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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만·남양만을 품은 서해 해상무역의 전초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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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아산만·남양만을 품은 서해 해상무역의 전초기지

2017년 1월 고을학교는 <평택고을>

새해입니다.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의 1월 제39강, 새해 첫 강의는 아산만과 남양만을 품은 서해 해상무역의 전초기지 평택고을에서 출발합니다. 평택평야의 너른 들녘을 품고 있는 이 고을이 낳은 임진왜란의 원균과 병자호란의 삼학사 오달제, 홍익한 등 쟁쟁한 역사적 인물들의 자취와 충절을 기리며 정유년의 새해를 맞이할까 합니다.

▲해질 무렵의 평택호 풍광ⓒ평택시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39강은 2017년 1월 22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30분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7시 2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오산IC-만기사(철조여래좌상)-진위향교-문헌사/삼봉기념관-원균묘/사당-안재홍생가-충의각-대동법시행기념비-점심식사 겸 뒤풀이-팽성읍객사-평택향교-농성-홍학사비각-심복사(석조비로자나불)-평택호-서평택IC-서울의 순입니다.

▲<평택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39강 답사지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삼남대로 지나는 요충지

평택은 한남정맥의 남쪽 금북정맥의 서쪽에 위치하며 지형적으로 비교적 평탄한 평야지대로 이뤄져 있습니다. 산줄기는 동북부의 무봉산(舞鳳山 209m), 서북부의 덕지산(德智山 138m), 서부의 오봉산(五峰山 112m) 무성산(武城山 105m) 자미산(慈美山 110.8m) 비파산(琵琶山 102.2m), 남서부의 고등산(高等山 150m) 마안산(馬鞍山 101m) 등 낮은 구릉성 산지들이 이어져 있고, 경기도의 남단에 위치하여 동쪽은 안성과 용인, 서쪽은 아산만과 남양만, 남쪽은 아산과 천안, 북쪽은 화성과 접하고 있습니다.

물줄기는 안성천(安城川)과 진위천(振威川)이 동쪽에서 발원하여 중앙부를 관통하며 평택평야를 적셔주고 서쪽으로 흘러 아산만을 거쳐 서해로 흘러 들어드는데 안성천은 삼한시대에는 웅천강(熊川江), 진위천은 장호천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평택은 서해에 접한 평야지대로, 신라시대에 대당(大唐) 교통로였고 고려 말기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해 산성(山城)과 평산성(平山城) 형태의 읍성(邑城)이 많이 축조되었는데 비파산성은 용성현성(龍城縣城)으로, 덕목리성은 광덕현성(廣德縣城)으로 비정되는 고려시대 읍성입니다.

비파산성(琵琶山城)은 비파산(琵琶山 102.2m)의 북쪽 정상부와 남동쪽 하단부의 용성리 뒷골을 포함하여 쌓은 포곡식 토축 평산성으로 고려 초기 읍성(邑城)의 역할을 한 행정치소가 있었던 곳입니다. 북고남저(北高南低),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으로 성벽의 길이는 약 1,622m, 외벽의 높이는 약 10m내외이며 성내에는 문지 5개소, 치성 4개소, 건물터 14개소, 음료 유구 5개소가 남아 있으며 고려에서 조선까지의 기와편, 토기편, 자기편이 발견되었습니다.

정상에서는 동쪽으로 평택시 일대, 남쪽으로 아산만, 서쪽으로 서해안, 북쪽으로는 화성시 일대가 한눈에 조망되며 북쪽으로는 약 100m 거리에 자미산성이, 남쪽으로 약 500m 거리에 용성리성지가, 비파산의 남서향하는 지맥에서는 길이 약 7~8km의 석정리장성(石井里長城)이 이어지고 있어 이 지역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덕목리성지德睦里城址)는 동성(東城)과 서성(西城)으로 나눠져 있는 평지성(平地城)으로 동성을 중심으로 성 안쪽 마을을 '성안(城內)', 성 바깥쪽 마을을 '성밖(城外)'이라 불렀습니다. 성터 주변의 자연지명들도 관터, 사창, 나라 땅으로 불리는 것으로 보아 이 마을이 통일신라시대 수성군(水城郡)의 4영현 가운데 하나인 광덕현의 치소(治所)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입니다.

