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생각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땅!
광활한 만주벌판에 우리 선조들이 남긴 역사의 현장, 특히 항일유적지를 직접 방문해 깊고도 넓게 공부하는 <간도답사학교>가 오는 10월 문을 엽니다. 교장선생님은 최연 선생님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역사현장의 체험과 스토리에 특히 강한 전문가이자 답사 인솔자로 유명합니다. 민족문제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일제강점기의 ‘항일무장투쟁사’에 특히 관심을 갖고 문헌과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하다가 그 현장에 가봐야겠다는 강한 욕구에 이끌려 심양과 단동을 여러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마다 정리한 자료를 중심으로 현지의 한인협회 임원들의 안내로 현장답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간도지방의 여행은 백두산과 고구려 유적지 중심의 관광만 있었고 항일무장투쟁 유적지는 버려진 채 잡초만 무성한데다 도로사정과 교통편도 불편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중국의 동북공정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간도 일대의 항일유적지에 대한 주변정리가 일부 이루어졌고 도로와 교통편도 많이 나아져 유적지를 돌아보는데 그전의 어려움을 일부 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늘 생각해 왔던 ‘간도의 항일투쟁유적지’ 답사를 함께 해보려고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아 지난 3년간 여러 팀의 답사를 진행하면서 수정, 보완하여 이제 <간도답사학교>를 열게 되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간도답사학교를 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만주(滿洲)는 광활한 벌판입니다. 청 태조(淸太祖)가 여진족의 각 부족을 통일, 후금(後金)을 세우고 스스로 만주한(滿洲汗)이라 칭하자 이때부터 여진족을 달리 ‘만주족’이라 하였고, 청 태종은 ‘후금(後金)’을 ‘만주’로 개칭하여 비로소 ‘민족’과 ‘영토’의 이름을 통일하였습니다. 오늘날 중국의 동북3성(東北3省), 즉 요령성(遼寧省), 길림성(吉林省), 흑룡강성(黑龍江省)과 더불어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의 동부지역을 포괄하는 땅이 만주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웅거하던 ‘광활한 만주벌판’ 간도
만주지역에는 우리의 선조인 고조선, 고구려, 발해가 웅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말갈족(靺鞨族), 선비족(鮮卑族), 거란족(契丹族), 여진족(女眞族), 몽고족(蒙古族), 만주족(滿洲族) 등이 삶의 터전을 이루면서 성장, 소멸해 갔습니다. 특히 만주족의 청조(淸朝)가 이곳을 차지하면서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 두만강 북쪽의 1,000여 리 되는 지역을 청조의 발상지(發祥地)라 하여 통행할 수 없는 봉금지역(封禁地域)으로 정했습니다.
봉금지역에는 청국인, 조선인 모두 이주할 수 없어서 아무도 살지 못하는 곳이 되었기에, 청과 조선 사이[間]에 놓인 섬[島]과 같은 땅이라는 뜻으로 ‘간도(間島)’라 하였습니다. 압록강(鴨綠江)과 송화강(松花江)의 상류인 백두산 일대의 서간도(西間島)와 두만강(豆滿江)의 북부지역인 북간도(北間島)로 나누어 부릅니다.
간도는 두만강의 여러 지류(支流)의 연안(沿岸)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에 땅이 기름지고 산림이 무성하였으나 토착 여진족은 농경보다 유목, 수렵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이주해 간 조선인이 간도를 개척하여 농경지로 만들었고 그곳에 논농사도 처음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간도에 조선인이 대거 이주한 시기는 철종 대부터 고종 대까지로, 세도정치의 학정과 수탈에 못 견딘 백성들과 함경도 지방의 대흉년으로 기아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두만강을 건너 이곳으로 들어가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이처럼 간도에 정착한 조선인은 근면 성실한 노동의 대가로 생산량이 늘어나 물산이 풍부해졌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이 일제의 압정을 피하여 더 많이 간도로 이주하였기에 인적자원도 함께 풍부해졌는데, 이러한 조건들은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간도, 마침내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다
북간도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기지는 용정(龍井)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이상설(李相卨)이 세운 간도 최초의 서전서숙(瑞甸書塾)를 비롯하여, 서전서숙을 계승하여 김약연(金躍淵) 등이 세운 명동학교(明東學校)와 당시 용정에 있던 은진, 광명, 명신여자, 영신, 대성, 동흥 등 6개 중학교가 통합된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가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청장년의 독립군 편성을 은밀히 추진하였습니다.
