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인문지리기행학자, 서울해설가)의 제54강은 <송년특집>으로, 한양도성의 좌청룡(左靑龍) 산줄기에 남아 있는 문화유적들을 둘러보며 병신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주제는 <낙산(駱山)과 쌍계동천>입니다. 한양도읍의 내사산(內四山) 중 백악(白岳)에서 낙산(駱山)에 이르는 좌청룡 산줄기와 그곳에 서려 있는 문화유산을 찾아갑니다. 낙산은 산의 모양이 낙타와 같아서 낙타산(駱駝山), 또는 타락산(駝酪山)이라고도 하고 그 서쪽의 계곡을 쌍계동천이라 부릅니다.
12월 11일 일요일 아침 9시,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정문 앞에 모여 출발합니다(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 이용, 정시에 출발하니 출발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헌법재판소(광혜원터)-북촌-남북회담사무국-옥류정-와룡공원-응봉-한양도성(도성안)-양현고터-성균관-반촌-혜화문-점심식사 겸 뒤풀이-한양도성(도성밖)-낙산-적산가옥-북평관터-흥인지문-오간수문-동대문역사문화공원-광희문-청계천-풍물시장-동묘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낙산(駱山)과 쌍계동천>에 대해 들어봅니다.
응봉이 품은 창덕궁, 창경궁, 종묘
한양도성(漢陽都城)의 북쪽에 있는 주산(主山)인 백악(白岳)에서 동쪽으로 낙산(駱山)에 이르는 좌청룡(左靑龍)의 산줄기에서 가장 높게 솟아 오른 봉우리가 응봉(鷹峰)입니다. 응봉은 내사산에는 해당되지 않음에도 도성 안 운종가(雲從街)까지 준수한 산줄기를 뻗친 범상치 않은 봉우리로 중요한 국가시설인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 그리고 종묘(宗廟)와 성균관(成均館)을 품고 있습니다.
창덕궁(昌德宮)은 조선시대 양궐(兩闕) 체제에서 북궐(北闕)인 경복궁(景福宮)과 함께 임금이 통치행위를 하던 정궁(正宮)입니다. 조선 초 정종이 개성으로 천도하자 이어서 왕위에 오른 태종이 도읍을 다시 한양으로 옮기면서 응봉(鷹峰)자락의 향교동(鄕校洞)에 이궁(離宮)으로 조성하고 10년 전에 창건된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창덕궁으로 옮겨왔으며 세종 때 다시 경복궁으로 옮겼습니다.
이궁(離宮)으로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복궁을 대신하여 273년간 정궁(正宮)의 역할을 했던 궁궐로서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등 여덟 명의 임금이 즉위하였으며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일본에게 강제합방 당하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창경궁(昌慶宮)은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지금의 창경궁 자리에 수강궁(壽康宮)을 짓고 그곳에 살았던 것이 그 연원으로, 성종은 주로 창덕궁에 거주하며 정사를 보았습니다만 이궁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정궁인 경복궁보다는 무척 비좁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성종에게는 할머니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어머니 소혜왕후(昭惠王后), 작은 어머니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등 세 분의 대비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처소가 따로 필요해서 창덕궁에 붙어 있는 수강궁 터에 새롭게 지은 것이 별궁(別宮)으로서 창경궁인 것입니다.
별궁으로 창건되어 정궁으로서의 역할은 못했으나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중건되지 않은 상태에서 창덕궁이 정궁의 역할을 할 때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창경궁도 정궁의 보조역할을 담당하며 당당히 정궁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고대국가의 왕은 하늘이 내리는 것으로서 왕의 씨앗이 이어져 세습됨으로 그 씨앗의 근원인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왕(追尊王)과 추존왕비의 신주(神主)를 봉안한 사당(祠堂)으로 이들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때 맞춰 제례를 올리는 곳이 종묘(宗廟)입니다.
관직에 나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성균관
성균관(成均館)은 조선의 국립대학으로서, 조선시대는 중국과 베트남과 같이 과거(科擧)를 통해서만 관직(官職)에 오를 수 있기 때문에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성균관은 조선을 이끌어 갈 인재들을 길러내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한 궁궐 등, 국가기관들이 좌청룡 능선에 있는 응봉으로부터 남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에 기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응봉이 명당을 품은 좋은 기운이 서려 있다는 반증일 것인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청와대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응봉을 군부대가 깔고 앉아 있습니다.
