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박정희', '문화융성의 어머니'를 꿈꿨으나, 국민들에 의해 사실상 '탄핵' 상태로 접어든 박근혜 대통령.
민심에 떠밀려 두 번의 (성의 없는) 대국민 사과를 통해 검찰 수사를 받겠다고 약속했으나, 변호사를 선임하더니 돌연 약속을 뒤집고 '청와대 농성'에 들어갔다. JP(김종필)가 "박 대통령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쁜 점만 물려 받아, 5000만 명이 물러나라 해도 절대 안 물러날 것"이라고 한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한국 현대사를 넘어 세계사에도 남을 만한 도심 한복판의 '100만 촛불 집회'가 말하는 것은 '변화'다. "이게 나라냐"는 분노와 탄식을 넘어 "바꿔야 한다"는 의지가 대규모 평화 시위를 촉발했다.
87년 6월 항쟁을 경험한 세대인 정태인 칼폴라니 경제연구소 소장과 '2세대 진보정치'를 말하는 조성주 정의당 미래정치센터 전 소장과 대담을 마련한 목적은 세대와 지역, 정치적 성향을 뛰어넘은 거대한 '촛불 민심'이 명령하는 '변화'를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서다. '박근혜 퇴진'과 함께, '박근혜 이후'를 준비해야하기 때문이다.
1987년과 2016년의 가장 큰 차이는 국민들이 정치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앞날을 맡기겠다는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가 아닌 다른 정치인(또는 검찰 등 권력기관)도 이 거대한 민심을 거스를 경우, '탄핵'될 수 있다. '헬조선'의 쓰레기통에서 피어난 '100만 송이 장미'는 대한민국 탄생 이후 70여 년간 여망 해온 '민주공화국'으로 가는 마지막 희망일 수 있다.
정태인 소장과 조성주 전 소장의 대담은 전홍기혜 편집국장의 사회로, 지난 15일 프레시안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대담 전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전체가 오컬트"
전홍기혜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한 달째 계속되고 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기 무섭게 새로운 의혹이 쏟아진다. 이 국정농단 사태의 핵심은 무엇일까?
조성주 :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5선 국회의원에 정당대표까지 경험했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보니, 박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핵심은 박 대통령은 민주주의에 전혀 맞지 않는 지도자라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이번 사태는 87년 민주화 이후 발생한 청와대 발 게이트의 '종합판’을 보여줬다. 박 대통령은 입법부·사법부·행정부를 초월해 모든 권력을 청와대로 집중시켰는데, 최순실 씨는 역대 대통령의 어떤 친인척보다도 그런 대통령과 가깝게 지냈다. 권력을 이용해 사적 이익을 취할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다.
정태인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대통령의 뜻'이라는 말로, 개인이 사적 이익을 취한 특이 케이스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경제민주화와 맞춤형 복지를 내세웠지만, 기본 정책은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은 세운다)다. '줄푸세'는 재벌에게 유리한 '한국형 신자유주의'라고 볼 수 있는데, 재벌이 원하는 대로 온갖 규제를 다 풀어줬다. 특히 세월호 참사 후 박 대통령은 '국가대개조'를 '국가대혁신'으로, 또 '경제혁신 3개년 계획'으로 말을 바꿔가며 규제완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다른 정권과 다른 것은 재벌에게 규제완화에 대한 보상을 받으러 다녔다는 점이다. '내가 이렇게 해줬으니까 너희는 미르·K스포츠 재단에 돈을 내'라는 식이었다. 삼성은 최순실 씨의 딸을 직접 지원하는 방식으로 35억 원을 내지 않았나. 과거 박 대통령은 재벌과 보수 언론의 꼭두각시였는데, 지금은 최 씨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 꼭두각시로, 이중의 역할을 한 셈이다.
정말 이상한 것은 '그런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이 됐을까?' 하는 점인데, 박 대통령은 그 조직의 입장에서 가장 부리기 좋은 사람이자 조직의 이익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동시에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에 따른 장악력이 현재의 비극을 낳았다고 본다.
전홍기혜 : 박근혜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정태인 : 박근혜 대통령은 1998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이래 15년 동안 의원 생활을 했지만, 내세울 만한 입법 활동이 없다. 입법부 일원이었지만, 가장 일을 안 한 사람에 속한다. 이런 사람의 문제는 위기 때 드러나는데,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 때 행정부 수반으로 어떤 지시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위기의식의 무능을 보여줬다. 그런데 알고 보니, '최순실'이라는 샤머니즘 성향을 지닌 사람에게 한 사람에 의해 국정이 농단 당한 것 아닌가.
