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지난 16일 국회 외교·통일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남북 정상회담의 합의인 6·15선언과 10·4선언에 대해 "남북관계의 기본방향 등을 담은 정치적 선언의 성격으로, 국회의 비준을 받은 문건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언론은 이를 두고 현 장관이 남북간 합의를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 것으로 해석했다. 하긴 그렇게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지난해 3월 26일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본부에서 있었던 통일부 업무보고에서의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과 비교해보자. "남북 기본합의서가 1991년 체결돼 1992년부터 효력이 발생했고 북한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후 남북 정상이 새로 합의한 합의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91년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신을 지키는 것이다."
현 정부의 기본 입장은 남북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는 인정하되, 6·15선언과 10·4선언에 대해서는 완곡하게 회피하는 태도다. '이행 방안에 대한 남북간의 합의가 필요하다'는 식이다.
남북기본합의서, 국회비준 받은 적 없다
남북기본합의서는 어떻게 해서 정치적 선언을 넘어선 실효성 있는 문서로 인정될 수 있을까? 남북기본합의서는 국회의 비준을 받은 문건일까? 남북기본합의서건 6·15선언이건, 어느 것도 국회의 비준을 받은 적은 없는데, 어떻게 해서 남북기본합의서는 인정이 되고 6·15선언은 에둘러 회피되어야 하는가.
물론 남북기본합의서가 남북간에 발효된 사실은 있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의 재가는 있었을 뿐, 국회의 비준은 없었다. 그렇다면, 국회의 비준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남북기본합의서도 원인무효이고 단순한 선언에 불과하다고 주장해도 무방한가.
남북관계 기본서라 할 수 있는 임동원 전 장관의 회고다.
"남측은 국회비준동의절차에 대한 언급 없이 단순히 '국가원수인 노태우 대통령께서 재가하여 발효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완료하였음을 알린다'는 내용으로 돼 있었다. …
남측의 경우, 남북기본합의서는 국회의 비준동의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처음에 정부는 '국민의 기본권과 관련된 중대한 합의사항이며 국제조약 못지않게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합의서이므로 국회의 비준동의를 원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국회의원 총선거(3. 24)를 앞두고 있었고, 또한 특정 문제를 둘러싼 여야 간 대립으로 국회를 개원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자 정부는 '대통령재가'로 비준절차를 끝내는 수밖에 없었다. 국회의 동의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야당인 민주당의 요구에 대해서는 '남북합의서는 국제적 조약이 아니므로 국회비준이 불필요하다'는 논리를 폈던 것이다" (임동원, 피스메이커 245-246면)"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간의 관계를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우리 헌법재판소는 남북기본합의서를 "한민족 공동체 내부의 특수관계를 바탕으로 한 당국간의 합의로서, 남북 당국의 성의 있는 이행을 상호 약속하는 일종의 공동성명 또는 신사협정에 준하는 성격"으로 규정한 바 있다. (1997년 1월 16일 92헌바6)
또한 대법원도 남북기본합의서를 "법적 구속력은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를 국가간의 조약 또는 이에 준하는 것으로 볼 수 없고, 따라서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이 인정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1997년 7월 23일 98두14525) 그런데 왜 남북기본합의서의 법적 성격은 인정하고 6·15선언에 대해서는 부정해야 하는가.
핵심은 '이중잣대'
남북간 합의에 대해 헌법적·법률적 차원의 논쟁이 있긴 있다. 통일부도 이제야 '통일법제 기반구축 기본계획(안)'을 마련해 최근 국회에 보고한 바 있다. 이 계획안은 1단계로 '남북합의서 등 남북관계 법제 정비·구축' 방안을 모색한다고 했다. 그만큼 필요성과 시급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남북합의서의 법적 성격과 효력에 대해 법률적·정치적 논쟁만 있었을 뿐, 헌법적 차원의 준비는 턱없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논의만 무성했고 결론은 없었다. 그리고 정략적 접근만 난무했다. 국회비준 동의 여부를 필요에 따라 정치적으로 활용했던 게 사실이다.
실정법 차원에서는 2005년에야 제정된 '남북관계발전에 관한 법률'이 남북간 합의에 대한 체결 비준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도 국회 비준절차에 대해서는 특별한 규정 이 없는 셈이다. 일반 조약과 마찬가지로 헌법절차에 의존하고 있다. 법 제21조 3항은 "국회는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남북 합의서 또는 입법사항에 관한 남북합의서의 체결 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고 정했다.
따지고 보면, 일반조약과 마찬가지로 국회비준동의를 받을지 말지 여부가 행정부 손에 실질적으로 맡겨져 있는 셈이다. 그런데다 정부가 국회동의를 늘 소극적으로 접근하다보니 이 문제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법 이전에 발효된 남북간 합의에 대해서는 법이 없었기에 논쟁의 대상이고, 이 법 이후에 합의된 10·4선언은 비준 여부의 판단을 정부가 소극적으로 행사했기에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간의 남북간 합의를 남북기본합의서가 정한 특수관계라는 성격을 인정하고, 정치적 합의에 대해 계승하면 특별한 문제가 생길 리 없다. 그렇다고 북한을 나라로 보고, 국가 대 국가 간의 조약으로 규정하기도 국내 형편 상 쉽지 않고, 역으로 북한을 순전히 내부관계로 보거나 반국가단체로 보고 남북관계를 규정하기도 결코 쉽지 않다. 남북갈등보다 남남갈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성균관대 김일영 교수나 정일영 연구자는 남북간 합의문서에 대해 '남북간 상호성을 구현하고 조정기구를 실효적으로 구성하며, 국회 동의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고, 국제적으로 인준받자'는 안을 내놓기도 했다.
남북간 합의에 대한 국회 비준여부가 헌법적·정치적 쟁점이 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는 것은 인정하자. 그렇다고 자의적인 잣대로 '이것 따로 저것 따로'식으로 되어서는 곤란하다. 현 장관은 6·15선언이 국회비준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았을지 모르나, 남북기본합의서가 국회비준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사실은 몰랐거나 애써 외면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중성이다. 지난 10년을 부정하고 싶은 데에서 비롯됐다는 점, 알만 한 사람은 다 안다. 이런 방식의 접근이야말로 분단체제를 고착시킨다. '통일지향적 평화 프로세스'의 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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