조선이 건국되고 개성(開城)에서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한 초기에는 한양의 행정구역은 북악(北岳) 아래의 북부, 낙산(駱山) 아래의 동부, 목멱산(木覓山) 아래의 남부, 인왕산(仁王山) 아래의 서부, 청계천(淸溪川) 주변의 중부 등, 크게 5부(部)로 나누었으며 부를 촌(村)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백악의 경복궁과 응봉의 창덕궁 사이에 있는 부락을 북촌(北村), 목멱산 아래 동네를 남촌(南村), 낙산 아래를 동촌(東村), 인왕산 아래를 서촌(西村), 청계천변을 중촌(中村)이라 하였고, 대체로 북촌과 동촌, 서촌에는 출사(出仕)한 사대부가, 남촌은 출사하지 못한 사대부와 무인(武人)이, 중촌에는 역관(譯官), 의원(醫員), 화원(畵員) 등 기술직(技術職) 중인(中人)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북촌, 남촌, 동촌, 서촌, 중촌의 내력
중인이 살았던 중촌을 제외한 동서남북 네 개의 촌(村)은 양반들의 주거지로서 조선 중기 붕당(朋黨)의 이름이 이것으로 말미암았습니다. 동인(東人)은 김효원(金孝元)이 동촌에, 서인(西人)은 심의겸(沈義謙)이 서촌에 살았기 때문에 그 일당을 동인과 서인으로 불렀으며, 동인이 다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나뉠 때는 남촌에 사는 일당을 남인, 북촌에 사는 일당을 북인이라 불렀으나 그 일당 모두가 그곳에 살았다는 것은 아니고 중심인물을 비롯하여 대부분이 그곳에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색당파(四色黨派)의 주거 분포가 조선 후기에 서인의 노론(老論)에 의해 일당 지배체제가 완성되면서 차츰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입지적 조건이 가장 좋은 북촌에는 노론이, 서인이지만 노론에게 밀린 소론(小論)과 동인으로 한때 정권을 잡은 북인은 동촌과 서촌에, 사색당파 중 가장 세력이 약했던 남인과 무인들은 남촌에 다수가 모여 살았습니다.
그래서 북촌에는 아흔아홉 칸 규모의 고대광실의 사대부집이 많았는데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박규수 대감의 집도 이곳에 있었다가 허물어지고 그곳에 조선의 최초의 현대식 병원인 광혜원(廣惠院)이, 그 다음으로 창덕여고가 들어섰다가 지금은 헌법재판소가 들어서 있습니다.
박규수(朴珪壽, 1807~1877)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손자로서 영, 정조 시대의 실학(實學)을 계승하여 북학파(北學派)를 일구고 다시 개화파(開化派)를 낳게 한 선구자로서 실학과 개화사상(開化思想)을 이어준 근대의 가교자라 할 수 있습니다.
선배인 정약용, 서유구, 김매순(金邁淳), 조종영, 홍석주(洪奭周), 윤정현(尹定鉉)을 사숙(私塾)하였고, 문우(文友)인 남병철, 김영작, 김상현(金尙鉉), 신응조(申應朝), 윤종의, 신석우(申錫愚) 등과 교유하였으며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김윤식, 김홍집, 유길준(兪吉濬) 등은 그 문하에서 배출된 개화운동의 선구적 인물들입니다.
그래서 북촌, 박규수의 집 사랑방에 개화사상에 목말라하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을 불러놓고 자신이 손수 만든 ‘지구의(地球儀)’를 보며 중국중심주의가 해체되어가는 국제현실을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박규수는 중국에 사행(使行)을 두 번이나 다녀왔습니다. 처음에는 1860년 영, 불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고 청의 함풍황제가 열하로 피난가자 조선정부의 위문사행단(慰問使行團)의 부사(副使)로 조부인 연암이 다녀왔던 길을 똑같이 다녀왔고, 두 번째 사행(1872년)은 정사(正使)의 직위로 다녀왔는데 이때 박규수는 중국 문인들과의 교류에 힘썼고 당시 중국에서 진행되던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영향을 받아 조선으로 돌아와서 북학을 계승한 개화사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박규수 집터에는 지금 서울에 남아있는 것 중에 가장 크고 건강한 백송(白松)이 우뚝 서 있는데, 백송은 북경(北京)이 원산지로서 중국에 사행을 다녀온 북학파들에 의해 조선으로 들여왔으며 그래서 북학파 사람들과 관련 있는 집에는 백송을 반드시 심었습니다.
