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의 12월 제38강, 올해의 마지막 강의는 <송년특집>으로 비류백제(沸流百濟)의 도읍지인 미추홀(彌鄒忽)이면서 서구세력의 근대화 파고를 고스란히 받아 안았던 개항의 현장, 인천을 찾아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38강은 2016년 12월 25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30분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7시 2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계양IC-부평읍치구역(계양산성/부평도호부청사/부평향교/어사대/욕은지)-부평역사박물관-개항장구역(인천개항박물관/근대건축전시관/인천광역시역사자료관/구제물포구락부/청일조계지경계계단/삼국지벽화거리/짜장면거리)-점심식사 겸 뒤풀이-원인천읍치구역(문학산성/인천도호부청사/인천향교)-논현포대-장도포대지-서울의 순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38강 답사지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인천(仁川)’ 지명의 유래
인천(仁川)은 백제 초기에는 도읍지인 미추홀이었고 고구려 장수왕 때(475) 매소홀현(買召忽縣)이었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 때 한자식으로 바뀌어 소성현(召城縣)이 되었습니다. 1095년(고려 숙종)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된 뒤 1133년(인종 11) 순덕왕후 이씨의 내향이라 하여 인주(仁州)로 다시 승격되었는데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인주 이씨가 몰락하여 강등되었으나 1390년(공양왕 2)에 이르러 다시 경원부로 환원되는데 이는 ‘칠대어향(七代御鄕)’이라 하여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동안 고려왕실과 관련이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경원부는 다시 인주로 환원되었으나 태종 13년 주(州)자를 가진 도호부 이하의 군, 현을 산(山), 천(川) 두 글자 중 하나로 개정토록 하여 경원부의 옛 이름인 인주(仁州)에서 ‘인(仁)’자와, 행정구역 개편 원칙에 따른 ‘천(川)’자가 합해져서 ‘인천(仁川)’이라는 지명이 탄생하였습니다.
인천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동틀 무렵, 이미 한반도 서해안 지역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강화도를 비롯한 인천 지역 곳곳에서 구석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고, 이들의 사회, 문화적 유산은 신석기, 청동기시대를 거치는 동안 날로 새롭게 축적, 확장되어 기원 전 1세기 경에는 ‘미추홀(彌鄒忽)’을 건설할 수 있는 기반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강 중류에서 백제가 세력을 떨치고, 대동강 유역에 고구려가 자리잡자 인천은 점차 그 독자적 세력을 잃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끝내 백제와 고구려의 군, 현으로 편입되었으며 해상으로 중국과 교통할 수밖에 없었던 백제가 수도를 공주로 옮길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인천은 능허대(凌虛臺)를 항구로 하는 대외교통의 창구가 되었습니다.
이후 대동강과 원산만을 연결하는 지역까지 그 영토를 넓힌 통일신라는 중국과의 해상교통의 거점을 남양만(南陽灣)으로 옮기고 인천에는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하여 외침의 방어와 함께 해상교통의 안전을 기하는 군사기지로 삼았습니다.
해로를 통한 대외무역에서 뛰어난 활동을 보였던 고려는 개성에 이르는 수로인 예성강 입구에 위치한 강화, 교동, 자연도 등을 중심으로 대외교통의 거점을 개발하는 한편, 이를 군사적, 경제적으로 지원하면서 수도 개성의 남쪽을 방어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수주(樹州. 지금의 부평)에 설치하고 원인천(元仁川)인 소성현(邵城縣)과 시흥, 양천, 통진, 김포 등을 예속시켰습니다.
조선은 성리학(性理學)을 건국이념으로 하고 사회적으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체계를 확립하여 대내적으로는 자급자족적인 토지경제와 유교적인 교화에 힘쓰고, 대외적으로는 해금책(海禁策), 곧 쇄국정책을 폈기에 서해의 해상교통이 전면 금지되었음은 물론, 외국인의 왕래가 극도로 규제되었고, 귀화하지 않은 외국인들은 모두 추방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신의 왕래와 대외무역으로 번성하였던 인천은 그 기능을 상실하면서 평범한 농, 어촌으로 변모하였고 이러한 조건 속에서 고려 왕실의 잔재 청산과 중앙집권의 강화에 맞물려 경원부는 인천군(仁川郡)으로 강등, 축소되고, 강화, 부평 등도 군사적 의미만을 지니는 일개 도호부(都護府)로 전락하였습니다.