앞으로 더 많은 의혹이 쏟아질 것이다. 교육부는 국정교과서 문제, 외교부의 한일위안부합의 등 박근혜 정부의 어떤 장관도 자유롭지 않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아예 '최순실의 수족'이었다. 특히 최 씨가 국방부의 차기 전투기 사업, 록히드마틴사의 F-35A 결정에도 관여했다는 얘기가 있지 않나. 사실이라면 국가 안보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인데, 이는 국가 시스템을 해체해 버린 것이다.
국정 시스템을 정상화하기란,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과도 정부 또는 차기 정부가 국정 농단 사태를 바로잡으려면, 최소 1급 공무원 이상 고위직 모두를 경질해야 한다. 그들은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직무유기의 책임이 있다. 국무위원 전부가 몰랐다고 얘기하는데, 거짓말이다. 청와대 비서진은 결정 과정의 이상 현상을 누구보다도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전홍기혜 : 규제완화에 따른 보상 심리가 최순실 씨의 사적 이익만을 위한 것일까? 수백억 원을 거둔 박 대통령의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상상 이상의 일이라,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정태인 : 박근혜 대통령은 전 세계에서 속내를 알 수 없는, 가장 짐작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전체가 오컬트(occult, 초자연적)이다.(웃음)
최순실 씨는 독일에만 14개의 페이퍼컴퍼니를 세우는 등 돈을 조직적으로 해외로 빼돌렸다. 분명히 도와준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꼬리를 쉬 잡을 수 있을까? 박 대통령의 목적이라는 것도, 검찰과 특검이 조사해도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조성주 : 정치인 박근혜는 오랫동안 대통령을 꿈꿔온 사람이다. 어떤 대통령이 되고 싶었을까? 아마 '제2의 박정희'와 같은 인물로 기억되고 싶었을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한국 경제의 아버지'라고 하듯, 박 대통령은 스스로 '문화융성의 어머니'를 꿈꿨던 것은 아닐까?
박 대통령은 역사에 남을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만 존재했을 것이다. 그래서 민주적 정당성이나 시스템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800억 원 규모의 재단은 퇴임 후 정계와 재계에 미칠 영향력까지 계산한 결과물이라고 봐야 한다.
정태인 : 실제로 '창조경제'의 핵심은 '문화융성'이었다. 무엇보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을 왕족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독재 정치를 보고 자라지 않았나. 스스로 옳다면, 모든 것이 용인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도 차이가 있다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본의 국가 발전 모델대로 재벌을 만든 사람이지만, 딸인 박 대통령은 재벌이 하자는 대로 따라 한 사람이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 탄핵을 준비하라"
전홍기혜 : 김종필 씨의 <시사저널> 인터뷰가 박근혜 대통령의 여러 면을 보여준 것 같다. 최순실 씨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면서도 강한 권력욕을 가지고 대통령이 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절대 하야하지 않을 것 같다. 더군다나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2017년은 '박정희 탄생 100주년'이다. 딸로서 나름의 소명이 있다고 생각할 것 같다.
박 대통령의 욕망과 달리, 지난 12일 100만 명이 '박근혜 하야'를 외쳤다. 이에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 등 야권이 '박근혜 퇴진'을 당론으로 결정했는데, 실질적인 내용은 어떤 게 되어야 할까?
정태인 : 박근혜 대통령은 권좌에서 내려오는 대로 조사받고 구속될 것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아버지 탄생 100주년에 대한 사명도 있겠지만, 당장은 구속되는 게 더 무섭지 않을까? 어떻게든 임기를 채우겠다는 게 박 대통령의 최소 요구일 것 같다. '정권 퇴진'이든 '대통령 하야'든 상당 기간 진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정치권이 대통령 탄핵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면, 헌법재판소가 판결을 내릴 때까지 대통령의 직무는 완전히 정지된다. 대통령 탄핵에 앞서 총리가 바뀐다면, 새 총리가 국무회의 등 사실상 국정을 운영하게 되다. 외교도 총리가 총괄한다. 대통령이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고 해도 법적으로 효력이 없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때 청와대에 있었다. 당시 헌법재판소가 '탄핵 사유가 되지 못한다'며 기각하기까지 64일이 걸렸다. 굉장히 빠른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치적으로 엄청난 부담이 있기 때문에 헌재도 빨리 판결하지 못할 것이다.