응봉에서 낮은 산줄기에 쌓은 한양도성(漢陽都城)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도성 밖은 한양오경(漢陽五景) 중의 하나인 ‘북둔도화(北屯桃花)’의 절경을 품고 있는 성북동천(城北洞天)이고 도성 안으로는 조선시대 국립대학인 성균관과 성균관에 속한 노비들의 주거지역인 반촌(泮村)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균관 노비들의 주거지역 반촌
‘한양오경’이라 함은 한양에서 경치가 좋은 다섯 곳을 이르는 말로, ‘인왕산 살구꽃’ ‘세검정 수석(壽石)’ ‘서지(西池) 연꽃’ ‘동대문 밖 버드나무’ 그리고 ‘북둔 도화’ 로 성북동천에는 복숭아꽃이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북둔(北屯)이라는 지명은 도성 밖 북쪽을 방어하기 위해 탕춘대(蕩春臺. 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에 설치된 총융청(摠戎廳)의 북쪽 주둔지가 성북동천에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성균관은 조선시대의 국립대학으로 한양(漢陽) 천도(遷都) 후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천도 전 개경(開京)에 있었던 것입니다. 고려 말에 중국으로부터 성리학(性理學)을 처음 들여온 안향(安珦)이 유학(儒學)을 널리 펴고자 성균관을 건립하면서 자신의 사재(私財)를 털었을 뿐만 아니라 관료들에게도 모금을 하여 이때 모은 돈으로 중국으로부터 경전(經典)과 역사서(歷史書) 등을 수입하여 성균관의 면모를 일신하였습니다.
이때 안향은 자신의 소유인 3백여 명의 노비(奴婢)도 함께 희사하여 성균관의 소속 노비로 만들었는데 한양으로 천도를 할 즈음에는 그 노비의 자손들이 수천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성균관을 달리 반궁(泮宮)이라고도 하는 것은 천자(天子)의 나라에 설립한 학교를 벽옹(辟雍)이라 하고 제후(諸侯)의 나라에 설립한 학교를 반궁이라 한 데서 유래하였습니다. 벽옹이란 큰 연못 속에 지은 집을 말하는데 벽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속에 있기 때문에 동, 서, 남, 북에 놓인 다리를 건너야만 갈 수가 있습니다. 이에 비해 반궁은 동쪽과 서쪽 문을 연결하는 부분만 물로 채워져 있어 벽옹에 비해 물이 반밖에 되지 않아 그 물을 반수(泮水)라 하였고 반수에 있는 집이라 반궁(泮宮)이라 불렀습니다.
성균관에 소속된 수천 명의 노비가 반수와 반궁의 주위에 집을 짓고 부락을 이루어 살고 있어 이를 반촌(泮村)이라 하였고 반촌에 사는 노비들을 반인(泮人)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주로 성균관의 잡역(雜役)을 세습적으로 맡아 보았습니다.
어린 아이는 성균관의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의 각 방에 소속되어 유생(儒生)들의 잔심부름을 하는 재직(齋直)으로 일했고 이들이 성장하면 성균관의 제향(祭享)과 관련된 육체노동을 하는 수복(守僕)이 되었습니다.
반촌은 성균관과 공적(公的)인 관계뿐 만 아니라 유생들과 사적(私的)인 관계도 맺어서 때로는 성균관 유생들이 방을 잡아 공부하는 하숙촌의 역할도 했고 과거시험 때에는 응시자들이 머무르는 일종의 여관촌 역할도 하였으며, 특별한 경우 성균관 유생들의 이념서클의 온상이기도 했습니다.
