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기본법인 헌법은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개헌을 하려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대하고도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묻는다. 왜 개헌인가?
파행적 국정운영의 원인이 과연 현행 헌법인가?
▲ 제헌절 기념식에서 개헌을 강조하고 있는 김형오 국회의장ⓒ프레시안 최형락 |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의 시기를 일치시켜 선거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한다. 비용을 줄인다면야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개헌을 할 만큼 중요한 일인가? 같은 시기에 선거를 치르면 대통령과 국회가 동일한 정치집단에 의해 장악될 가능성이 더 커질 터인데, 그렇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국회의원 선거가 사실상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 아닌가?
5년 단임제가 문제라고 한다. 그래서 4년 중임제이면 더 나은가? 4년만에 물러나게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혹은 8년은 되어야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4년 중임제인 미국에서도 부시와 같은 대통령이 나오지 않는가?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고 한다. 현행 헌법의 대통령제가 과연 제왕적인가? 바로 1년반 전까지 현행 헌법에 따라서 대통령제가 제왕적으로 운용되지 않았던 경험이 있지 않은가? 오히려 지금 개헌을 주장하는 정치세력이야말로 대통령제를 제왕적으로 뒤틀고 있는 바로 그 집단 아닌가? 그런 집단이 개헌을 주장하는 것은, 장난감을 사용법에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가지고 놀다가 망가뜨린 어린애가 원래 불량품이었다며 떼를 쓰는 것과 과연 다른가?
대통령에 대한 과도한 권력집중은 분명 문제이다. 하지만 그것이 헌법의 문제인가? 경찰과 검찰이 집 지키는 동물에 비유되고 있는 것이 헌법 탓인가? 다수 여당이 대통령만 쳐다보며 논리와 설득이 아니라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기만 하고 있는 것이 헌법 탓인가? 분권형 대통령제이면, 이원집정부제이면, 내각제이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지역에 터 잡은 작은 토호들이 영원히 확실한 지분을 챙기는 담합구조를 만들어낼 수도 있는 위험은 어떻게 할 것인가?
미지의 새 제도가 좋다는 증명을 먼저 해야 할 것
물론 현행 헌법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행 헌법은 대한민국 헌정사의 거대한 굴곡이 만들어 낸 역사적 산물이다. 그리고 우리 헌정사에서는 드물게 20년 이상이나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헌법 노하우'를 쌓아왔다. 개헌론자들은 지금까지 5년 단임제 대통령은 모두 불행했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대통령이 임기 후에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노하우도 그만큼 축적되었다.
따라서 헌법을 바꾸려면 새로운 제도가 그 역사적 정당성과 역사적 계속성을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더 큰 장점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어디에도 그 증명은 없고, 개헌을 해야 한다는 외침만 허공을 맴돌고 있다. 이유 없는 주장은 항상 숨은 의도를 감추고 있는 법이다. 그 의도는 시선을 개헌 쪽으로 돌려 위기를 모면하려는 것이거나, 자신의 정치적 지분을 늘리기 위해 헌법을 이용하려는 것일 터이다.
대한제국 헌법이나 일제 헌법이나 제헌 헌법이나…
길지 않은 헌정사에서 헌법이 제정된 것을 기념하는 제헌절을 맞아 진정 해야 할 일은 헌법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는 것이다.
1948년 7월 17일까지 한반도에는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고 권력을 통제하는 입헌주의적 의미의 헌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의 근대적 헌법이라고 일컬어지는 1899년의 대한국국제는 '대한국 대황제의 무한한 군권(君權)'을 거듭 천명한 것일 뿐이었다.
35년간의 일제강점기에도 '외견적(外見的) 입헌주의 헌법'이라고 비판받았던 대일본제국헌법조차 온전하게 시행되지 않았다. 한반도에 시행된 것은 '살아 있는 신'인 천황의 절대적 지배에 관한 조문 만이며, 신민(臣民)의 권리에 관한 조문은 천황이 시행한다고 마음 먹을 때 비로소 시행되는 것이라고 해석됐다. 그래서 결국 한반도의 인민들은 강점이 끝날 때까지 극히 왜소한 '신민'의 권리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제의 민법이 의용(依用)된 것을 들어 일제강점기에 근대법이 도입되었다고 평가하지만, 헌법이라는 뿌리가 없는 상태에서 줄기와 가지가 온전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헌법 속에 압축된 법이념에 따른 체계적인 법이해는 도외시한 채, 개개의 법조문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표현만을 떼내어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는 것을 '법치'라고 우기는 천박한 버릇만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1948년에 이르러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고 권력을 통제하는 헌법이 제정된 것은 그래서 기념할 일이다. 하지만 이 땅의 헌법은 오랫동안 법전 속에 갇혀 있었다. 시위의 자유를 설명하는 대학 강의실 창밖에서 대학 구내에 상주하는 사복경찰에 의해 학생들이 끌려갔었다. 헌법 교과서는 사법시험 공부를 할 때만 들추어졌을 뿐 법률가의 서가에서는 그저 장식용에 불과했다.
헌법대로 하자. 헌법대로.
헌법이 '살아있는 법'이 된 것은 1987년 개헌으로 현행 헌법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헌법재판소제도가 도입되고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권위주의 시대의 일탈에 대한 반성 위에 국가기구들이 조금씩 헌법이 가리키는 제자리를 찾아갔다. 20년이 지난 뒤에는 참으로 놀랍게도 촛불을 든 시민들에 의해 헌법 제1조가 법전에서 솟아나 노래가 되어 울려 퍼지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20년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했던 듯하다. 이 정부 들어 1년반 동안 낡은 버릇은 너무나 쉽게 되살아났다. 대통령이 '아파트를 지어 산간벽지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모아서 살게 하는 것이 자연재해에 대한 영구적 대책'이라고 주장한다. 국회의원들이 언론, 집회, 시위, 표현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훼손하는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경찰, 검찰, 국정원 등의 이른바 수뇌들이 국가기구를 그들 뒤에 줄 세우고 있다.
문제는 헌법이 아니라 헌법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헌법 개정이 아니라 헌법 공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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