광장의 '하야' 요구가 거세져야 법적 절차인 탄핵도 가능하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의 영수회담 번복도 '100만 촛불'의 힘이다. 박 대통령이 끝까지 하야하지 않겠다고 하면, 국회는 특검을 통해 좀 더 압력을 가할 수는 있을 것이다. 지금쯤이면 박 대통령도 사실상 통치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알지 않을까?
조성주 : 모를 것 같다.(웃음)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 등 친박이 힘을 모으면, 박근혜 대통령이 정국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청와대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고.
정태인 : 물론, 모를 수 있다. '우주의 기운'을 가진 인간 박근혜 씨의 상태를 우리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웃음)
조성주 : 사태 초기에는 탄핵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2004년 노무현 탄핵에 대한 경험 때문이기도 하지만, 민주주의 제도에서 헌재의 역할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 생각이 바뀌었다. 광장의 여론처럼 대통령 탄핵이 맞다고 본다.
대통령과 국회는 국민이 선출한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한 곳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도덕적·민주적 정당성을 잃었다면, 국회가 나서서 대통령을 탄핵하고 자신들이 직접 권력을 행사하는 게 민주주의적으로도 옳다. 만약 헌재가 국민의 95%가 문제 있다고 하는 지지율 5%의 대통령 탄핵안을 기각한다면, 다음 탄핵 대상은 헌재가 될 것이다.
정태인 : 헌재의 판결에 기대는 것은 시민운동과 정치를 사법화하는 것이다. 이번 사태만큼은 국회가 탄핵 절차에 들어간다고 해도 시민들이 '우리 일은 끝났다. 국회가 하는 일을 지켜보자'고 하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국회가 진짜 잘하는지 끝까지 지켜보자'고 할 것이다. 그러다 무엇인가가 잘못되면 다시 광장으로 나와서 요구할 것이고, 요구해야 한다.
'대통령 하야' 요구는 광장에서 주도해야 하는 일이고, '대통령 탄핵'은 국회가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하는 일이다. 동시에 국회는 헌재의 탄핵 판결이 나올 때까지 국정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과도 내각을 구성해야 한다. 시민의 광장과 의원의 국회는 절대 '대치 관계'가 아니다.
과도 내각은 하나의 당과 개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시민들의 다양한 요구가 반영되는 거국 내각이 되어야 하며, 기존체제에 대한 문제점과 방향까지 합의될 수 있어야 한다. 사실상 정권 인수위원회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렇게 과도 내각이 제대로 구성되면, 대통령 선거를 내년 12월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다. 조기 대선을 치러야 한다.
지금이 공화국으로 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경제 상황으로 보나 정치 시스템으로 보나, '망국(亡國)'이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조성주 : 전적으로 동의한다. 2016년 11월 지금이 개헌하지 않아도 내용상 새로운 공화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다. 제7공화국에 준하는 그런 방향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과도하게 집중된 청와대 권력을 개혁해야 한다. 두 번째는 국가정보원과 검찰과 같은 사정기관을 개혁해야 한다.
과도 내각에서는 시민 10만 명, 100만 명이 꼭 광장에 나오지 않아도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조직이 나와 요구하는 바를 말하면 된다. 박근혜-최순실의 기운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기존 체제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자고 요구해야 한다. 광장의 정치에, 정당과 국회의원은 더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정태인 : 얘기하다 보니까 진짜 꿈의 나라를 그리고 있다.(웃음) 말한 대로, 각 계층이 광장에서 자기 분야의 개혁 과제를 토론하고 방향을 정해 과도 내각에 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직접 민주주의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건데,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나.
조성주 : 자기의 요구를 항의로 전달하면, 정당과 국회가 받아 실제로 집행하는 게 민주주의다.
1987년과 2016년의 광장은 다르다
전홍기혜 : 이런 이상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지난 12일 모인 시민 100만 명의 힘 덕분이다. 진짜 100만 명이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동안 쌓인 민심의 폭발한 것인데, 정치권은 이 힘이 어디까지 갈지 몰라 움츠러든 상태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원동력이 되겠지만, 장기적으로 얼마나 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100만 촛불'의 의미를 살핀다면? 향후 활용법까지 얘기해 달라.