왜란(倭亂)·호란(胡亂) 뒤 국방상 요충지로
그러다가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을 연달아 겪으면서 인천은 또다시 국방상 요충지로 부상하게 되었는데 일본의 침입을 받을 경우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을 보장처(保障處)로 하고, 대륙세력의 침입을 받을 경우에는 강화도를 보장처로 한다는 전략이 수립되면서 남한산성의 경영과 함께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인천 해안지역의 방어체제와 시설이 새롭게 보강되었습니다.
이후 17세기 말엽에 인천은 강화를 중심으로 군사기지로 변모하면서 왕실의 보장처로 자리잡게 되었으나 이러한 변화는 어디까지나 행정과 군사편제상의 변동이었을 뿐 이 지역의 사회구조나 주민생활에 특별한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고려 강도(江都)시절부터 추진되었던 강화도의 갯벌 매립사업이 한층 확장되어 오늘날의 강화평야를 이룩하는 지형적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미 중국과 일본에 진출했던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조선에도 통상(通商)을 요구해 오자, 이들 군사시설은 보장처의 수호보다는 서양세력의 진입을 저지, 차단하는 최전방 방어시설로 기능하게 됩니다. 조선에 진출하려는 서양세력의 끈질긴 시도와 이를 저지하려는 조선의 해금책은 끝내 인천 주변의 연안에서 군사적 충돌로 이어져,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일으켰습니다.
프랑스와 미국의 침공을 물리친 조선정부는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였으나 일본의 강압과 국내 정세의 변화로 끝내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강화도수호조약)가 체결되자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서둘러 미국을 비롯한 구미 열강들과의 수호통상조약을 서둘렀는데 원인천(元仁川)은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면서 ‘제물포 개항’이라는 문호개방의 최전방이 되었습니다.
조정은 이들의 조선 진출을 개항장에 국한시키고자 1883년 제물포에 인천해관(海關)과 인천감리서(監理署)를 설치하였고, 이후 각국 영사관과 전관조계(專管租界) 및 공동조계(共同租界)가 들어섰습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각국의 상, 공업시설과 종교, 교육, 문화시설들도 설립되어 비로소 서해를 통한 외국과의 해상교통이 폐쇄된 지 500년 만에 다시 인천이 국제적 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을 치르면서 한국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확보한 일본은 우선 제물포와 한성(漢城)을 잇는 도로와 철도를 부설하고 이들과 연계되는 항만의 확장, 수축에 착수하였고 이어서 식량(쌀)과 공업원료(주로 목면)를 확보하기 위한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 수리조합(부평수리조합) 설립 등을 추진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인천부는 일본인 시가지를 중심으로 부역(府域)이 크게 축소되었고, 나머지 농어촌 지역은 부평을 중심으로 신설된 부천군(富川郡)에 편입되었으며 각국 공동조계와 청국전관조계는 모두 철폐되고, 하부 행정조직도 모두 일본식으로 바뀌어 완전히 일본인 도시로 변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경영이 강화되고 대륙침략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이주자들이 늘자 공업단지와 거주지를 새로 건설하였고 김포평야, 부평평야를 절대 농지로 만들어 식량공급기지로 삼았는데 그 결과 인천부는 옛 인천도호부의 부역(府域)과 부평군의 일부까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문학산성(文鶴山城)이 ‘미추홀고성(彌鄒忽古城)’
문학산성(文鶴山城)은 문학산 정상의 봉우리를 테뫼식으로 둘러쌓은 석축산성(石築山城)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성은 달리 ‘미추홀고성(彌鄒忽古城)’ ‘남산고성(南山古城)’이라 부르는데 성의 둘레는 내성이 100m, 외성이 200m이고 성 안에는 비류정(沸流井)이라는 우물과 봉수대(烽燧臺)가 있었으며 현재 대부분의 성벽이 붕괴되어 그 모습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동사강목(東史綱目)>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 따르면 이곳은 고구려 동명왕의 둘째아들 비류(沸流)가 조성한 도읍지로서 석성 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형인 비류가 이곳에 정착하여 미추홀(彌鄒忽)이라고 명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인천광역시의 최초의 명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인천부사 김민선(金敏善)이 옛 성을 수축하여 지키면서 여러 차례 왜적을 무찌르다가 병으로 죽자 김찬선(金纘善)이 이어받아 끝까지 성을 지켰으며, 동문 밖 100여 보 되는 곳에 왜군이 쌓은 성터가 있다고 합니다.