성리학의 이념으로 통치하였던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을 불온시 하였으며 특히 천주학은 참형으로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당시 성균관 유생이었던 이승훈(李承薰)과 정약용(丁若鏞)이 강리원(姜履元)과 함께 과거공부를 핑계로 반인(泮人) 김석태(金石太)의 집에 모여 천주교(天主敎) 교리를 학습하다가 발각되었는데 이들이 모두 사대부 자제들이고 앞으로 조선을 이끌어 갈 동량(棟樑)들이라 참형은 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반촌의 가장 특이한 역할은 그곳에서 도살(屠殺)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는 소의 도살을 법으로 정해 금지할 정도로 강력하게 막았는데, 이를 위해 금살도감(禁殺都監)이라는 관청을 설치하면서까지 소의 도살을 막아보려 했지만 여전히 소고기는 유통되었고 밥상에도 올라왔습니다.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北學儀)>에 의하면 나라 전체에 하루에 5백 마리의 소가 도살 되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도살된 소는 국가에서는 공식적으로 국가의 제사나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는 호궤(犒饋) 때 주로 쓰였습니다. 한양에는 성균관과 5부(部) 안에 24개의 푸줏간이 있었고, 지방의 3백 여 고을에 빠짐없이 소를 파는 고깃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분명 조직적으로 도살하는 곳이 있어야 가능할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아무리 금지하여도 먹는 음식인지라 단속과 처벌이 느슨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도살의 본거지가 바로 반촌이었습니다. 반촌에서 소를 도살하게 된 연원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성균관 학생들의 식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유본예의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성균관의 노복들로 고기를 팔아서 생계를 잇게 하고 세(稅)로 바치는 고기로 태학생(太學生)들의 반찬을 이어가게 한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인들의 도살이 가능했던 것은 반인을 이루는 노비들이 대부분 여진족 또는 말갈족들로서 이들은 유목생활을 하며 도살을 생활로 하던 종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은 서울의 성균관과 사부학당(동부, 서부, 남부, 중부 학당), 그리고 지방의 향교(鄕校)와 같이 나라에서 운영하는 관학(官學)과, 서당(書堂) 서원(書院) 같은 재야 지식인인 사림(士林)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유학(儒學)를 치국이념으로 내세워 유교정치를 펼쳤던 조선왕조는 관학교육을 강화하였는데, 초시(初試)에 합격하여야만 국립대학인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고 오직 성균관을 통해서만 본고사에 해당되는 정시를 치룰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정시에 합격해야만 비로소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향교는 지금의 학제(學制)와 비교하면 지방의 국립고등학교입니다. 향교에서 수학한 후 1차 과거에 합격한 자는 생원(生員), 진사(進士)의 칭호를 받고 성균관에 가게 되는데 여기서 다시 수학하여 문과(文科)에 응시하여 고급관직에 오르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향교의 변질과 서원의 등장
조선 중기 이후 향교는 단순한 과거를 준비하는 곳으로 변질되어 양식 있는 선비들은 관학을 기피하니 배우려는 학생들이 모자라게 되어 향교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되고 마침내 성리학(性理學)의 학풍을 이어가려는 사림(士林)들이 앞다투어 서원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사림은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이어받아 목은(牧隱) 이색(李穡)으로부터 그의 문하(門下)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야은(冶隱) 길재(吉再)로부터 시작하여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조광조(趙光祖) 등으로 이어지면서 그 세력이 커져 갔는데 이들은 학문적으로는 사장(詞章)보다는 경학(經學)을 중시했고 경학의 기본사상을 성리학에서 구했습니다.
관학에 해당되는 성균관과 향교에 배향되는 선현(先賢)들은 공자(孔子)를 필두로 하여 네 분의 성인(4聖), 공자의 수제자 열 명(10哲), 송나라 여섯 명의 현자(宋朝6賢), 공자의 제자 중 72명의 현자(孔門72賢), 한(漢), 당(唐), 송(宋)의 22명의 현자(漢唐宋22賢), 그리고 우리나라 18명의 현자(東國18賢) 등 모두 133분을 모시게 되어 있습니다만, 격과 규모에 따라 대체로 그 수를 줄여서 모십니다.
우리나라 18분의 현자는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안향(安珦),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 조헌(趙憲),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박세채(朴世采)입니다.