조성주 : 광장에 나온 100만 명을 보고 정말 남달랐다. 50대 이상은 바로, 1987년 6월을 떠올리며 분열을 우려하더라. 하지만, 또래 젊은층은 '대한민국의 에너지가 이 정도구나'라는 생각에 뭉클했다. 이들의 요구가 단순히 '대통령 하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정당한 권리 행사에 정치가 반응하는 경험을 한다면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시민적 에너지가 활성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태인 : 50대는 87년이 생각날 수밖에 없다. 87년 6월 10일 시청 앞을 가득 메운 인원이 아마 20~30만 명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서울 전역에서 가투가 벌어졌고, 최루탄과 돌멩이가 연일 날아다녔다. '4.13 호헌 조치'가 있었지만, 전두환의 독재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6월 29일 민주정의당(민정당) 노태우 대표가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후 대선에서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압도적인 표차로 기호 1번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정치권은 분열했고, 시민권도 당연히 분열했다. 이를 경험한 50대는 '정치권에 그대로 맡기면 안 된다. 계속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추미애의 양자회담 해프닝처럼 지금 실천되고 있다.
또 하나의 경험은 2008년 광우병 촛불 집회인데, 미국산 쇠고기라는 하나의 이슈에도 불구하고 70만 명(주최 측 추산)이 모였다. 그렇게 축제처럼 시민들이 6개월간 지속적으로 광장을 나왔고, '촛불 의제'라는 것도 먹을거리에서 민영화까지 확장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 임기 첫해부터 '하야하라'라는 요구가 터져 나왔지만, 정치적으로 이룬 것은 많지 않았다. MB의 대선 공약이었던 '대운하 사업'도 '4대강 살리기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됐다.
하지만 2016년의 '대통령 하야'와 '정권 퇴진'은 다르다. 박근혜 정권이 1년 4개월여밖에 남지 않은 시점인데다가 정치·경제·사회할 것 없이 이슈가 다양하다. 무엇보다 '이게 나라인가'라는 한탄과 함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8년 전에 경험한바, 정치권에 모든 것을 맡겨두면 안 된다는 인식이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망국의 조짐이 만연하다.
전홍기혜 : 연세대 조한혜정 명예교수가 지난 4월 "한국은 이미 굉장히 앞서나가는 선망국(先亡國, 먼저 망하는 나라)"이라고 주장했다.
정태인 : 우리는 MB라는 '한국형 트럼프'를 이미 경험했다. '이명박근혜'를 뽑은 민심은 영국의 브렉시트나 미국의 트럼프에게 쏠린 민심과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은 우리는 그렇게 가면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전홍기혜 :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에 대해 야권이 공조하고 있지만, 선거를 치르게 되면 달라지지 않을까? 야권도 대선 전략을 새롭게 짜야 할 것 같다.
조성주 : 여야 할 것 없이 대선주자들이 여러 명이다. 일명 '빠'(팬덤)의 정치가 아닌, 콘텐츠 경쟁이 이뤄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야권의 승리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정태인 : 2017년 대선 역시 사람들은 1987년 대선과 비교할 것이다. 당시와 지금이 다른 것은 첫째, 김영삼-김대중이라고 하는 '양김'이 없다는 점이다. YS와 DJ처럼 엄청난 카리스마와 자기 기반을 확실하게 가진 정치인이 지금은 없다. 두 번째는 당시 국민들은 이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앞날을 맡겼다. 시민운동가들도 백기완 후보를 포함해 자신의 지도자에 따라 세 개의 덩어리로 나뉜 채 선거를 치렀다. 김영삼-김대중-백기완은 사경을 헤매다시피 하며 민주주의를 끌고 온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 지지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2016년 시민의 힘이라면, 대선 후보들을 단일화시킬 것이다. 시민들은 과도 대각 하에서 후보 단일화를 위한 플랫폼을 도출하고 주자들이 합의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그렇게 '연합 정권'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 대선에서 야권의 후보 단일화가 이상적으로 이뤄졌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유권자인 국민의 압력으로 후보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선거에서 굉장히 중요한 과정이다.
