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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벗으면 '걸레'? 남자가 벗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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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벗으면 '걸레'? 남자가 벗으면…

[프레시안 books] <여자다운 게 어딨어>

공중 화장실에 갈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남녀 화장실을 구분한다. 보통 여성용 화장실에는 동그라미 얼굴과 삼각형 몸체가 그려졌다. 남성용 화장실에는 동그라미 얼굴과 길쭉한 직사각형 몸체가 그려졌다. 그림이 없다면 글로 표기된다. 글을 못 읽어도 구분에 어려움은 없다. 보통 여성용 화장실은 핑크색 글씨로, 남성용 화장실은 파란색 글씨로 표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딱히 밑줄 쳐 가며 남성과 여성의 상징을 배우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둘을 구분한다. 태어난 이후부터 성 구분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남녀에게 어떤 상징을 강요했고, 우리는 이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여 삶의 준거로 삼았다. 당연히 여성이 핑크색을, 남성이 파란색을 특별히 선호할 리 없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소년에게 (활동적인 색인) 분홍색, 소녀에게 (섬세한 색인) 푸른색 옷을 입혔다.

구분은 생각을 강요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푸른색 옷을 입히고 키운 남자아이가 활동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분홍색 옷을 입히고 키운 여자아이에게는? 상냥하고 조용한 사람,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몸을 가꾸는 사람, 모든 남자를 반하게 하면서 똑 소리나는 전문 지식을 겸비한 사람, 그럼에도, 결혼 후 출산을 하면 가족을 위해 내 커리어를 버릴 용단을 내릴 사람이 되길 기대한다. 아마, 큰 틀에서 이 지레짐작은 우리 70억 인류의 기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강요된 생각은 여성의 삶을 규제한다. 우리는 한 아이돌 출신 스타의 노브라 사진에 분노하는 대중을 마주했다. 왜 노브라는 혼나야 하는가. 여성의 가슴은 남자의 욕망을 위해서만 드러낼 수 있고, 그 외에는 숨겨야 하는 신체 부위라는 생각을 강요하고,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슴을 내놓는 이유가 '사내들'이 아닌 다른 것일 리 없다. 바비큐를 하는 남성들 대부분이 상의를 벗는 이유가 명백히 신체적 편의를 위해서라는 것은 문제없이 이해받지만, 여성의 몸은 공공이 소유한 재산이기에 남을 흥분시키기 위해서가 아닌 다른 이유로 옷을 벗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남성이 자신의 몸에 대해 내리는 결정은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해 내리는 결정은 자신이 아닌 다른 모두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여성의 가슴에 대한 금기는 정장을 입은 남자들의 주머니를 채울뿐더러 성범죄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문화와 강간 옹호를 비롯한 성 차별적 태도를 허용한다. 남성용 잡지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남성의 눈요기를 위해 가슴을 노출하는 거라면, 가슴골을 드러낸 여성들은 죄다 그런 걸 거다. 가슴을 내놓은 여자가 있다면 아마 걸레일 것이다. 걸레가 아니라면 어째서 옷을 그렇게 입었겠는가? 갑자기, 가슴을 충분히 가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은 성적으로 밝히는 여자 취급을 받고, 남성들을 자극하지 못해 안달이 났다고 해석된다.
TV 방송에 나와 겨드랑이털을 자랑스럽게 드러냈다는 이유만으로 일약 유명인사가 된 '겨털녀' 연극학자 에머 오툴(Emer O'Toole)의 저작 <여자다운 게 어딨어>(박다솜 옮김, 창비 펴냄)는 평범한 여자아이, 즉 다이어트에 목을 매고, 제모에 집착하고, 아름다운 주인공이 되려 노력하던 저자가 서서히 여성에게 가해진 젠더 규제의 부당함에 눈떠가는 과정을 코믹하게 서술한 책이다.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강제하는 '여자다움'에 대한 저항 일기로 이해할 만하다.

저자의 일상이 주요 소재가 된다. 이에 주디스 버틀러, 산드라 벰, 피에르 부르디외, 에리얼 레비 등 선대 사상가가 제시한 여러 개념이 동원한다. 덕분에 페미니즘이나 현대 철학에 무지한 이에게 이 책은 킬킬대며 읽을 만한 페미니즘 입문서로 손색 없다.