현재 동성은 마을과 경작지로 인해 모두 파괴된 상태인데 잔존하는 기저부(基底部)를 토대로 추정해본 성의 둘레는 약 226m정도이고 서성(西城) 역시 북벽과 동벽의 일부만 남아있습니다. 남벽과 서벽은 경작지와 농로 조성으로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성안의 시설물은 서성에 문지 1개소, 치성 1개소, 건물지 1개소 등과 성외부에 둘렀던 해자(垓字)도 확인되었으며 유물은 통일신라시대의 새무늬와 직선무늬 기와편과 고려시대의 기와류와 토기류가 발굴되었고 성의 규모가 작고 평지성인 점과 옛 광덕현의 치소(治所)로 추정되는 원덕목에 위치한 점을 고려할 때 광덕현의 읍성(邑城)으로 비정할 수 있습니다.

농성(農城)은 안성천과 아산만이 합쳐지는 평야지대의 한가운데 있는 성산(城山) 또는 당산(堂山)이라고도 부르는 해발 24m의 낮은 구릉의 정상부에 테뫼식으로 쌓은 방형토성입니다. 쌓은 시기와 목적에 대해서는 삼국시대에 도적 때문에 쌓았다는 설, 신라말기 중국에서 건너온 평택 임씨의 시조인 임팔급(林八及)이 쌓아다는 설, 고려시대에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안의 북쪽으로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그 앞으로는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으며 문지(門址)는 동벽과 서벽의 중간부에서 확인되는데, 규모는 너비 2~10m내외이며 높이는 4~5m로 지금도 동문지와 서문지를 통해 쉽게 성내로 진입할 수 있으며 유물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기와편과 토기편이 발굴되었습니다.

무성산성(武城山城)은 무성산(武城山 104.7m)의 정상부에 축조된 테뫼식 토축산성으로 산성의 능선이 남쪽의 자미산과 이어지고 성벽은 동, 남, 북벽이 능선을 감싸 돌고 있으며 서벽은 계곡을 가로질러 축조되어 성내의 유수를 이곳을 통해 배출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성의 둘레는 547m이고, 높이는 외벽 4~6m, 내벽 1~2.5m 내외이며, 동문지(東門址)와 서문지(西門地)가 남아 있고 서벽과 북벽에는 성위에 낮게 쌓은 담인 치성이 시설되어 문지와 능선으로 인한 취약점을 보완하고 있으며 무성산 정상에 장대지가, 그 밖에 6개소 정도의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산성에 오르면 북치성에서는 북쪽의 화성군 발안지역과 서해안 남양만 지역까지 조망할 수 잇습니다. 서치성에서는 원정리 봉수대 주변과 아산만이 한눈에 바라보이고 북서쪽으로는 발안천의 옹포와 화성군의 장안포가 내려다보이며 남쪽으로는 자미산성과 비파산성이 연이어져 있는데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조성된 기와류 및 토기류 등의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용성리성지는 안중면 용성3리에 있는 토축 평지성(平地城)으로 비파산 동쪽능선에 위치하며 북벽이 약간 짧은 사다리꼴로 지형은 북고남저(北高南低), 동고서저(東高西低)이며 전체둘레는 약 449m입니다. 문지(門地)는 모두 3개소로 이중 동문지(東門址)와 서문지(西門址)는 현재도 성내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치성은 5개소가 있으며 성안의 시설물은 건물지 5개소와 수구지 1개소가 있습니다.

유물은 매우 적은 편으로 대개 고려시대 이후의 시기에 해당되는 기와류와 토기류가 발굴되었는데 용성리성지는 규모가 작고,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어 비파산성과 연계된 방어시설로 일종의 부성(副城)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자미산성((玆美山城)은 자미산(玆美山 110.8m)에 축조되어 있는 내성(內城), 외성(外城), 부성(副城)으로 이루어진 삼중구조의 복합식 성곽입니다. 정상부 주위를 토축한 내성과 정상부에서 이어지는 7~8부 능성을 따라 석축한 외성이 둘러싸고 있으며, 자미산 정상부에서 동쪽으로 뻗은 능선의 110m 거리에 토축으로 이루어진 성에 버금가는 부성이 있습니다.