전홍기혜 : 1987년과 2016년의 결정적 차이는 시민들이 정치 지도자에게 자신의 운명, 더 나아가서는 이 나라의 운명을 전적으로 맡기지 않을 것이라는 부분이다.
조성주 : 야권이 후보를 단일화하기보다는 각자 경쟁하는 체제로 선거를 치르면? 새누리당도 단일 후보를 세우기 쉽지 않을 것 같다. '100만 촛불'이라는 시민적 에너지가 잘 귀결되면, 가능하다고 본다.
"박정희식 경제 모델은 끝났다"
전홍기혜 : 지금까지 얘기한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한국 경제가 먼저 망할 것 같다.(웃음)
정태인 : 실제로 모든 경제지표가 좋지 않다. 한국은행은 올해 경제성장률을 3%에서 2.7%로 하향 조정했다. 그나마도 '빚내서 집 사라'며 돈을 풀고 집을 지어 끌어올린 경기다. 그런데 가계부채가 너무 많아서 사람들이 더는 돈을 빌릴 수 없는 상태다. 또 주택공급이 이미 실수요를 뛰어넘었다. 주택경기로는 경제를 끌고 갈 수가 없게 됐다.
한국 경제를 견인하는 다른 하나는 수출인데, 주요 산업은 큰 폭의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2017년 내년에는 더 나빠질 것이다. 영국과 EU의 브렉시트 협상이 시작되는데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불확실성이 추가되는 셈이다. 그리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펼칠 보호주의가 엄청난 통상 마찰을 일으킬 것이다.
다음으로 재벌인데, 상당한 현금을 가지고 있어도 불확실성이 가중된 상태에서 투자하기는 어렵다. 또 해운-조선-건설-철강 등 구조조정은 더 본격화될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삼성과 현대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삼성은 '갤럭시7 리스크'고, 현대는 100만대 이상 쌓여 있는 자동차 문제다. 전체적으로 재벌 시스템이 흔들리고 있다.
경제적 대외 환경이 좋아질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내수가 늘어야 하는데, 임금 문제나 비정규직 문제, 실업자 고용 문제 등이 해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50년 이상을 버텨온 수출주도 성장 정책을 바꾸어야 한다. 정책 기조를 다 바꾸지 않는 한, 한국 경제는 내년에 마이너스가 될 위험성이 있다.
전홍기혜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드러난 것 중 하나가 정치와 재벌의 유착 관계다. 두 집단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책을 왜곡시킨다. 박정희식 경제 성장 모델의 병폐가 지금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태인 : 박정희식 경제 모델은 끝났다. 박정희 모델에 1996년 이후 신주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붙으면서 재벌은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했다. 특히 삼성은 사법부와 언론 대부분을 장악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시스템으로 가면 삼성이 망한다는 사실이다.
한국 재벌 대부분이 경영 1세대에서 3세대로 넘어가면서 IT에 투자했지만, 거의 다 망했다. 이후 눈을 유통으로 돌렸지만, '앙트레 프레너'(entre preneur, 기업가 정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요즘 아이들 소원이 '건물 임대업'이라고 하던데, 재벌 3세들도 면세점이 먹고살 길이라는 생각에 피 터지게 싸우는 것 아닌가. 재벌 시스템이 얼마나 낡았는지, 또 앞으로 바뀔 가능성도 거의 없다는 걸 보여준다.
다행히 야권 대선주자들이 경제 정책의 기조가 틀렸다며 '소득이 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재벌 시스템에 얼마나 손댈 수 있을까? 시민들이 독재와 권력형 비리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지만, 재벌에 관해서는 아직이다. 단적으로, 삼성을 비판하는 게 김연아 선수를 비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망국'이라는 것이다.
다행히 '100만 촛불'이 낡아빠진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줬다. 일단은 정치 제체가 바뀌겠지만, 이를 통한 경제 개혁도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
조성주 : 재벌이 미르·K스포츠 재단을 위해 모았다는 800억여 원, 재벌이 권력자에게 '삥' 뜯긴 게 아니라 아주 싼 값으로 공적 영역을 통한 민원 해결을 한 셈이다. 재벌에 대한 문제의식이 폭넓고 심도 있게 다뤄져야 한다. '최순실 씨가 재벌에게 '삥'을 뜯었네, 재벌이 '삥'을 뜯겼다'라는 식으로 다뤄지는 것은 좋지 않다.