북간도의 또 다른 기지는 왕청현(汪淸縣)의 나자구(羅子溝)였습니다. 이곳에서 서일(徐一) 등은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들을 모아 중광단(重光團)을 조직, 북간도 무장독립운동의 효시가 되었으나 군사활동은 못하였습니다. 그후 대종교(大倧敎) 교도를 모아 정의단(正義團)으로 개편, 군사활동을 펼치다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재편되어 항일무장투쟁에 나서게 되었고 산하에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사관양성소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소만(蘇滿) 국경 지역인 밀산현(密山縣) 봉밀산(蜂密山)에 이상설, 안중근, 유인석 등이 황무지를 구입하여 100여 가구를 정착시켜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한흥동(韓興洞)이라 하였습니다. 이곳에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세우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기반을 닦았으며 신민회의 이동휘(李東輝)도 깊은 산속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훈련시켜 독립전쟁에 대비하였습니다.
서간도의 대표적 독립운동기지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였습니다. 이상룡(李相龍), 이시영(李始榮), 이회영(李會榮), 이동녕(李東寧) 등이 이곳에 경학사(耕學社)라는 항일단체를 조직하고 군사교육기관인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여 신흥학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이곳에서 양성된 사관들은 간도와 연해주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청산리대첩의 주역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경학사가 흉년과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자 이상룡이 부민단(扶民團)을 만들어 그 뜻을 이어갔습니다. 통일적인 독립운동기구가 필요하여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고 산하단체로 남만주 독립운동의 총본영인 군정부(軍政府)를 구성하였다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더불어 그 관할하의 서간도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확대, 개편하였습니다.
이렇듯 간도는 나라를 빼앗긴 지식인들이 망명하여 새로운 이상촌을 만들어 민족교육기관을 세워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하였던 곳이며 나아가서 조선의 의병들이 두만강 건너 와서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위해 독립군의 대오를 갖추어갔던 곳이기도 합니다.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 연안의 독립운동유적지 둘러보기
이렇듯 유서깊은 항일유적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중국 내의 항일유적지를 찾아나서는 일은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전적지의 위치도 불분명하였고 진입하기 위한 도로도 마땅치 않아 먼발치서 눈대중으로 훑어보고는 발길을 돌려야만 하는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그러던 중 중국의 동북공정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중국내 한인사회에서 항일투쟁전적지에 대한 자료발굴과 현장조사가 많이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전적지들은 쉽게 둘러 볼 수 있도록 표지석과 기념탑도 세워졌습니다. 차제에 최신 자료를 취합하여 관심 있는 이들과 함께 무리지어 간도지역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유적지를 수차례 답사하여 가장 ‘짧은 동선’과 ‘적은 시간’에 ‘집약적인 답사’를 할 수 있는 코스를 개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여러 차례의 수정과 보완을 거쳐 도달한 결론은 백두산을 비롯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연안에 있는 도시인 훈춘, 연길, 용정, 도문, 통화, 단동, 대련과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둘러보고 그곳에서 벌어졌던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판을 벌여보기로 하였습니다.
다만 5박6일의 일정에 맞추다 보니 안중근 의사의 거사장소인 하얼빈과 두 번째와 세 번째 관동군사령부가 있었던 심양(봉천)과 장춘이 제외된 아쉬움이 남습니다.
개교 기념으로 10월 답사를 준비 중인 교장선생님은 답사지 얘기를 들어봅니다.