자미산성은 안성천 하류와 아산만 입구의 해양방어체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북쪽으로 무성산성, 동쪽으로 용성리 강길마을성, 남쪽으로 비파산성, 용성리성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성벽의 높이는 4~5m내외이며, 너비는 5m이며 성안의 시설물로는 건물 추정지 9개소, 장대지, 추정동문지와 적대, 추정수구지, 3곳의 치성 등이 남아 있습니다.

원정리 봉수대는 아산만과 남양만을 조망하는 가장 앞에 있는 연변봉수로서 조선 초기에는 남쪽의 면천 명해산 봉수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북쪽으로 화성시 우정면 화산리 흥천산 봉수로 보내는 역할을 하였고, 중기에는 간봉인 면천 창택산 봉수와 직봉인 직산 망해산 봉수가 이곳에서 합쳐져 다시 화성 흥천산 봉수로 신호를 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평택은 삼남대로가 지나는 요충지면서 충청대로가 갈라지는 분기점으로 예로부터 역(譯)과 원(院)이 많이 설치되었습니다. 진위현에 있었던 원으로는 ‘장호원’(진위면 신리), ‘이방원’(진위면 갈곶리), ‘백현원’(白峴院 장안동과 동막 사이의 고갯길), ‘갈원’(葛院 칠원동) 등이 있었으며, 역으로는 수원부에서 세종 때 진위현으로 이속된 ‘청호역’(진위면 청호리)이 있었고, 평택현에는 ‘화천역’(팽성읍 추팔리)과 ‘상역’(팽성읍 두리)이 있었습니다.

주요 교통로가 지난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좋은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말을 키우고 역과 원을 관리하는 일은 쉽지 않았고 역과 원에 소속된 백성들의 사회적인 지위도 상대적으로 낮았을 것이며 많은 사람이 지나다녔으니 사건 사고도 끊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상황은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놓이고 신작로가 다른 곳에 생겨 기존 역로망(驛路網)이 더 이상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크게 변화했습니다.

▲평택현의 읍치구역에 있는 객사ⓒ평택시

삼국의 각축장

평택 지역은 일찍부터 백제가 차지하여 상당히 오랫동안 영향력을 유지하였지만 6~7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고구려가 장수왕대 수도를 압록강 유역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남하정책을 실시하여 475년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수도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하자 백제는 금강 남쪽 공산성으로 후퇴하였고 고구려는 한강 유역과 경기남부지역까지 진출하여 평택 지역은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들었습니다.

장수왕대 고구려 남하정책으로 지금의 평택 지역은 안성천을 기준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로 나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당시 평택은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지역이자 최전방으로서 중요성이 매우 컸으며 특히 한강 유역과 당항성(黨項城)으로 대표되는 서해연안 지역의 배후지로서 군사적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이후 평택 지역은 삼국의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신라는 7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특히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맺어 고구려로부터 한강상류 지역을 빼앗고 다시 백제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한강 하류지역과 평택 지역을 포함하는 경기 남부를 차지하면서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다시 당(唐)나라 세력을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그후 북쪽의 고구려를 공격해 수도 평양성을 함락시킨 이후 신라는 당의 세력을 한반도 남부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열었습니다.

757년(경덕왕 16) 왕권강화와 중앙집권화를 위해 기존에 사용하던 토착적인 군현의 이름을 한자식으로 바꾸는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시행하여 지금의 평택은 고구려에 속했던 부산현은 진위현(振威縣)으로 백제에 속했던 하팔현은 팽성현(彭城縣)으로 개명되었으며 평택지역 행정단위로 쓰이는 진위와 팽성의 명칭은 이때부터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고려 성종 대에 지방의 토호세력을 견제하고 중앙의 명령을 지방에까지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하여 기존의 군현제(郡縣制)를 개편하여 중앙집권적인 주현제(州縣制)를 실시하면서 전국 주요지역 12곳(양주·광주·충주·청주·공주·해주·진주·상주·전주·나주·승주·황주)에 주목(州牧)이란 외관을 파견하였는데 이때 평택 지역은 광주목(廣州牧)과 청주목(淸州牧)의 관할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 충청도에 속했던 진위현은 1398년(태조 7) 경기좌도로 옮겨졌고 8도제가 실시되어 경기좌도와 우도가 합쳐져 경기도로 개편되면서 진위현은 지금까지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는데, 본래의 진위현에 영신현(永新縣), 그리고 송장부곡(松莊部曲)과 천장부곡(川莊部曲)이 합쳐져 이루어졌습니다.

