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의 9월, 제35강은 삼남지방으로 향하는 교통의 요충지 <천안고을>입니다. 천안(天安)은 일찍이 ‘하늘[天] 아래 으뜸 요새’로 인정받고 ‘천안삼거리’로 불려 내려오는 등 말 그대로 이 땅의 교통의 요지로 기능해온 고을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35강은 2016년 9월 25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천안IC-직산읍치구역(봉선홍경사사적갈비/직산현관아/직산향교/천흥사터 당간지주/5층석탑)-천안읍치구역(천안삼거리공원/영남루/천안박물관)-점심식사 겸 뒤풀이-목천읍치구역(독립기념관/이동녕기념관·생가/유관순사적지/김시민유허지/홍대용생가지)-광덕사-서울의 순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35강 답사지인 <천안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나라에 전란이 일어나면 광덕산이 운다
천안은 금북정맥(錦北正脈)이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있으며 북쪽은 평택평야까지 탁 트인 얕은 구릉성 평지로 평택·안성과, 동쪽은 국사봉, 만근산, 망경산 줄기를 경계로 청주·진천과, 서쪽으로는 광덕산, 태학산을 경계로 아산과, 남쪽은 공주·세종시와 접하고 있습니다.
천안의 산줄기는 흑성산, 태조산, 성거산이 남에서 북으로 이어져 천안을 동서로 나누고 남서쪽 끝에는 광덕산이 높이 솟아 있습니다.
광덕산(廣德山 699m)은 아산시 송악면과 천안시 광덕면 경계에 있는 천안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예로부터 산이 크고 풍후(豊厚)하여 광덕이라 하였는데 나라에 전란이 일어나거나 불길한 일이 있으면 산이 운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광덕산에는 광덕사, 잣나무군락지, 장군바위, 강당사 등이 기대고 있으며 이밖에도 호도나무 전래비와 조선시대 기생 김부용의 묘가 있습니다.
흑성산(黑城山 519m)의 본래 이름은 ‘검은산’인데, 이 산을 중심으로 김시민, 이동령, 이범석, 유관순, 조병옥 등 많은 구국열사가 배출되었으며 일제 때 '검다'는 뜻을 그대로 옮겨서 '흑성산'으로 바꿨으며 지금은 독립기념관이 들어서 있습니다.
태조산(太祖山 421m)은 고려 태조가 930년(태조 13) 후백제 신검(神劍)과 대치할 때 술사 예방의 인도로 이 산에 올라 군대의 주둔지가 될 만한 곳을 살폈다 하여 태조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산줄기가 원성천과 산방천(山方川)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으며, 능선을 따라 북상하면 성거산을 거쳐 유서깊은 위례성(慰禮城)에 이릅니다.
이 산에는 태조가 산신제를 지냈다는 제단의 흔적이 남아 있고, 왕이 머물렀다는 유왕골[留王谷], 유려왕사(留麗王寺) 등의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산 중턱에 천년고찰 성불사(成佛寺)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거산(聖居山 579m)은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을 때 천안시 직산읍 산헐원을 지나다가 동쪽의 이 산을 보고 신령이 있다면서 ‘성거산’이라고 부르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는 내력을 갖고 있습니다. 정상에는 성거산성이 남아있고 산 중턱에 만일사(晩日寺)가 있으며 산자락에는 고려시대 이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천흥사지(天興寺址)가 있는데, 현재 절터는 마을로 변하였지만 5층석탑과 당간지주가 남아 있습니다.
천안의 물줄기로는 북부지역은 성환, 성거, 직산, 입장의 물줄기들이 안성천(安城川)으로 모아져 서해로 흘러들고, 동부지역은 성거, 진천, 전의가 분수령이 되어 미호천(美湖川) 상류를 이루어 금강으로 유입되며, 서남부지역은 직산, 목천읍계가 분수령이 되어 곡교천(曲橋川)으로 모아져 서해로 흘러듭니다.
천안은 삼남(三南)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중추적인 지점에 해당되어 역사적으로 마한(馬韓)의 목지국(目支國), 백제의 초도(初都) 위례성(慰禮城), 고려 태조의 천안부(天安府)가 있었던 곳입니다. 천안, 목천, 직산을 통과하는 금북정맥의 산줄기가 하천과 만나면서 형성된 거대한 구룡농주형(九龍弄珠形)의 길지(吉地)로서 외사룡(外四龍)과 내오룡(內五龍)이 역동적인 바람개비 모양으로 명당을 이루고 있습니다.
