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 전 대표가 웃었다. 지난 16일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의원 총회 도중이었다. 새로운 원내대표를 선출하는 이 자리에서 이 전 대표는 정진석 전 원내대표 옆에 앉아 정 전 원내대표 팔을 잡고 참는 웃음을 터뜨리는 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파안대소하고 싶었을 게다. 알다시피 이날 '친박'과 '비박'이 한판 붙어 친박 대표 선수인 정우택 의원이 승리했다.
많은 이들에게 이 전 대표의 웃음이 마뜩치 않았겠지만, 어떤 이들에겐 공감이 갈 수도 있었겠다. 당장 친박과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는 정 전 원내대표마저 정도 차이가 있지만, 함께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국민정서상 웬만하면 웃음을 참으려만, '이정현'이 웃음을 참지 못한 데는 근본적으로 현 시국을 보는 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이정현을 비롯한 서청원, 최경환 의원 등 친박은 부분적으로 잘못을 인정하지만, 적어도 비박에 대해서는 '도덕적' 우월감을 갖고 있어 보인다. '친박'이란 명칭이 시사하듯 이 전 대표는 '배신의 정치'를 경멸한다. 박근혜 씨가 임기를 마치는 것까지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에, 박 씨가 스스로 임기 단축을 선언한 만큼 질서 있는 퇴진을 가능케 하는 것이야말로 최소한의 도리라고 판단할 법하다.
'염량세태'에 반하는 이정현의 '충직'은 어쩌면 이른바 보수세력에게서 칭송의 대상이 되었을지 모른다. 사실 친박과 비박은 공통분모인 '박'을 끼고 있기에 '친'이든 '비'든 '박'을 허무는 순간 존립의 근거가 사라지게 된다. 비박은 전향한 부역자 집단이라기보다는 부역자 집단 내의 좋게 말하면 역성혁명, 친박의 입장에서는 반란군에 불과하다. 비박의 핵심이 박근혜 정권의 부역자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비박이 전향한 것도 아니다. 전향은 응당 이념적 변화를 의미해야 할 터인데, 비박은 여전히 친박과 동일한 이념집단에 속한다. 단지 우두머리를 누가 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기에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친박이 그 집단 내에서 도덕적 우위를 점할 수 있고 정 원내대표의 선출은 그러한 심리의 반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최근 언론의 정당지지도 조사에서 새누리당 분당 시 지지 정당을 물은 결과 이정현·최경환 중심의 친박계 정당과 김무성·유승민 중심의 비박계 정당이 공교롭게도 12.6% 동률을 기록했다. 일반의 시각으론 '도긴개긴'이란 뜻이다. 특히 새누리당 지지층에서 친박계당 지지율(54.0%)이 비박계당(25.4%)보다 훨씬 높았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한다.
물론 비박에게는 명분이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절대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정치의 본령임을 내세울 것이고 맞는 얘기다. 한때 지지한 자신이 속한 정파의 지도자가 국민의 뜻을 배신하였다면, 개인적 신의를 저버리는 한이 있어도 국민의 편에 서는 게 맞는다고 주장할 것이고 타당한 논리다.
그러나 정치는 '책임'이다. 만일 자신이 속한 정파가 국민의 뜻을 심각하게 거스르는 잘못을 저질렀다면 또 그 지도자가 그 잘못을 저지르는 데 많든 적든 일조하였다면, 그 지도자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 그쳐서 될 일이 아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도 반성하고 사죄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잘못이 중하다면 자신이 공격한 지도자와 함께 물러나는 게 가장 합당한 처신이다. 나는 비박 중에서 반성하거나 사죄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단지 친박을 탓하며 '최순실 8적' 물러나라고 공박할 뿐이다.
이 전 대표와 같은 친박이 보기에 비박의 이러한 행태는 가소롭기 그지없다. 한마디로 '배신의 정치'다. 그러나 이정현의 도덕적 우월감은 그릇된 인식에 근거한다. 즉 이 나라는 조선 같은 왕조 국가가 아니고 명목상일지라도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인데, 이정현은 여왕을 섬기는 신하와 같은 태도로 일관했다. 자명한 사실로, 민주공화국의 헌법기관인 국회의원 이정현은 국민을 배신할 수밖에 없게 되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결국 친박과 비박 모두 '배신의 정치'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뒤늦게라도 국민을 배신하지는 않기로 선택한 비박이 친박보다는 살짝 덜 추한 정치를 하고 있는 셈이다. 김무성 의원이 할 일은 대선 불출마 선언이 아니라, 사태 수습 후 정계 은퇴 선언이었어야 한다. 유승민 의원은 적어도 진심으로 국민에게 사죄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어야 한다.
친박의 선택지는 더 분명하다. '8적'이든 몇 적이든 친박 핵심은 박근혜 씨와 정치 생명을 같이해야 한다. 이 전 대표가 질서 있는 퇴진에 박 씨뿐 아니라 자신을 포함시켰다면, 그는 자신이 추종한 지도자와 국민 모두를 배신하지 않는 훌륭한 정치인으로 기억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너무나 현실성이 떨어지는 망상에 불과하다.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삼척동자도 안다.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이정현'은 '박근혜'를 넘어 독자 생존을 모색한다. 그가 소위 '배신'을 배제한 까닭은 그것이 그에게 가장 적합한 생존법이었기 때문이다. 충신 놀이를 통해 그는 박근혜의 시체를 넘어 오래오래 살아남기를 모색한다. 솔직히 말하면 애초에 충신은 없었다. 다른 친박 핵심처럼 이정현은 박근혜 혹은 국민에게 충성하는 대신 자신에게 충성했을 뿐이다. 배신도 없었다. 애초에 신뢰 같은 게 있었을 리 만무했으니 말이다. 헌법기관으로서, 정치인으로서, 혹은 그나마 박근혜의 충견으로서도 이정현은 끔찍하게 좌초했다. 그러나 인간 이정현은, 연민과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리얼리즘의 완벽한 전형으로서 서글픈 소묘로 친근하다. 그는 역사의 인물로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그날의 웃음도 마찬가지다.
윗글은 지난 10월 새누리당 이정현 전 대표의 단식을 비평한 '이정현을 위한 변론'에 이은 두 번째 글입니다. (☞ 바로 가기 : '개그맨' 이정현을 위한 변론)
(안치용 가천대학교 저널리즘MBA 교수는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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