계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눌헌(訥軒) 이응(李應)의 아들 사고(沙皐) 이덕창(李德昌)이 지은 것으로 사고는 서애 문인으로, 문과에 올라 임진왜란 때 창의한 공으로 내자시정에 제수되었고 선대가 자리하던 구기(舊基)에 이 집을 세우고 ‘사고구려(沙皐舊廬)’라는 현판을 걸었습니다.

석문종택(石門宗宅)은 1609년(광해군 1) 석문 정영방(鄭榮邦)이 지은 건물로서, 一자형 초가 대문채 뒤편에 와가(瓦家) 몸채가 튼口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몸채는 안채와 사랑채가 90°각으로 돌아 앉아 내외공간이 좌우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배치 및 평면구성은 19세기 후반 이후의 주택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유형입니다.

연곡고택(延谷古宅)은 제곡리 작은 맛질에 있는 고가옥으로 연곡(延谷) 권성익(權聖翊)이 1795년(정조 19)에 창건한 것으로 연곡은 안동권씨 시조 권행(權幸)의 28세손이며 제곡마을 입향조인 야옹의 8세손으로 약관에 군대부가 되었고 사복시정에 증직되었습니다.

춘운재고택(春雨齋古宅)은 안동권씨 복야공파조 권수홍의 10대손이며 제곡리 입향조인 야옹 권의의 손(孫) 춘우재(春雨齋) 권진(權晋))이 세웠으며 정면 5칸, 측면 7칸의 ㅁ자형 안채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이 평면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삼강주막Ⓒ금당실마을

새로 복원된 삼강주막

초간정(草澗亭)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저술한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가 심신을 수양하기 위해 1582년(선조 15)에 처음 지어진 건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2년(광해군 4) 중건했다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다시 붕괴된 것을 1870년 초간의 현손이 1870년 중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초간정 정자채는 사주문을 통하여 들어가며 뒤쪽과 오른쪽은 절벽을 이루고 자연기단 위에 주초를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집으로, 정면 3칸 중 앞면의 좌측 2칸은 온돌방을 배치하고 나머지 4칸은 통간의 대청으로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측면은 사면으로 난간을 설치하였습니다.

청원정(淸遠亭)은 1354년(공민왕 3)에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이 환국했을 때 원나라 원제에 조공을 감면케 한 공로로 축산부원군에 봉해지고 지금의 소천강 일대를 하사받아 이 정자를 창건하였는데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이 쓴 ‘청원정’이라는 글씨가 옆 암벽에 음각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918년 복원되었습니다.

청원정은 이 지역에서 보기 드문 온돌 양협 칸에 마루를 둔 형태로, 정자건축에 있어서 건축사적으로 보존가치가 있으며, 청원정에 보존되어 있는 <청원정중수기> <청원정중수상량문>, 퇴계의 시문, 성화천 동안의 금석문(청원정, 국파전선생) 등은 좋은 연구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관물당(觀物堂)은 학문과 휴양을 위해 16세기 중반에 건립된 건물로서 지금의 모습이 창건 당시의 모습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8세기 양식으로 볼 수 있는 평면 형식과 고졸한 토머름 등으로 미루어 보아 건립 당시의 모습이 큰 변화 없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야옹정(野翁亭)은 1566년에 중종 때 학자로 의홍현감(義興縣監)을 역임한 야옹 권의((權檥)의 학덕을 받들기 위해 그의 아들 권심언(權審言)이 1566년(명종 21)에 세운 정자로 조선 중기 이전 건축양식의 세부를 간직한 점에서 중요시되는 건물입니다.

삼수정(三樹亭)은 낙동강이 굽이도는 연안(별실)마을 등성이에 북향으로 자리 잡아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는데 1420년대 처음 세워졌으나 1636년에 폐하였다가 1829년 경상감사(慶尙監司)로 부임한 정기선(鄭基善)에 의해 중건되었습니다. 건물은 옛 모습을 비교적 잘 지니고 있으며, 가운데 마루방을 둔 평면형식은 아주 드문 예로 희소가치가 높습니다.

선몽대(仙夢臺) 일원은 약 45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곳으로, 지형은 풍수상 평사낙안형(平沙落雁形)으로 내성천의 백사장과 어우러져 경관이 아름답습니다. 이 곳에 있는 선몽대 숲은 수해방비림, 방풍림, 비보림 역할을 하고 있으며 가묘, 재실, 정자와 단, 비각, 비 등의 시설물과 퇴계 선생의 친필인 선몽대 현판을 비롯하여 곳곳에 유성룡, 정탁, 김상헌, 이덕형 등의 친필시가 남아 있습니다.

회룡포(回龍浦)는 낙동강 지류 내성천이 휘감아 돌아 만든 물도리동으로 산과 강에 둘러싸인 오지로서 한때는 죄인의 임시 귀양지였습니다. 사람이 들어와 산 것은 조선 고종 때 예천의 아랫마을 의성에 살던 경주김씨 일가가 소나무를 베고 논밭을 개간하면서 정착했는데 그래서 의성포란 이름을 얻었으나, 의성포로 불리는 것이 의성군에 있는 것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아 예천군에서 회룡포로 고쳐 부르고 있습니다.

삼강(三江)은 내성천, 금천, 낙동강의 세 물줄기가 합류하는 곳이라서 붙여진 이름으로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맑은 물과 넓은 백사장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예로부터 이곳은 서울로 가는 길목으로 장사하던 배들이 낙동강을 오르내렸고, 문경새재를 가기 전에는 이곳 삼강 나루터를 꼭 거쳐 갔으며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여 주막 등이 번성하였습니다.

삼강주막은 삼강나루의 나들이객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보부상들의 숙식처로 이용되었는데 규모는 작지만 그 기능에 충실한 집약적 평면구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함께 한 유옥연 주모 할머니가 안타깝게도 2006년 세상을 떠나면서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가 2007년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새로운 주모와 함께 나들이객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용문사는 870년(경문왕 10)에 두운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 전설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삼한 통합의 큰 뜻을 품고 두운대사를 방문하고자 동구에 이르니 갑자기 바위 위에서 쌍용이 나타나더니 절로 가는 길을 인도하였다하여 태조는 산 이름을 용문산, 절 이름을 용문사라 명명했다고 합니다.

경내에는 1173년(고려 명종 3)에 지어진 대장전, 회전식 불경보관대인 국내 유일의 윤장대, 대추나무에 불상을 조각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목불좌상 및 목각탱, 불국사의 것보다 규모가 더 웅장한 사천왕상 일주문과 세조의 친필수결의 용문사교지 등 보물과 다수의 문화유산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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