향교와 서원 등은 대부분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건물 배치로서 앞쪽이 공부하는 강학공간(講學空間)이고 뒤쪽이 배향하는 사당공간(祠堂空間)입니다만, 국립대학이라 할 수 있는 성균관의 건물 배치는 일반적인 배치와 반대로 전묘후학(前廟後學)으로 앞쪽에 공자 등을 배향하는 대성전(大成殿)이 위치하고 뒤쪽에 공부하는 명륜당(明倫堂)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배향공간인 대성전 좌우에는 133위 중 대성전에 모시지 않은 나머지 위패를 모시는 행랑(行廊)인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배치되어 있고 강학공간인 명륜당 좌우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마주보고 있습니다.
명륜당을 바로 보고 오른쪽에 있는 동재는 선배들이, 그 반대편 서재에는 후배들이 사용했으며 성균관 유생의 인원은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대략 200여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명륜당 앞뜰에는 수령이 4, 5백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우뚝 서 있고, 향교와 서원의 뜰이나 정문 앞에도 백 년 이상 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이것은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古事)를 본떠 향교나 서원에 은행나무를 심게 된 것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응봉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린 산줄기가 방향을 약간 남쪽으로 꺾어 솟구치며 낙산을 일구는데 그 안부(鞍部)에 동소문(東小門)인 혜화문(惠化門)이 있습니다. 원래 북소문은 홍화문(弘化門)이었는데 성종(成宗) 때 세 분 대비(大妃)를 위해 별궁(別宮)인 창경궁(昌慶宮)을 짓고 그 정문의 이름을 홍화문이라 하여, 할 수 없이 창경궁에게 그 이름을 내주고 달리 혜화문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낙타 같이 생겨 낙산
낙산은 그 모양이 낙타와 같아서 낙타산(駱駝山), 또는 타락산(駝酪山)이라고도 하며 낙산의 서쪽 산록에 있는 쌍계동천은 기암괴석과 울창한 수림 사이로 맑은 물이 흘렀으며 특히 ‘낙타유방’에 해당하는 두 곳에 ‘이화동약수’와 ‘신대약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쌍계동천에는 태종 때 재상(宰相) 박은(朴訔)이 백림정(柏林亭)을 짓고 주위에 잣나무를 심어 풍류를 즐겼으니 이 때문에 백동(柏洞) 또는 잣나무골이라는 지명이 생겨났고, 신숙주(申叔舟)의 손자로 중종 때 학자였던 신광한(申光漢)도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이곳을 신대명승(申臺名勝)이라 하였고 이 때문에 신대동(申臺洞) 또는 신대골이라는 지명이 생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효종의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의 거소인 석양루(夕陽樓), 배꽃이 만발했던 배밭 가운데 지은 이화정(梨花亭), 영조시대의 문인 이심원(李心源)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등이 있어 왕족, 문인, 가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고 동촌이씨(東村李氏)의 세거지(世居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볼모로 심양에 갔을 때, 함께 잡혀온 나인(娜人) 홍덕(弘德)이가 봉림대군에게 날마다 김치를 담가서 드렸고, 조선에 돌아와서도 임금이 된 효종에게 김치를 갖다 바치니, 효종이 감탄하여 낙산 기슭에 있는 밭을 홍덕에게 주었답니다. 이 밭을 ‘홍덕이밭[弘德田]’이라고 하며 지금도 낙산 기슭에 조그맣게 남아 있습니다.
대한제국 시절 고종의 명을 받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밀사(密使)로 파견된 이상설(李相卨)의 별장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이 들어섰고, 해방정국에는 이승만(李承晩)이 이화정 옛 터에 이화장(梨花莊)이란 이름으로 거처를 마련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쌍계동천은 두 물줄기가 흐른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한 줄기는 경신고등학교 어름에서 흘러내려 성균관 옆을 지나 반촌을 지나고 다른 한줄기는 혜화문 부근에서 흘러내려 지금의 대학로로 지나 두 물줄기가 합류하여 청계천으로 흘러드는데 지금은 모두 복개(覆蓋)되어 물줄기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낙산 정상에서 한양도성의 좌청룡 산줄기에서 벗어나 동쪽으로 한 지맥(支脈)이 뻗어가서 숭인동과 보문동 사이에 봉우리 하나를 만들었는데 이를 동망봉(東望峰)이라 합니다. 단종이 영월로 귀양 갔을 때 단종비(端宗妃) 송씨가 인근에 있는 청룡사(靑龍寺)에 살면서 매일 산봉우리에 올라 동쪽의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을 그리워했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낙산의 끝자락에는 한양의 사부학당(四部學堂)의 하나였던 동학(東學)이 있었으며 그 주변에 북평관(北平館)을 지어 여진족 사신들이 묵을 수 있도록 하였는데 과거 이화여대 부속병원이 있었던 곳 부근입니다.