동해로 나갈 수 없는 중국의 접경도시 훈춘
훈춘(琿春)은 만주어로 ‘변경’이란 뜻인데 두만강의 지류인 훈춘강 서안에 있으며 러시아의 핫산, 북한의 나진과 함께 삼국의 접경도시 임에도 불구하고 동해와 맞닿아 있지 않아 동해로의 해상진출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러시아, 한국과의 국경에 가까워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 때에는 러시아의 침입경로가 된 곳이며, 조선말에는 많은 조선의병들이 건너온 곳이기도 한데 1860년 러시아와 청국(淸國)의 조약으로 동쪽의 일부를 러시아에 할양하였습니다.
일제가 마적단을 매수하여 독립운동가를 무차별 학살한 훈춘사건
훈춘사건은 1920년 일본이 3·1운동을 계기로 활발해진 한만(韓滿) 국경 부근의 독립군을 토벌하려고 파견된 군대가 봉오동전투에서 패배하자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해 벌인 사건입니다. 마적 수령 장강호(長江好)를 매수, 마적단으로 하여금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게 하고 이 사건을 빌미삼아 마적 토벌이라는 구실로 나남사단(羅南師團)을 비롯한 3개 사단을 출동시켜 일대의 조선인과 독립운동가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한민회와 독립단 조직을 파괴한 사건입니다.
두만강을 건너온 조선의 백성, 용정에 정착하다
용정은 두만강을 건너간 우리 민족이 정착한 곳으로 1880년경 한국인이 처음 찾아냈다는 용두레우물이 용정(龍井)이란 지명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海蘭江)이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고 장춘(長春)에서 도문(圖們)까지 연결된 장도철도(長圖鐵道)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윤동주가 민족의식을 함양하던 대성중학교
용정중학(龍井中學)은 옛 대성중학교 터에 세워진 학교로 1946년 광명중학교, 은진중학교, 대성중학교 등 용정 지역의 6개 학교를 통폐합하여 세웠는데 항일민족시인 윤동주는 용정중학의 전신인 광명중학교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대성중학교 옛 건물 안에는 윤동주가 학교 다니던 시절의 교실 모습을 복원한 ‘윤동주교실’이 문을 열어, 수업 장면을 담은 그림을 걸어놓고 윤동주가 공부했던 책상 위에 윤동주 조각상이 놓여 있습니다.
명동촌, 마침내 민족교육의 산실이 되다
명동촌(明東村)은 1899년 문치정(文治政) 김하규(金河奎) 김약연(金躍淵) 남위언(南葦彦) 등 네 집안에서 142명이 이상촌 건설을 목적으로 북간도 ‘부걸라재’로 이주하여 형성된 북간도 지역 민족교육운동의 중심지였습니다. 명동촌이 자리한 곳의 원래 이름은 ‘비둘기바위’라는 뜻을 지닌 ‘부걸라재[鵓鴿磖子]’였으나 이들이 이곳을 ‘동방, 곧 한반도를 밝히는 곳’으로 만들고자 ‘명동촌’이라 하였습니다.
이후 윤동주(尹東柱)의 증조부인 윤재옥도 가족을 이끌고 용암동(龍岩洞)으로 이주하여 용암, 장재, 대룡, 영암 등 4곳의 대표적인 마을을 명동촌이라 하였습니다.
한편 김약연은 ‘규암재(圭岩齋)’, 남위언은 ‘오룡재(五龍齋)’, 김하규는 ‘소암재(素岩齋)’라는 서재(書齋)를 각각 건립하였고, 1908년 이들 서재를 합하여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하여 서전서숙(瑞甸書塾)에서 근무했던 교사들을 초빙하여 그 맥을 이어갔으며 그 뒤 명동서숙은 명동학교, 명동중학으로 발전되었고, 더하여 명동여학교가 설립되어 명실상부한 북간도의 민족교육운동 본산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명동촌에는 윤동주 생가·명동학교가, 장재촌에는 3·13반일의사총과 윤동주·송몽규의 묘가 남아 있습니다.
항일독립운동사에 우뚝 선 이상설
이상설(李相卨)은 1906년 이동녕(李東寧) 등과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여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웠고 1907년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과 함께 고종의 특사로 참석하였습니다. 1909년 미국에서 최정익(崔正益) 등과 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하고 다시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 봉밀산(蜂密山)에 연해주 최초의 독립운동기지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였습니다.