성벽의 길이는 577m이고, 이 가운데 현존하는 부분은 339m나 되며 이 중 육안으로 성벽을 알 수 있는 부분은 220m인데, 성벽의 높이는 약 1.5m∼4m로 남아 있으며 성벽은 장방형의 면을 갖도록 수평고임 쌓기를 하였고 성벽의 외측 기단 아래는 2∼3단을 안쪽 방향으로 10∼15㎝씩 들여쌓았는데 성에는 동문과 서문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졌으며, 동쪽에 작은 수구(水口)가 남아 있습니다.
정상의 동측 아래로 김민선을 모신 사당인 안관당(安官堂)이 있었으나 없어졌고, 성안에서는 삼국시대 이래의 토기편과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으며 규모가 작은 문학산성에서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친 것은 역사상 특이한 예로서 중요한 의미가 갖습니다.
계양산성(桂陽山城)은 계양산 정상부의 동남쪽 능선 아래를 테뫼식으로 쌓은 석성으로 달리 고산성이라고도 부르며 성을 쌓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현재는 대부분의 성곽이 훼손된 상태이며 성의 둘레는 1,180m입니다.
산성의 동쪽 지봉 능선부에서 부평 고읍 쪽으로 석축이 무너진 상태로 군데군데 터가 남아 있으며, 김포군과 경계를 이루는 장명이 고개 남동쪽의 중심성(衆心城)과 함께 김포에서 부평으로 통하는 고갯길의 요새를 진정(鎭定)하는 위치에 축조되어 있는데 삼국시대부터 있어온 성터로 여겨지며,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 때 명군(明軍)과 왜의 고니시(小西行長) 군대가 치열한 싸움을 하였던 곳이라는 얘기가 전해옵니다.
계양산(394m)은 옛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의 진산으로 경인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달리 안남산(安南山)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산에 있는 만일사(萬日寺)에는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의 시가 전해지고 있으며 그의 <망해지(望海誌)>에 있는 기문(記文)에는 이곳에서 인천과 통진이 모두 조망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능허대(凌虛臺)는 백제가 372년(근초고왕 27)부터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문주왕 1)까지 사신들이 중국 동진(東晋)을 왕래할 때 출항하던 곳입니다. 당시 백제의 정치 상황은 고구려, 신라와 적대관계에 놓여 있었으며, 중국도 남, 북조(南, 北朝)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중국 남조와 교류하고 있던 백제 사신들은 고구려를 거쳐 가는 육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이곳 능허대를 통해 산동반도의 등주와 내주에 이르는 뱃길을 이용하였습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아파트와 유원지가 개발되어 도심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 이곳에는 작은 정자와 연못이 있고 연못에는 인공폭포와 분수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기본적인 지방행정기구는 도(道)인데 경기도의 경우, 3개의 목(牧)과 8개의 도호부(都護府), 10개의 군(郡)과 12개의 현(縣)이 있었습니다. 8개의 도호부 가운데 인천도호부와 부평도호부가 포함되며 인천이 도호부로 승격된 것은 1459년(세조 5)으로 세조의 비(妃)인 자성왕후 윤씨의 외향(外鄕)이기 때문입니다.
인천도호부구역은 승학산에 기대어 있고 부평도호부구역은 계양산 아래 펼쳐져 있습니다.인천도호부 청사의 건축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객사(客舍)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지붕의 기와에서 ‘강희(康熙) 16년’이라는 명문(銘文)이 나온 것을 볼 때 1677년(숙종 3)에 중수된 것으로 보이며 인천도호부의 건물 구성은 1899년에 발간된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문학초등학교 내에 위치하고 있어 출입과 관람이 자유롭지 못하며 인천향교 옆에 세워진 인천도호부 청사 재현물(再現物)로 대신하여 관람할 수 있습니다.
부평도호부 청사에는 중심업무를 보던 동헌, 관리나 외국사신이 묵던 숙박시설인 객사, 죄를 다스리던 포도청 등 수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이곳에 부평초등학교를 세우면서 현재 건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을 헐어버렸습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원래 ㄱ자형이었으나 1968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ㅡ자형으로 개조한 것으로 이 건물은 예전 형태로 보아 동헌(東軒)이나 현감의 살림채였던 내아(內衙)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인천향교(仁川鄕校)는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5세기 중반에 수리하였다고 전하고 지금 남아있는 주요 건물은 조선 후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1976년에 대성전, 명륜당, 삼문 등을 고쳤고 현재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등이 남아있으며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고 있습니다.