평택현은 지금의 팽성읍 지역으로 조선시대 전국 330여 군현 가운데 규모가 작은 현에 해당되며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가 조선시대에는 지금과 같이 직산천에 있지 않고 진위천을 따라 나뉘었기 때문에 주로 충청도에 속했습니다.

평택 지역의 읍치구역은 평택현과 진위현 두 곳에 있었습니다.

평택현의 읍치구역은 팽성읍 객사리로 고을의 중심에 관아시설과 향교, 객사가 있었고, 관속들과 군졸, 관아에 딸린 천민들 그리고 상공업,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팽성읍객사((彭城邑客舍)는 1488년(성종 19)에 작게 지어졌는데 현종(顯宗) 때 다시 크게 지었고, 영조(1760년)와 순조(1801년)때 중수하여 일제강점기에는 일반인에게 매각되어 양조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970년~80년대 들어 양조업이 쇠퇴하면서부터는 민간인들이 들어와 살면서 건물이 점차 쇄락해졌다가 1995년 보수, 증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는데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객사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평택향교(平澤鄕校)는 1413년(태종13)에 처음 지었는데, 병자호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여러 차례 고쳐 오늘에 이르고 대성전은 17세기 중엽에 명륜당은 19세기 말에 중수되었으며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로 대성전에는 5성위, 송나라 2현, 우리나라 18현을 모시고 있습니다.

진위향교(振威鄕校)는 병자호란(1636)때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1644년(인조 22) 현령 황종림이 명륜당을 중수하였으며, 1889년(고종 26)에 전면적인 개보수를 실시하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며 현재는 대성전,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과 동재, 서재 등이 남아있습니다.

대동법시행기념비(大同法施行記念碑)는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알리기 위해 1659년(효종10) 김육(金堉)이 죽은 뒤 충청도 백성들이 호서(湖西)에 실시한 대동법에 감사하여 그 은공을 기리며 세운 것으로 비의 본래 이름은 김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金堉大同均役萬世不忘碑)이며, 비문은 홍문관부제학 이민구(李敏求)가 짓고 의정부 우참찬 오준(吳竣)이 썼습니다.

대동법은 조선후기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였던 공납(貢納)제도를 개혁한 것으로 공납제도는 상인과 관원이 대납해 주고 막대한 이자를 붙여 착취하는 방납(防納), 생산되지 않는 공물의 배정, 공안(貢案)의 증가 등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해 농민부담을 가중시켰고 국가수입을 감소시켰습니다.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1569년(선조 2) 율곡 이이(李珥)는 <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대공수미법(貸貢收米法)을 건의하였으나 실시되지 못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부는 군량 부족에 봉착하여서 할 수 없이 공물 대신에 미곡으로 납세하도록 장려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농민의 공납 부담이 높아지면서 공납의 폐해가 다시 일어나자 새로 즉위한 광해군 때 호조참의 한백겸(韓百謙)이 대공수미법 시행을 제안하고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이를 재청하여 1608년 5월에 경기도에 한하여 실시할 것을 명하여 선혜법(宣惠法)이라는 이름으로 9월부터 실시되었습니다.

중앙에 선혜청(宣惠廳)과 지방에 대동청(大同廳)을 두고 이를 관장하였고 1623년(인조 1) 조익(趙翼)의 건의로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에도 실시되었으나 강원도를 제외한 충청도 전라도의 대동법은 다음 해에 폐지되었으며 이후에도 대동법의 확대 실시론이 간간이 제기되다가 효종 즉위 후, 김육, 조익 등이 삼남에 대동법을 시행하자고 강경히 주장하여 1651년(효종 2) 8월에 충청도에 다시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김육은 영의정, 우의정, 예조판서 등을 지낸 서인세력의 대표적인 정치가였지만 국가재정을 확충하고 도탄에 빠져 저항하는 백성들을 안정시킬 방법은 대동법의 전국적 실시에 있다는 믿음을 갖고 전국적 실시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대동법 실시에 반대한 김집(金集) 등과는 정치적 갈등이 생겼고, 이른바 산당(山黨)과 한당(漢黨)의 대립을 낳기도 하였으나 그는 죽기 직전 왕에게 올린 글에서조차 호남의 대동법 시행을 강조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의 생전에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시행되었고, 호남의 경우도 죽은 뒤 그의 유지를 이은 서필원(徐必遠)의 노력으로 실현되었고, 1678년에는 경상도, 1708년에는 황해도까지 실시되었습니다.