고려 건국 이후 한반도의 중심이 중부지방으로 이동하여 천안은 한반도 중부에서 남부로 통하는 교통상의 요충지로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하였으며 ‘천안삼거리’의 명성도 이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경기 일원에서 영남과 호남으로 갈 때는 반드시 성환역(成歡驛)을 통하여 직산고을로 들어서서 천안삼거리에 이르러 서쪽의 차령(車嶺)을 넘으면 공주를 거쳐 호남으로 가게 되고, 동쪽의 청주를 거쳐 추풍령을 넘으면 경상우도(慶尙右道)로 거게 되고, 충청우도(忠淸右道) 내포지역의 중심지였던 홍주(洪州)를 가기 위해서도 천안을 지나 아산으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삼남대로의 분기점 천안삼거리
천안삼거리는 삼남대로의 분기점으로 서울에서 내려오는 대로가 천안에 이르면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한 길은 병천을 거쳐 청주로 들어가 문경 새재를 넘어 상주, 영동, 김천, 대구 감영, 경주, 동래로 통하는 길이요, 한 길은 공주 감영을 거쳐 논산, 전주, 광주, 순천, 여수, 목포 등지로 통하는 길입니다.
가까이에 있는 성환역은 충청우도의 찰방역으로 주변의 여러 역원을 관할하는 중요한 국가 시설이었습니다. 온양온천과 청주의 약수터로 가는 국왕의 행차를 비롯해 유명 인물이 이곳에 머물렀고 그에 관한 기록이 다수가 전해지고 있으며 특히 현종의 온양 행차에 대해서 송시열이 <화축관기문(華祝館記文)>과 직산 <영소정기문(靈沼亭記文)>에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천안의 역사가 기록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삼한시대로, 마한 목지국의 터전이 지금의 직산지역으로 비정되기도 하는데 이곳은 신라 시대에는 대록군(大鹿郡)과 그 영현이었던 순치현(馴雉縣)이 있던 지역입니다. 대록군은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여 목주(木州)라 한 곳이며 또한 백제의 온조가 옛 마한지역을 통일하고 백제를 건국할 때 환성(歡城)이라 한 곳으로 위례성(慰禮城)이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위례산성이 바로 그 유적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으나 정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천안은 천안군(天安郡), 직산현(稷山縣), 목천현(木川縣)의 세 군으로 발전해 오다가 1914년에 이르러 통합되어 천안군이 되었으며 1963년 천안시와 천원군(天原郡)으로 갈라졌다가 1991년 천원군이 천안군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1995년 시와 군이 분리된 지 33년 만에 천안시로 통합되었습니다.
천안군은 고려를 건국한 태조가 930년(태조 13) 탕정(아산시), 대목악(목천), 사산(직산) 등 주변지역의 땅을 각각 분할하여 천안도독부(天安都督府)를 설치하였고 995년(성종 14)에 환주(歡州)라 하여 도단련사(都團練使)를, 1018년(현종 9) 천안이라 하고 지부사(知府使)를, 1310년(충선왕 2) 영주(寧州)라 하였다가 1362년(공민왕 11) 다시 천안부가 되었는데 별호는 임환(任歡)이었습니다. 조선에 이르러 1413년(태종 13)에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군수도(郡守都)로 책정되어 영산군(寧山郡)이라 하더니 1416년(태종 16)에 다시 천안으로 복칭되었습니다.
직산현은 본래 마한의 목지국(目支國)의 옛터로 마한 70여 개 나라의 중심지였으며, 백제 때는 위례성(慰禮城)이라 불렀고 백제 온조왕이 졸본부여(卒本夫餘)로부터 남하하여 나라를 열고 이곳에서 개국하였다 합니다. 후일에 고구려가 사산현을 설치하였고, 신라 때는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고려시대에 비로소 군명을 직산으로 고쳤고 1018년(현종 9)에 천안부에 소속되어 감무를 두었으며 조선시대에는 1393년(태조 2)에 직산을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다가, 1401년(태종 원년)에 강등하여 다시 감무를 설치하였습니다.
목천현은 고대에 마한의 영지로 있다가 백제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하고 동북 백리의 땅을 마한 왕에게 양도받으니 바로 목천이 그 남전(南甸)에 해당한다고 전하고 있으며 후일 백제는 이곳에 대목악군(大木嶽郡)을 설치하였습니다. 757년(경덕왕 16)에 대록군(大麓郡)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풍세면에 해당되는 순치현(馴雉縣)과 전의에 해당하는 금지현(金池縣)을 대록군의 속현으로 삼았으며 고려 초기에는 목주(木州)라고 하며 청주(淸州)의 속현으로 삼았고 성종 때부터 신정(新定)이란 별칭으로 불렀고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를 배치하였습니다.