1910년 유인석(柳麟錫), 이범윤(李範允)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해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고, 한일합병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연해주와 간도 등지의 한민족을 규합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습니다.
1911년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해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였고 1913년 이동휘 등과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를 세워 광복군 사관을 양성하였으며 1914년 이동휘, 이동녕 등과 중국과 러시아에서 동지들을 규합해 대한광복군정부를 만들었습니다. 1915년 상해에서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등 민족운동자들과 화합해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7년 3월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세상을 떴습니다.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웠던 관계로 대성중학교 옛 건물에 이상설기념관을 만들었습니다.
국내로 일본군을 습격, 유인하여 봉오동에서 승리를 거두다
봉오동전투는 홍범도(洪範圖), 최진동(崔振東) 등이 지휘하는 독립군이 함경북도 종성군(鐘城郡) 강양동(江陽洞)에 진입해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을 봉오동으로 유인, 급습함으로써 적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 명의 부상자를 낸 승과를 거둔 전투입니다.
봉오동은 왕청현(汪淸縣)에 있으며 두만강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하고 고려령의 험준한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쳐진 수십 리를 뻗은 계곡 지대입니다. 상촌, 중촌, 하촌 등 3개 부락에 100여 호의 민가가 흩어져 있는데 특히 상촌은 독립군 근거지의 하나로 최진동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간도 침략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일제가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훈춘사건(琿春事件)을 일으켜 독립군을 탄압하자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단은 화룡현(和龍縣), 이도구(二道溝), 삼도구(三道溝)의 삼림지대로 옮겨 새로운 근거지를 구축하였습니다. 이때 청산리전투는 일어났는데 1920년 10월 21일부터 6일 동안 김좌진(金佐鎭)의 북로군정서,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 안무(安武)의 국민군 등 독립군 연합부대 약 2천여 명이 두만강 상류 화룡현(和龍縣) 일대에서 5천여 명의 일본군에 맞서 2천~3천 명의 일본군을 사살하여 대승을 거둔 전투입니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세력은 동북항일연군으로 참여
한편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운동세력은 주로 중국군과 함께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참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화북에서 만주로 이동해서 잠시 재만(在滿) 한인세력을 흡수했던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 산하의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전자의 대표적인 인물은 김일성(金日成), 김책(金策), 최용건(崔庸健) 등이었고 후자의 대표적인 인물은 무정(武亭), 최창익(崔昌益) 등으로, 이들은 해방 후 북한정권을 수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중국인과 한인의 연합부대 성격을 띠고 있는 동북항일연군의 특징상 중국과 북한의 유대가 튼튼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북한의 국가건설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의 실질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통화(通化)에는 중국 공산당 지도하에 활동했던 동북항일연군 사령관인 양정우(楊靖宇) 장군의 능원과 당시 양 장군을 비롯한 항일투쟁의 주역들을 기념하기 위한 대규모 기념관이 조성되어있습니다. 다수 조선인들의 발자취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곳에 등재된 중국 동북지방 항일열사 100여 명 가운데 무려 20여 명은 조선인입니다. 특히 중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고 있는 ‘8명의 여전사’ 이야기는 기념관의 거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데 안수복, 이봉선이라는 두 명의 조선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국 땅 단동에서 북녘땅 신의주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단동(丹東)의 옛 이름은 안동(安東)으로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동쪽이 편안해졌다.' 고 붙여진 지명으로 1964년에 모택동이 “아침 해가 뜨는 붉은 도시”란 뜻으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북한과의 육로교역의 중심지로 압록강 위로 새로 건설한 철교와 차량이 다닐 수 있는 교량이 놓여 있어 단동과 신의주간에 교역이 터럭과 화물열차를 이용해 쉼 없이 진행되고 있는 현장이며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이 북한과의 혈맹관계를 과시하는 우호적인 기념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아지트, ‘조지 루이스 쇼’의 이륭양행
단동에 있었던 이륭양행(怡隆洋行)은 아일랜드계 영국인 ‘조지 루이스 쇼’가 1919년에 설립한 무역선박회사로 비밀리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국의 역할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의 망명, 독립자금 모집, 무기 반입, 연통제 운영 등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도 3·1운동 직후에 단동에 도착하여 이륭양행의 계림호를 타고 상해로 망명하였고, 정보가 누설되어 실패하기는 하였으나 의친왕 이강의 망명 시도도 이륭양행을 통하여 계획되었는데, 이러한 것이 가능하였던 것은 이륭양행이 일본영사관의 경찰권이 미치지 못했던 치외법권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백범의 망명 과정은 <백범일지(白凡日誌)>에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술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이레를 보낸 후 이륭양행 배를 타고 상해로 출발했다. 황해안을 지날 때 일본 경비선이 나팔을 불고 따라오며 정선을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인 함장은 들은 채도 않고 전속력으로 경비구역을 지나갔다. 그리하여 나흘 뒤 무사히 황포(黃埔) 선창에 정박했다. 그 배에 탄 동지는 모두 15명이었다.”