책에서 저자는 '여성다움을 연기'하는 데 평생을 소모하는 여성에게 그렇게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책이 겨냥한 독자는 몸매 관리에 목을 매고, 가슴 확대 수술을 받을지 고민하고, 목 아래의 모든 털을 밀어버릴까 고려하는 평범한 현대 여성이지만, 저자의 주장은 남성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드러내진 않았지만, 저자는 여성에게 특정 젠더 성향을 강요하는 남성을 향해 '생각의 틀을 바꿔보라'고 간접적으로 권유한다.

저자는 남장한 채 헬로윈 파티에 나선다. 삭발하고 거리를 돌아다닌다. 동성과 섹스한다.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그저 남자 옷을 걸치고 조악한 수염을 붙였을 뿐인데, 남자들은 그녀를 댄스홀의 경쟁자로 인식했다. 남성의 옷을 입자, 남성처럼 춤을 추려 의식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삭발하자 주위 사람들이 그를 동성애자로, 공격적인 사람으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저 긴 머리를 잘랐을 뿐인데 말이다.

'남성다운 옷'을 입는다는 건, 남성다운 젠더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역으로, '여성다움'을 수행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생물학적 여성이 규정된 '여성다움'을 행해야 할 어떤 의무도 없다. 하지만 사회는 여성에게 '여성다움'을 연기하라고 강요한다. 저자는 이와 같은 실험을 통해 사회가 강제한 여성성에 대항하고, 나 다운 나로서 살아가야 함을 인지했음을 독자에게 알린다.

젠더를 다르게 연기하는 데에는 급진적 잠재력이 깃들어 있다. (…) 일단 맛을 들이고 나면 일상의 각본을 다시 쓴다는 것이 전만큼 힘겹게 느껴지지 않는다. 당신은 점차 연기를 '실제'의 영역으로 넘겨줄 준비가 되었다고 느낄 것이다. (…) 그로써 당신은 다른 사람들도 새로운 젠더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세계, 우리가 여성과 남성이기 이전에 인간인 세계를 창조하게 된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은 그저 의상일 뿐이다. 세계는 연극이고, 우리는 모두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의상이고, 연극이고, 연기다. 젠더라는 안무를 받은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다. 모든 것은 분장에 지나지 않는다.
평범했던 아일랜드 시골 출신의 저자가 자라면서 서서히 수천 년간 사람들이 보호해 온 젠더 역할의 부당함을 깨닫는 과정은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남자 형제와 함께 자란 저자는 자연스럽게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집안일을 도왔다. 아버지와 오빠, 동생은 자연스럽게 집안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저자는 자연스럽게 예쁜 아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함을 깨달았다. 미디어, 가족, 친구, 그 외 저자의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이 저자에게 바비 인형처럼, 어머니처럼, 신데렐라처럼 살 것을 꿈꾸기를 강요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 <여자다운 게 어딨어>(에머 오툴 지음, 박다솜 옮김, 창비 펴냄.) ⓒ창비
부당함을 느낀 저자는 강요된 여성으로서가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서 살기 위해 이 집단 무의식에 저항한다. 당연히 격렬한 저항이 이어진다. 그저 겨드랑이털을 깎지 않았고, 이를 자랑스럽게 대중에게 공개했다는 이유만으로 저자는 언론의 취재 대상이 된다. 저자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낸 남성들은 "너를 강간하겠다"는 식으로 노골적인 증오를 뿜어댔다. 그럼에도 저자는 코웃음을 치며,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강제한 젠더 역할의 틀을 깨는 것만이 더 다양한 삶이 존중받는 사회, 사람이 진정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는 지름길임을 믿는다고 강조한다.

저자의 말대로 "여성은 자신의 성차별적 사고를 자각하고, 성‧인종‧계급을 근거로 한 여성들 간의 억압을 직면한 뒤에야 다른 여성과 연대하여 불평등에 맞서 싸울 수 있"다. 자각은 더 넓은 눈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나는 나 자신의 성차별적 편견을 경험한 뒤 평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다른 편견들에 대한 자각이 이어졌다."

올해 한국 사회를 가른 가장 뜨거운 논쟁은 인터넷의 공격적 페미니즘에 관한 호오다. 이에 관한 자신의 의견(으로 무장한 편견)을 스스로의 기존 태도를 강화하는 데 성급하게 이용하려 하기 전에, 우선 현대 여성의 삶이 어떤가를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명함에 미스(Miss) 대신 '박사'를 표기하자 (성별을 짐작하지 못해)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경험을 하는 저자의 삶, 곧 현대 여성의 삶은 당사자가 아니라면, 나아가 당사자인 여성이라손 치더라도 그 부당함을 자각하기 전에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삶의 궤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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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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