행궁 화축관의 문루 영남루
읍치구역에는 천안군에 영남루가, 직산현에 관아와 향교가, 목천현에 향교가 남아 있습니다.
영남루(永南樓)는 1602년(선조 35)에 세운, 임금이 온천 갈 때 머물던 행궁인 화축관(華祝館)의 문루로 추정됩니다. 본래 중앙초등학교 정문에 있던 것을 1959년에 이곳으로 옮겼으며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앞면 중앙에 층계가 있으며 건물 안에는 우암 송시열이 지은 기문(記文)이 남아있습니다.
화축관은 역대 왕의 온양온천 행차 시 임시 거처로 사용하던 행궁(行宮)입니다. 조선 초에는 아무 건물도 없는 홍경원 벌판에서 유숙을 하기도 하였는데, 1602년(선조 35)에 천안 군수 노대하(盧大河)가 화축관을 세워 그 뒤로 국왕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며,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이동하던 와중에 1624년 2월 천안에 도착해 화축관에 머무르다 관군의 승전 소식을 듣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화축관은 관아의 서쪽에 있으며 정청(政廳) 10칸, 동, 서랑(東西廊) 각 5칸, 시녀방(侍女房) 3칸, 정문(正門) 2칸의 큰 규모였다고 하며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지도에는 천안군 읍치의 아사(衙舍)와 객사(客舍) 건물 사이에 화축관이 그려져 있습니다.
화축관은 건립 이후에 여러 차례 고쳐지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경찰서 숙소 및 헌병대 사무실로 사용되면서 크게 훼손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학교 관사로 활용되다가 헐리고 문루인 영남루만 남아 있다가 1959년 천안삼거리공원으로 이전 복원됨에 따라 화축관터에는 화축관과 관련된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고 현재 천안 중앙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습니다.
직산현 관아는 조선시대 직산현의 관청으로 내동헌, 외동헌, 내삼문, 외삼문 등 4동의 건물이 남아있는데 가장 앞쪽에 위치한 외삼문은 관청의 정문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서 아래층 3칸에는 문을 달아 동헌으로 통하도록 하였고 위층에는 마루를 설치하였으며 '호서계수아문(湖西界首衙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직산향교(稷山鄕校)는 1588년(선조 21)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841년(헌종 7)에 중수하였는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재(東齋), 서재(西齋), 신문(神門)이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목천향교(木川鄕校)는 1523년(조선 중종 18)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으나 후에 다시 세우고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하다가 참봉 한혁(韓赫)이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습니다. 향교의 배치 구조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대성전은 임진왜란 직후에, 명륜당은 1642년에 건축되었으며 현재 대성전에는 오성(五聖), 공문십철(孔門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동국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교통 요충지라 산성도 많다
천안은 삼남으로 통하는 요충지여서 관방시설인 산성이 많이 축조되었습니다.
사산성(蛇山城)은 성산(176m)의 계곡을 감싸고 둘러쌓은 토성(土城)으로, 성의 둘레는 2,947척이며 성안에 우물터가 1개 있었다고 하며, 5~6세기 전반의 백제나 고구려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와 6세기 후반의 신라계 유물에 속하는 굽다리접시(고배), 줄무늬 격자무늬를 새긴 기와조각 등이 발견되었는데 학계에서는 마한 목지국이 쌓은 성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세성산성(細城山城)은 세성산(180m)의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성으로 석성인 내성과 그 남쪽 기슭에 토성인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성의 둘레는 350m, 높이 3m로 경사가 급하고 폭 2.8m의 동문터가 있습니다. 내성에서는 격자무늬, 민무늬의 기와조각과 토기조각이, 외성에서는 삼국시대 적갈색 토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성거산성(聖居山城)은 성거산(579.1m) 정상에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 약 550m이며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성이었으나 뒤에 돌로 보완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거산성은 위례산성의 익성(翼城)으로 보이며 이렇게 볼 때 성을 쌓은 시기는 삼국시대로 추정되나 임진왜란 때 목천현과 직산현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쌓았다고 전하기도 하여 정확한 축성 연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흑성산성(黑城山城)은 흑성산 정상에 테뫼식 석성으로 성의 둘레는 570m이며 산성의 대부분이 훼손되어 본래의 모습을 찾기 힘든 상태이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성안에는 우물 1개와 샘 1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위례성(慰禮城)은 위례산(525.9m)의 정상에 쌓은 테뫼식 산성과 포곡식 산성의 복합식 산성입니다. 