정태인 : 사실 박근혜 대통령의 생각은 확실하다. 자신이 재벌에게 '삥'을 뜯는 게 아니라, '내가 줬으니 너희도 내놔라'라는 것이다. 그것도 재벌, 너희가 하지 않는 문화융성 즉 새로운 창조경제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시각을 달리하면, 권력과 재벌의 공생(共生)이다.
'한국형 샌더스'를 찾아야 한다
전홍기혜 :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미국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도 적잖은 충격에 빠졌다.
정태인 : '트럼프 현상'의 전조가 지난 6월 브렉시트였다. 영국의 EU 탈퇴를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과 미국의 트럼프 후보를 지지한 사람의 성향이 비슷하다. 영국의 '러스트 벨트'(rust belt, 산업지대)에 거주하는 40대 이상의 백인 남성. 이들은 과거 진보적 가치를 내세운 영국 노동당과 미국 민주당의 과거 조직적 지지자였다. 이들은 특히 '세계화의 희생자'라는 측면에서 2012년 미국의 '오큐파이'(occupy, 월가를 점거하라)와도 비슷하다. 연령이나 성별은 겹치지 않지만, 이들이 가진 불만은 스페인의 '포데모스'(podemos, 우린 할 수 있다) 또는 미국의 '샌더스 열풍'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
미국 대선 초기, 불평등과 양극화 문제에서 민주당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공화당 트럼프 대선 후보의 지지 기반이 일정 부분 겹쳤다. 다만, 샌더스는 문제의 원인이 국내 정책에 있다고 주장했고, 트럼프는 원인을 불법 이민자 탓으로 돌렸다. 한쪽은 내부에서 다른 한쪽은 외부에서 각각 답을 찾은 셈이다.
지금 전 세계는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발생한 불평등과 양극화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말대로, 90대 10 또는 99대 1로 완전히 벌어졌다. 그러나 서구의 진보(영국의 노동당, 미국의 민주당, 독일의 사회민주당 등)조차 신자유주의 정책과 비슷한 경제 정책으로 일관했다. 엘리트 그룹과 IT, 금융 쪽 지지를 받은 힐러리 클린턴 대선 후보가 기득권층(establishment)으로 인식된 이유다.
조성주 : 힐러리 후보는 기득권인 워싱턴 정치의 상징이다. 그럼에도 이번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이 망했다고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4년 후 정권 탈환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았을까? 공화당은 트럼프 후보를 거부하다 끝내 굴복한 것이고, 민주당은 '샌더스'라는 에너지를 안에서 흡수했다고 본다. 그래서 미국이 '헬'(hell)이 되기보다는 진보층에서 더 많은 저항이 나타날 것이라고 본다.
한국의 경우, 이명박 정권에서 '한국형 트럼프'를 겪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문구처럼 아무 생각 없이 신자유주의에 편승한 것이었다.
정태인 : 브렉시트와 트럼프 현상의 같은 점은 보호주의, 고립주의, 인종주의다. 세 가지 노선대로라면, 맞는 적인지는 모르지만 피아 구분이 확실해진다. 세계 전체가 굉장히 위험한 상태다. 나치즘과 유사한 점이 있다.
한국 상황도 마찬가지다. 과도 내각을 통해 민주당이 연합 정권이 된다고 해도 많은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데, 이들 중 일부는 재벌과 연결되어 있으며 심지어 재벌을 공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한국형 힐러리'는 누구고, '한국형 샌더스'는 누구인지 찾아야 한다. 그 사람들 편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이렇게 하면 된다'고 제시할 사람이 필요하다.
전홍기혜 : 트럼프 당선인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한반도 상황은 어떻게 달라질까?
정태인 : 박근혜 대통령이 외치가 아닌, 내치를 하는 게 더 나을 수 있다.(웃음) 아마 박 대통령은 살아남기 위해 트럼프 정부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 수 있다.
트럼프 정책 중 가장 확실한 것은 중국에 대한 압력이다. 특히 중국의 수입품에 대한 45% 관세 등 실제로 압력을 가할 것이다. 그리고 오바마 때부터 강화된 아시아 국가에 대한 덤핑 제소가 더 강화될 것이다. 특히 환율조작국에 대한 감시가 철저해질 것이다. 한국도 환율조작 감시대상국이다. 환율이 1200원이 되어야 하는데 1300원이라서 미국이 1000억 달러의 손해를 봤다면, 미국은 한국 상품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1000억 달러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환율 슈퍼 301조'라는 것이다. 이에 대응하려면 중국-대만-일본과의 공조가 필요한데, 과연 박근혜 정권이 할 수 있을까?