▲정도전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삼봉기념관ⓒ평택시

쟁쟁한 역사적 인물의 고향

평택은 임진왜란의 원균, 병자호란의 삼학사 오달제, 홍익한 그리고 독립운동가 안재홍을 배출한 고을입니다.

원균(元均)은 본관이 원주(原州)이고, 자는 평중(平仲)이며 현재 장군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평택시 도일동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날쌔고 힘이 세었다고 합니다. 자라서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이 되어 조산만호로 재직 시에 북쪽 오랑캐의 토벌에 공을 세워 부령부사(富寧府使)로 발탁되었으며 뒤에 종성으로 옮겨서 병사 이일(李鎰)을 따라 시전부락을 격파했고 1592년(선조 25)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부임한 지 3개월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군(水軍)을 통솔하는 절도사로서 옥포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적을 물리쳤으며 그 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등 여러 차례 크고 작은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597년(선조 30)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하였으며, 1604년(선조 36)에 권율, 이순신과 함께 선무 1등 공신에 봉해졌습니다.

이후 그의 묘는 임금이 녹훈 봉작 교서와 제문을 내려 봉표, 치제하도록 하였으며 현재 묘역 안에는 신도비 1개, 문인석 2기, 무인석 2개, 돌로 만든 석등이 1기, 묘비 2기가 서있고, 그가 전사하자 유품을 가지고 왔다는 애마총이 묘 아래쪽에 있고 사당도 부근에 있습니다.

문헌사(文憲祠)는 정도전(鄭道傳)의 사당(祠堂)으로 1912년 봉화 정씨 문중에서 건립하여 1930년 당시의 종가 터에 옮겨 세웠습니다. 정도전은 본관이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으로 조선의 개국공신이었으나 제1차 왕자의 난(1398년) 때에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한 뒤 모든 훈작이 삭훈되었다가, 1865년(고종 2) 9월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한양의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훈과 지위를 회복시키고 1870년 문헌(文憲)이라는 시호(諡號)와 함께 “유학으로도 으뜸, 나라에 대한 공적으로도 으뜸”이라는 뜻의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습니다.

이후, 관리를 보내 제사를 지내고, 16대손 정응기(鄭應夔)를 사손(祀孫)으로 정하여 묘를 세우고 이를 주관하게 하며 대대로 음직(蔭職)을 세습하게 하였으니 이로써 억울하게 죽은 한이 풀어지게 되었으나, 시신을 찾지 못하여 무덤을 만들지는 못했다가 1922년에 18대손이 조상의 묘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종친들과 상의하여 제사를 지내는 단을 다시 세웠습니다.

충의각(忠義閣)은 정암 조광조(趙光祖)와 삼학사의 한 사람이었던 추담 오달제(吳達濟)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웠습니다. 오달제는 1609년(광해군 원년)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으로 오윤혜(吳允諧)의 아들로 용인의 신갈이 고향이었지만 외가가 오좌동 수성 최씨로 상속받은 전장(田莊)과 집이 이충동 반지산 기슭에 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이곳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홍학사(洪學士) 비각은 삼학사의 한분인 화포 홍익한(花浦 洪翼漢)의 비각으로 1726년에 건립한 것입니다.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고 하는데 글씨가 마멸되어 내용을 알기는 어렵고 더구나 큰 비각의 비문 23행중 왼쪽 모서리가 깨어져서 1행은 소멸되었으며 달리 포의각(褒義閣)이라 부르며 본정리 마을 뒤쪽의 꽃산에 있는 선생의 묘 앞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홍학사의 시신은 구하지 못해 현재의 팽성읍 본정리에서 혼을 불러 초혼장(招魂葬)을 지내고 그의 충성과 공적을 기리고자 신도비를 세웠고 홍학사 묘에는 심양에서 입고 있던 그의 의관만이 돌아와 부인 양천 허씨와 합장되어 있습니다.