부평향교(富平鄕校) 1127년(고려 인종 5)에 계양산 아래 창건한 후 병자호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지금의 건물은 18세기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고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무, 동무, 내삼문 등이며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어사대(御射臺)와 욕은지(浴恩池)는 정조가 남긴 유적
어사대(御射臺)와 욕은지(浴恩池)는 1797년(정조 21) 정조가 김포의 장릉(章陵)을 참배하고, 부평을 경유하여 생부를 모신 수원 현륭원(顯隆園)에 갔다고 전해지는데 이때 부평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이곳에서 활을 쏘고 손을 씻은 곳입니다. 원래는 다른 곳에 있던 것을 1887년(고종 24)에 새로이 고쳐 지으면서 부평초등학교로 옮겼습니다.
욕은지는 돌을 쌓아 가로 18m, 세로 16m의 크기로 만든 연못으로, 가운데에 둘레 7m의 돌산을 만들어 풀과 나무를 심고 다리를 만들어 남쪽과 연결하였고, 연못 동쪽에 쌓여진 돌 가운데에는 고종 24년에 고쳐지었다는 기록을 새긴 돌이 끼어 있습니다.
인천은 서구세력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개항(開港)의 현장인 만큼 그들을 막아내기 위한 해안방어시설이 많이 구축되었습니다.
화도진((花島鎭)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고 나서 경기 연안의 방어시설을 강화할 필요성을 절감한 조정의 명을 받은 어영대장 신정희(申正熙)와 강화유수 이경하(李景夏)가 구축한 것입니다. 축조된 후 인근에 설치되어 있던 묘도포대, 제물포대 등이 함께 화도진(花島鎭)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1894년 갑오개혁 때 진이 철폐되고 건물도 철거되었다가 1982년 화도진을 그린 <화도진도(花島鎭圖)>를 보고 옛 건물을 복원하였습니다.
화도진은 1882년 5월에 한미수호통상조약, 6월에 한영수호통상조약, 한독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역사적인 장소인데, 진(鎭)은 진영(鎭營)을 줄여 부르는 말로 지방의 군사를 관리하던 지방관제의 하나입니다. 화도진은 조선 후기 자주 나타나는 서구의 함선을 감시하기 위해 군대가 주둔하던 곳으로 장도포대와 논현포대를 관장하였습니다.
논현포대(論峴砲臺)는 인천으로 들어오는 서양인들의 배를 막기 위해 1879년(고종 16)에 쌓은 포대로 화도진의 관할 하에 있었습니다. 인천 연안은 강화의 바닷길을 통해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많은 포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논현포대만 남아있고 현재 2개의 대포자리가 있으며 논현동의 호구포(虎口浦)에 있다고 달리 호구포포대라고도 합니다.
장도포대지(獐島砲臺址)는 조선 말기에 외국 선박들이 인천 연안인 소래 수로로 침입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포대로, 화도진과 연희진 등 2개의 진과 묘도, 북성, 제물, 호구포대와 함께 축조되었으며, 화도진 관할 하에 있었는데 지금은 포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문헌에는 포좌 3기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달리 ‘댕구산포대’라고도 부릅니다.
장도포대가 있는 언덕을 ‘노루목’ 또는 ‘노렴’이라고 부르는데, 모양이 노루를 닮아서 붙여졌다고 전해지며, 장도포대의 포 배열은 2문은 바다 쪽인 만수천, 장수천, 은행천, 내하천의 물이 모여 소래포구 앞에서 바다로 흘러드는 하천인 뱀내 하구 쪽을 향하고 있으며, 1문은 동남쪽을 향해 있어 내, 외의 수비를 목적으로 설치하였던 것 같습니다.
<화도진도(花島鎭圖)>에는 묘도 북변포대(5문), 묘도 남변포대(5문), 북성곶 북변포대(5문), 북성곶 남변포대(5문), 제물포 북변포대(8문), 제물포 남변포대(5문), 호구포포대(2문), 장도포대(3문)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개항의 현장이었던 만큼 근대문명의 유물 즐비
개항의 현장이었던 인천은 근대문명의 유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수준원점(水準原點)이란 우리나라의 국토 높이를 측정하는 기준점으로, 평균 해수면과의 차이를 측량하여 1963년 육지에 설치해 놓은 시설물입니다. 강원도 설악산과 제주도 한라산의 높이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이 수준원점이 있기 때문이며 둥근 받침돌 위에 화강석으로 된 육면체의 설치대를 얹고 그 위에 자수정으로 수준원점을 표시하였으며, 전국의 수준점을 정할 때 높이 기준이 되는 이 수준원점의 높이는 26.6871m입니다.
팔미도등대는 무의도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로서 서, 남해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여 지정학적으로 해상교통 흐름의 중심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며 1894년 공무아문이 설치되고, 1902년 소월미도, 북장자서, 백암등표와 함께 건축에 착수하여 1903년에 준공되었으며, 같은 해 6월 1일 국내 최초로 점등되었습니다.