둘레는 950m인데 성벽은 약 40m 정도 남아있으며 문지, 우물지, 장대지, 여장, 적석유구 등이 남아있으며 백제에서 조선시대까지의 각종 토기편과 자기편, 기와편과 토제말, 철기류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산성의 축조시기를 밝히기 위해 몇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1995, 1996년 조사에서는 성벽의 축조시기를 4세기 말에서 5세기 전반으로 추정하였으나 2009년에서 2011년에 걸쳐 정밀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축조되고, 고려시대에 다시 수축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성의 내부에서 다량의 백제시대 유물이 확인되었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비롯해 조선시대 역사서에는 백제의 초도지로 '직산위례성'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를 근거로 위례성을 백제의 초도지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다만 위례성은 주변에 위치한 성거산성 등과 함께 직산 일대를 방어하는 배후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큰 인물 많이 낸 구룡농주(九龍弄珠)의 명당터
천안은 구룡농주(九龍弄珠)의 명당터라서 큰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한명회(韓明澮)는 자가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鴨鷗亭)으로 두 딸이 각각 예종비 장순왕후, 성종비 공혜왕후가 되었는데 1452년(문종 2) 개성의 경덕궁직을 시작으로 관직에 올랐습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수양대군의 심복이 되어 큰 공을 세워 1등 공신이 되었고 세조 1456년(세조 2)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좌절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여 도승지, 이조판서에 이어 병조판서에까지 올랐고, 이후 여러 차례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1471년(성종 2)에는 영춘추관사로서 <세조실록(世祖實錄)>의 편찬에도 참여하는 등 세조 이래 성종 대까지 높은 관직을 두루 섭렵하고, 네 차례에 걸쳐서 1등공신이 되어 많은 토지와 노비를 받아 여유로운 삶을 누리며 살았으며 죽은 후에는 세조의 묘정에 그를 기리는 신주가 모셔졌고, '충성(忠成)'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 장군은 고려 충신 김방경(金方慶) 장군의 12대손이며 김충갑(金忠甲)의 셋째 아들로, 1554년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25세 때인 1578년(선조 11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를 제수받았고 1591년 진주 판관에 임명되었으며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격해오는 왜군을 크게 격파한 공로로 7월 말 진주목사로 발탁되었습니다.
1592년 10월 5일 제1차 진주성 전투 때 왜군 3만여 명을 아군 3,800여 명의 적은 군사로 고군분투하였지만 장군의 탁월한 용병술과 전략전술로 왜군 2만여 명을 사살하는 대승리를 거두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이로써 진주대첩(晉州大捷)은 호남, 호서지역으로 진격하려던 왜군의 시도를 좌절시켰으나 장군이 승리를 거두고 성안을 순회 검시하던 중 왜적 한 명이 쌓인 시체 속에 숨었다가 쏜 총에 맞고 치료 중 1592년 39세를 일기로 장렬히 순국하였습니다.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은 1731년(영조7년)에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에서 태어났으며 북학파 학자들인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과 친교를 맺고 실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던 중 1765년(영조41년) 청나라에 가는 서장관 홍억(洪檍)의 군관으로 수행하여 북경에 가서 엄성, 반정균, 육비 등과 사귀면서 청조의 문물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게 되어 ‘배청 의리론’을 극복하고 주체적 세계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처음으로 지구자전설과 우주무한론을 주장한, 과학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조선시대의 가장 뛰어난 과학사상가였습니다.