홍익한(洪翼漢)은 본관이 남양(南陽),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이며 1586년(선조19) 팽성읍 함정리에서 출생하여 서울 마포에서 자랐으며 병자호란 후 오달제, 윤집과 함께 심양으로 잡혀갔습니다. 청 태종 앞에 끌려가 준엄한 문초를 받으며 청의 신하가 되도록 백방으로 설득을 갖은 악형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내 충절을 지켜 순절하니 나라에서는 그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충정이란 시호를 내렸습니다.

안재홍(安在鴻)은 본관이 순흥(順興), 호는 민세(民世)로 1891년 고덕면 두릉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집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907년부터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단발을 하고 서울의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전신) 중학부에 들어가서 이상재, 남궁억, 윤치호 등과 교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19년부터 20여 년 동안 9번에 걸친 투옥으로 7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러야 했고,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었으며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지만 곧 사퇴했고, 그해 9월 24일 국민당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었습니다.

1950년 5월 평택군에서 무소속으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피신해 있다가 1950년 9월 21일 제자인 권태휘의 밀고로 납북되었습니다. 납북 뒤의 행적은 정확하지 않고 1965년에 죽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해방 전후 계급적 통합, 민족국가 건설을 위하여 중도 우파 노선을 실천하다 좌, 우익 모두에게 배척을 받아 역사에 묻혀버렸습니다.

이승훈(李承薰)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의 한사람으로 1791년 평택현감으로 임명됐으나 ‘진산사건’이 일어나 1785년 을사추조적발 사건을 재론하면서 이승훈을 죄인으로 거론해 1791년 4개월여 만에 평택현감에서 물러났습니다. 1792년(정조 16)에 이승훈이 평택현감 재직 시 향교의 문묘(文廟)에 절하지 않은 것을 평택 유생 조상본(趙常本), 권위(權瑋), 정언택(鄭彦宅) 등이 성균관에 통문을 보내 그의 죄상을 성토했습니다.

결국 1792년 2월 안핵어사(按覈御使)를 평택에 파견해 진상을 조사케 했는데 안핵어사로 파견된 김희채(金熙采)는 이승훈의 친척 재종(再從)으로서 이승훈이 문묘에 배례를 한 것처럼 조정에 허위보고를 하는 한편 문제를 제기한 유생들을 오히려 무고죄로 몰아 엄형에 처했는데 권위는 심문 중 형장을 맞아 사망했고 아들들 역시 역모의 죄를 쓰고 섬으로 귀양을 갔으며 홍병원(洪秉元), 조상본(趙常本​), 정언택(鄭彦宅)은 형장을 당한 뒤 귀양 갔습니다.

이후 조상본, 권위, 정언택 등은 복권돼 ‘삼정사(三正士)’라 불리었고 이들을 기리는 ‘향현사(鄕賢司)’가 세워졌습니다.

만기사(萬奇寺)는 942년(태조 25)에 남대사(南大師)에 의해 창건되어 조선 세조 때 중창하였으며, 본래 위치는 현재보다 1km정도 떨어진 동천리에 있었다고 전하며 위치를 옮긴 시점은 19세기쯤이라 하는데 정확한 사유는 알 수 없습니다. 절 경내에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의 수법으로 판단되는 석조여래좌상이나 석등의 부재들이 흩어져 있는 점으로 이 절의 창건시기를 미루어 알 수 있게 하며 대웅전에는 고려 초기의 전형적인 철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심복사(深福寺)의 고려시대 창건하고 창건자는 미상이며 능인전에 봉안된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고려 말에 파주군 몽산포에 살던 천노인(千老人)이 덕목리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이라고 전하며 불상을 모실 곳을 찾아 광덕산으로 올라가는데 지금의 심복사 자리에 오자 갑자기 무거워져 이 불상의 인연처라 생각하고 봉안하기로 하였답니다.

▲24m 높이의 당산에 토성으로 쌓은 농성ⓒ평택시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따뜻한 차림, 보온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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