조선시대의 외교정책(外交政策)은 사대선린(事大善隣)으로 중국을 사대(事大)하고 북으로 여진족(女眞族)과 동으로 일본(日本)과 선린(善隣) 하였습니다.
이들 삼국에서 오는 사신들이 머물 수 있도록 요즘의 대사관과 같은 관청을 두었는데 중국 사신은 한양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으로 들어와 덕수궁 주변에 있었던 태평관(太平館)에서, 일본 사신은 남소문인 광희문으로 들어와 목멱산 북쪽 자락에 있었던 동평관(東平館)에서, 여진족 사신은 동소문인 혜화문으로 들어와 낙산 끝자락에 있었던 북평관(北平館)에서 묵었다고 합니다.
좌청룡인 낙산이 우백호인 인왕산에 비해 그 지세(地勢)가 매우 허약하여 풍수지리적인 비보책(裨補策)을 많이 썼는데, 첫째로 낙산의 지세를 연장하기 위해 흥인지문 옆에 청계천을 준설한 흙으로 가산(假山)을 쌓았고 한양의 사대문과 사소문의 글씨가 모두 세 글자인데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산맥을 연상케 하는 ‘갈 지(之)’자를 한자 더 추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대문에는 볼 수 없는 옹성(甕城)을 구축하였습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의 사연
이러한 비보책(裨補策)을 알고 있었던 일본은 침략 이후 가산(假山)을 쓸어버리고 그곳에 운동장을 만들었고 최근에는 헐어버린 운동장에 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디자인센터가 들어서 있습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눈여겨 볼 것은 복원된 성곽터 아래 부분에 설치된 이간수문(二間水門)으로, 목멱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 중 도성 안에서 청계천에 유입되지 않고 도성 밖으로 내보내는 두 개의 구멍을 낸 수문(水門)입니다.
또한 흥인지문과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사이로 청계천(淸溪川)이 흐르며 도성안의 다섯 물줄기인 백운동천, 옥류동천, 삼청동천, 쌍계동천, 청학동천의 모든 물들은 청계천으로 합류하여 동쪽으로 흘러가서 다섯 개의 홍예 모양으로 물길을 낸 수문인 오간수문(五間水門)을 통하여 도성을 빠져나갑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지나면 남소문(南小門)인 광희문(光熙門)이 길 한편에 서 있는데, 건국 초기에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따로 남소문이 세워졌다가 그 효용성이 없어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광희문은 초기에는 남소문과 구별하여 한양의 물길이 지나가는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가까이 있어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렀고 도성의 장례행렬이 서쪽은 서소문인 소의문(昭義門)으로, 동쪽은 광희문으로 지나갔으므로 광희문을 또 다른 이름으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광희문에 관련된 특이한 이야기는 인조(仁祖)가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켰을 때는 공주(公州) 공산성(公山城)으로 도망갔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도망쳤는데 두 번 모두 광희문을 통하여 도성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동묘(東廟)는 중국의 유명한 장수인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인 관왕묘(關王廟)로서 동쪽에 있다고 동묘라 부릅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치게 된 까닭이 관우 장군의 덕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여겨 명나라의 황제가 직접 비용과 현액을 보내와 공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동대문 밖에 동묘, 남대문 밖에 남묘(南廟)가 설치되었고 조선 말 고종 때 명륜동에 북묘(北廟), 서대문 천연동에 서묘(西廟. 숭의묘)가 세워져 모두 네 곳에 있었으나 동묘와 남묘만 남았고 서묘와 북묘는 없어졌으며 남묘도 사당동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 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 번씩, 둘째 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 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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