그가 44세가 되던 1755년(영조 50)에 과거를 통하지 않고 특별히 임명되는 음관으로 종9품의 선공감의 말직인 감역이 되었고 이어 세손을 보필하는 세손익위사의 사직으로 지내다 정조가 즉위한 뒤 사헌부의 감찰, 태인 현감, 영주 군수 등을 지내다가 1783년(정조 7) 2월 풍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중국 친구인 반정균은 <담헌기(湛軒記)>에서 "담헌은 박문강기하여 보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이다. 율력, 전진의 법과 송학의 종지를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고, 시문으로부터 산수에 이르기까지 능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박문수(朴文秀)는 조선 후기 영조대의 문신으로서 호는 기은(耆隱), 시호는 충헌(忠憲)이며 서인계통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경종 3년(1723)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오명항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난을 평정하였습니다. 1729(영조 5) 영남절도사로 있을 때 함경도 지방에 수재가 있을 것을 미리 예상하고 영남 제민창에 있던 조 3천석을 보내 10여 고을의 수재민을 구했으며 왕명을 받고 여러 번 어사로 나가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어려운 백성들의 구제에 힘썼습니다. 1741년 어영대장이 되었고 1749년(영조 25) 호조판서로 있을 때 다른 신하들과 함께 궁궐과 중앙정부의 재정 용도를 규정한 <탁지정례(度支定例)>를 출판하여 국가경비를 절감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는 1747년(영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752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 홍문관 교리 등을 거치고 사간원 대사간,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등 3사의 수장을 두루 거쳐 최고의 영예를 누렸습니다. 2차례에 걸쳐 중국을 다녀오면서 석학들과 교류하여 고증학을 수용, 보급하는데 크게 공헌했으며 학문과 문장뿐만 아니라 글씨 또한 명필이었습니다.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은 천안시 목천읍 동리에서 1869년 태어나 22세 되던 1892년에 응제진사시(應製進士試)에 합격하고 1897년에는 독립협회 활동으로 7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이 있은 후 서울에 올라가 상동청년회에 가입하여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동청년회원들과 함께 결사대를 조직하여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며 을사조약을 즉시 철회할 것을 요구하다가 감옥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났습니다.
이후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은 실효가 없음을 깨닫고 1905년에 이상설(李相卨) 등과 북간도의 용정에 망명하여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하였고 1907년에 귀국하여 안창호, 신채호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습니다. 1910년에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 이시영, 이강영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고 1913년 블라디보스톡에서 권업회를 조직하였으며 1919년 상해임시정부 초대의장이 된 이후 의정원 의장 3회, 주석 4회를 역임하였고 1928년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여 이사장이 되었으며, 1935년 한국국민당 간부로 활약하였으나 1940년 중국 사천성에서 급성폐렴으로 서거하였는데 1948년 김구의 주도로 봉환하여 효창원에 안장하였습니다.
유관순(柳寬順)은 1902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한말 민족계몽운동가이면서 유빈기, 조인원 등 향리의 유지들과 함께 교회를 세워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선교사 샤프 부인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가서 신학문을 배우던 중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과 함께 시작된 ‘대한독립만세운동’은 같은 달 5일 학생단 시위로 확산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의 휴교령이 내려지자 유관순은 고향 병천에 내려와 김구응, 조인원, 유증무 등 뜻을 같이하는 고향의 인사들과 함께 4월 1일 장날을 이용하여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다시 일으켜 공주감옥에 수감되었고 1919년 8월,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뒤 3.1절 1주년을 기념하는 만세운동을 옥중에서 전개하다가 일제의 모진 고문을 못 이기고 1920년 9월 28일 옥중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사찰로는 홍경사(弘慶寺)가 있는데, 고려 현종(顯宗)이 큰 절을 지어 나그네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자 했던 아버지 안종(安宗)의 뜻을 받들고자 지은 절입니다. 홍경사가 세워진 곳은 직산현(稷山縣) 성환역(成歡驛) 근처였는데, 그곳은 사람들의 통행이 많았지만 여행자들의 숙소가 없고 강도들이 출몰하였기에 홍경사의 창건은 단순히 불교 신앙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자 함이었는데, 현종은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하여 특별히 사찰 옆에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는 객관(客館)을 함께 지었습니다.
홍경사 건립은 1016년(현종 7)에 시작하여 1021년(현종 12)에 완성되었으며, 절은 조선 초기에 철폐되고 원(院)만이 남아 홍경원이라고 불리었고 지금은 그 터에 홍경사의 창건 내력을 기록한 ‘봉선홍경사사적갈비(奉先弘慶寺事蹟碣碑)’만이 남아 있습니다.
갈비(碣碑)란 머릿돌이나 지붕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신(碑身)의 끝 부분을 동그랗게 처리한 비를 말하는데, 홍경사 갈비는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봉선(奉先)이라 함은 곧 안종의 뜻을 받들어 사찰을 조성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비문은 1026년(현종 17)에 왕명으로 최충(崔冲)이 찬술하고 백현례(白玄禮)가 글씨를 썼습니다.
천흥사(天興寺)는 고려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성거읍 천흥리에 있는 천흥사터에는 당간지주가 60cm의 간격을 두고 동, 서로 서 있습니다. 5층석탑은 2단의 기단 위에 거대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고 절터에서 출토된 천흥사 동종에 새겨진 명문에 고려 현종 원년으로 되어 있어 당간지주와 5층석탑도 같은 시대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