‘용동(龍洞) 큰우물’은 1883년(고종 20) 인천항의 개방과 함께 만들어 놓은 우물로, 오랫동안 이곳 주민의 생활용수와 식수원이 되어 왔으나, 수도의 보급으로 지금은 사용되지 않아 우물의 형태만 그대로 남아 있는데, 우물 안은 자연석과 다듬은 돌로 둥글게 쌓아 원기둥을 이루고 땅 위로 보이는 윗부분은 둥근 형태의 콘크리트로 되어있습니다.
청일조계지경계계단(淸日租界地境界階段)은 1883년 일본조계(租界)를 시작으로 1884년 청국조계(租界)가 설정되는 경계지역으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약 120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조계지경계계단은 중앙에 석조계단이 형성되어 있고, 양단을 중심으로 급한 경사인 점을 감안하여 계단참을 두고, 조경식재 공간을 마련하여 공간의 이용적 측면과 인천항 경관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대화조(大和組)사무소’는 개항기에서 일제강점기 동안 인천항에서 조운업(하역업)을 하던 하역회사 사무소 건물입니다. 근대 일본 점포겸용주택의 하나인 정가(町家. 마찌야) 유형의 건물로 인천 일본조계지에 현존하는 유일한 정가양식 건물로서 건축사적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하역노동자의 노동력 착취의 현장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구 일본우선(郵船)주식회사 인천지점’은 개항 이후 인천의 해운업을 독점했던 회사로서 1888년 건립되었으며 지금 남아있는 우리나라 근대 건축물 중 상당히 오래된 것입니다. 종교시설과 공공시설이 아닌 민간 소유의 건물이 이렇게 원형으로 남아있는 것은 드물며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평면을 단일 트러스로 구성하였고, 천장 위에는 중요 물품을 보관하기 위한 목재함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구 일본 제58은행지점’은 일본 오사카에 본점을 둔 제58은행의 인천지점으로, 후에 여러 은행들과 합쳐져 야스다은행으로 바뀌었다가 광복 후 조흥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1958년 새로 건물을 짓고 옮겨가자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인천중구요식업조합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2층에는 보기 드문 발코니와 지붕창이 특징이며 지붕이 2중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어, 프랑스 분위기를 자아내는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입니다.
‘구 인천 일본제일은행지점’은 1899년(광무 3)에 일본인 니이노이에 다카마사가 설계하여 지은 석조건물로 모래, 자갈, 석회를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건축 재료를 일본에서 직접 가져와 만들었다 합니다. 현관은 반원의 곡선형으로 중앙에 두고 그 위로 르네상스풍의 작은 돔을 올려서 좌우대칭으로 꾸몄고 바깥벽은 화강암을 다듬어 쌓았고 지붕의 꼭대기 부분인 용마루에는 장식창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인천우체국’은 1924년 일제시대에 지은 건물로, 당시 유행하던 절충주의 양식을 단순화한 것으로 입구 양쪽에 큰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기둥머리 없는 작은 기둥을 여러 개 받쳤고 윗부분에는 둥근 돔 모양의 탑옥을 올려놓은 것이 일반적인데 이 건물에서는 생략하였습니다.
‘구 제물포구락부’는 인천에 있던 외국인들의 사교장으로 쓰기 위해 1901년(광무 5)에 지은 것으로 1913년 일본제국 재향군인회 인천연합회 소속의 정방각으로 불리다가, 1934년 일본부인회, 광복 직후에는 미군장교클럽, 1947년부터는 대한부인회 인천지회가 각각 활용하였으며, 1952년 시의회, 교육청, 박물관이 함께 사용하다가, 1953년 의회와 교육청이 이전한 후 1990년 인천시립박물관도 이전하였고 2007년 6월 리모델링 작업을 거쳐 ‘구 제물포구락부’의 모습을 복원하여 스토리텔링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공화춘(共和春)’은 1908년 무렵 개항 이후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중국인이 지은 중국요릿집으로 중국 산동지방의 장인이 참여하여 지은 중정형(中庭型)의 중국식 건물입니다. 현재 정면은 다양한 색깔의 타일로 마감하였고, 내부는 다양한 문양과 붉은 색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는데 처음에는 무역상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으로 이용되다가 중화요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음식점의 공간이 확대되어, 대형 연회장을 갖춘 유명한 중국요릿집으로 1980년대까지 그 명성을 날렸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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