트럼프 대선 후보 시절 한미FTA에 대해 직접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재협상을 한다면 지적재산권이나 ISD 조항 등을 고치자고 맞불 놔야 한다. 조건이 안 맞으면 폐기하자고 해야 하는데, '박근혜 외교라인'이 그럴 리 없다. 무기를 더 사거나 사드를 한 대 더 들여오는 식으로 훨씬 쉬운 방법을 선택할 것이다.
과도 내각에서 총리는 외교 쪽에도 뚜렷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미국과 중국을 상대하기 위해 배짱이 상당한 사람이어야 한다. 강한 정치력이 필요하다.
전홍기혜 : 북한 변수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정태인 : 북한은 트럼프 당선인의 대통령 취임 전 무력시위를 한 번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에는 도발이 굉장히 줄어들 것이다. 전쟁은 기본적으로 치킨게임, 즉 상대적으로 더 광폭한 쪽이 이기는 게임이다. 오바마 정부에서는 북한이 주도권을 가졌을지 몰라도,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적어도 연평도 포격 같은 것은 못한다. 섣불리 도발은 안 할 것이다. 대신 평화협정을 굉장히 강조할 것이다.
조성주 : 트럼프 대선 후보 시절, 북한과 협상하겠다고 했다.
정태인 : 단순하게 '내가 해결할게' 정도의 태도다. 트럼프 당선인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더라도 주한미국 비용 등 전액을 내라고 할 사람이다. 한미 FTA처럼 '철수해라'라고 할 배짱이 있어야 한다. 북한과 남한의 GDP가 40배다. 주한미국이 없다고 해서 북한이 전쟁을 도발하지는 않을 것이다.
군사 전문가 대부분이 북한이 핵무기를 쓰는 경우는 '정권이 붕괴될 때'라고 말한다. 외부 공격으로 붕괴되거나, 내부 반란으로 정권이 위험에 처한 경우다. 북한이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면 모를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 유지다. 북한을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안심시키면 된다.
쓰레기통에서 핀 100만 송이 장미
전홍기혜 : 오는 19일에도 '100만 촛불'이 타오를 것으로 기대한다. 당부할 얘기가 있다면?
조성주 : 시민들이 더 다양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101만 번째 촛불을 말하는 게 아니라, 시민들이 그동안 못했던 얘기를 쏟아내야 한다. 노동조합이나 시민 조직도 자신의 생각과 요구를 더 많이 표출해야 한다. 그래서 광장에도 더 많은 공론장이 열렸으면 좋겠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굉장히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다.
정태인 : 외국학자들이 '어떻게 샤머니즘 대통령과 사니?'라고 묻더라.(웃음) 그런데 지난 12일 '100만 촛불'로 상황이 바뀌었다. '이게 무슨 나라냐?'에서 '이게 바로 대한민국이다'라고. 정치적인 문제가 일단락되고 과도 내각이 출범한다면, 차기 정부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시민들도 같이 토론했으면 좋겠다. 자괴감에서 자부심으로 바뀐 에너지를 최소한의 민주주의 플랫폼을 만드는 쪽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영국 기자가 '쓰레기통에서 핀 장미꽃'이라고 했다. 지금은 전 세계가 쓰레기통이다. 그런데 이를 구원할 '100만 송이의 장미꽃'이 지난 12일 폈다. 그리고 또 필 것이다. 역사를 보면, 사람들은 공황이나 전쟁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다. 그런데 그런 일을 겪지 않고도 헤쳐갈 수 있는 방법이 정치고, '100만 촛불'이다.
시민의 힘으로 신자유주의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밑바닥까지 떨어진 국격이 맨 위로 올라가는 민주주의의 진짜 모범이 될 것이다. 혹시 아나? 김구 선생이 말한 '문화국가'가 될지.(웃음)
조성주 :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씨도 '문화국가'를 꿈꿨던 것 아닐까? 문화융성을 통한 창조경제로, 오컬드적으로 존경받는 나라를 만들려고 했을 수 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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