대련, 관동총독부가 되어 관동군사령부가 설치되다
일본은 청일전쟁 직후 요동반도를 손에 넣었으나, 러시아·독일·프랑스의 ‘3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여순(旅順)과 대련(大連)을 점령하고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로부터 이 지역의 조차권(租借權)을 넘겨받아 이 지역을 관동주(關東州)라고 정하고 관동총독부(關東總督府)를 신설하여 군정을 실시하였습니다. 이것이 괴뢰국인 만주국(滿洲國)의 모태가 되었고, 일본의 남만주철도가 관할하는 철도연선을 수비하는 1개 사단을 주둔시킨 것이 관동군의 시초가 되었으며, 관동(關東)이라는 이름은 ‘산해관(山海關)의 동쪽지역’이라는 의미입니다.
일본은 관동주를 거점으로 중국 침략의 기회만을 노리다가 1932년 만주철도 폭파사건을 일으켜 중국에 폭파의 책임을 물어 만주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만 명의 관동군으로 중국침략을 시작하였습니다. 이곳에 배치된 중국 동북변방군은 장학량의 군벌군(軍閥軍)으로 그 규모가 무려 20만 명이 넘었지만 싸워보지도 않고 만주를 내준 이유는 장개석(蔣介石)이 “공산당을 토벌하는 것이 우선이니까 저항하지 말고 산해관 안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중국 침략으로 관동군의 관할이 만주 전체로 확대됨에 따라 1919년 최초로 대련(大連)에 주둔했던 관동군사령부는 1931년 심양(瀋陽)으로, 1932년 장춘(長春)으로, 계속 북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 마침내 여순감옥에서 순국하다
여순감옥(旅順監獄)은 1902년 러시아가 중국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지었는데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여순을 점령하면서 일본에 항거하는 중국, 한국, 러시아인들을 수감하기 위해 1907년 까지 증축한 것입니다. 이곳에 수감된 한국인은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이 집행된 안중근·김병현,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사한 신채호·이회영, 20년을 복역한 박희광과 안중근 의사의 공범 우덕순, 그리고 독립운동가 최흥식, 유상근, 손기업, 박민향, 조도선, 유동하, 김광추 등이었습니다.
<간도답사학교 5박6일 일정표>
방문도시 : 훈춘, 도문, 용정, 화룡, 백두산(북백두), 통화, 단동, 대련
기 간 : 2016년 10월 15일(토) 09:50(인천 출발)~2016년 10월 20일(목) 16:55(인천 도착)
참 가 비 : 150만원
출발인원 : 최소인원 15인 이상
항 공 편 : 대한항공(출발일 인천국제공항 3층 항공수속카운터 A앞 오전 07:50 집결)
*상기 일정은 항공편 및 현지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이번 간도답사학교는 10월 15일(토)부터 20일(목)까지 5박6일 일정으로 열리며 참가접수는 항공사전예약 관계상 9월 30일 마감합니다. 이번 답사는 최연 간도답사학교 교장선생님과 여행사 온두라투어가 책임있게 준비·진행하며, 인문학습원이 후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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