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문턱에서, 서울학교(교장 최연. 인문지리기행학자, 서울해설가)의 9월, 제52강은 세계 최대의 왕릉군(王陵群)인 동구릉(東九陵)을 찾아갑니다.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추석을 앞 둔 시기에 서울학교는 조선왕조의 창건주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비롯한 아홉 능을 돌아보며 그곳에 잠든 왕들과 왕비들의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를 나누고 조선시대 왕릉의 구조와 시설물의 역할에 대해서도 알아본 후, 왕릉을 조성할 때 동원된 이들 중 일부가 남아서 이룬 주변의 자연부락도 둘러볼 예정입니다.
서울학교 제52강은 2016년 9월 11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동구릉매표소 앞에서 모입니다.
찾아가는 길은 <동구릉> 홈페이지 <찾아오시는 길> 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대중교통편은 ▶청량리 현대코아, 중랑역, 상봉역, 망우역에서 88, 경기202번 버스 ▶강변역에서 1, 1-1, 9-2번 버스 ▶경의중앙선 구리역에서 마을버스 2, 6번 버스를 이용하십시오(버스정류장 명칭-우리나라최대왕릉군인 동구릉). 집합장소가 서울 외곽이므로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동구릉(역사문화관-재실-수릉-현릉-목릉-건원릉-휘릉-원릉-경릉-혜릉-숭릉)-점심식사 겸 뒤풀이(장수식당)-왕숙천-안말-나만갑신도비-양지말-두레물골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9월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태조 이성계 이후 많은 왕들이 잠들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남으로 뻗쳐 분수치(分水峙)에서 서쪽으로 그 방향을 틀어 한북정맥(漢北正脈)을 이루며 대성산, 적근산, 광덕산, 백운산, 국망봉, 운악산, 주엽산으로 높낮이를 달리하며 이어옵니다. 포천의 축석고개 넘어 으뜸줄기는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불곡산, 흥복산, 도봉산, 노고산을 지나 장명산에서 서해로 숨어들어 그 뻗침을 마감하고, 버금줄기는 광릉을 감싸고 돌아 서원천과 중랑천을 사이에 두고 남쪽으로 주엽산, 천보산, 송산, 깃대봉, 숫돌고개를 거쳐 마침내 수락산에서 힘차게 솟구쳤다가 계속해서 불암산, 검암산, 망우산, 아차산으로 이어져 광진나루에서 한강으로 숨어듭니다.
이렇듯 한북정맥의 남쪽으로 뻗은 버금줄기에 있는 검암산(劍岩山)은 구릉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劍(검)'자가 '칼'을 의미하므로 불길하다 하여 아홉의 왕릉을 모신 후로 구릉산(九陵山)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았던 태조 이성계는 신후지지(身後之地. 살아 있을 때 미리 잡아두는 묏자리)를 무학대사(無學大師)와 하륜(河崙)에게 알아보도록 하명하는데 검암산 아래 좌청룡 우백호가 너른 들판을 감싸안고 그 가운데로 왕숙천(王宿川)이 흐르는 명당(明堂)을 택하게 되었으며 이후 많은 왕들이 이곳에 묻혀 동오릉(東五陵), 동칠릉(東七陵)으로 부르다가 철종 때 익종(翼宗)의 유릉(裕陵)이 조성되어 비로소 동구릉이 되었습니다.
유교에서 보면 삶과 죽음은 사람에게 혼백(魂魄)의 있고 없음으로 구별됩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육신을 거느리는 백(魄)과 정신을 다스리는 혼(魂)이 사람의 몸에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혼(魂)은 하늘로 돌아가고 백(魄)은 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기에 유교의 제례의식은 혼(魂)을 모시는 사당(祠堂)과 백(魄)을 모시는 무덤[封墳] 두 곳에서 치러집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과 왕비가 죽으면 정신인 혼은 종묘에 배향되고 육신인 백은 왕릉에 묻히게 됩니다.
조선의 임금은 살아있을 때는 이름이 없이 전하(殿下)로만 불리다가 죽고 나서야 두 개의 이름을 갖게 되는데, 하나는 종묘에 배향될 때 얻게 되는 혼의 이름인 묘호(廟號)이고 다른 하나는 왕릉에 안장될 때 얻게 되는 백의 이름인 능호(陵號)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태조(太祖), 세종(世宗), 성종(成宗)은 묘호이고 건원릉(建元陵), 영릉(英陵), 선릉(宣陵)은 능호입니다.
조선왕실의 무덤은 그 위계(位階)에 따라서 다르게 부릅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세자(世子), 세자빈(世子嬪), 세손(世孫) 그리고 왕을 낳은 후궁(後宮)과 대원군(大院君) 부부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王族), 즉 왕의 정비(正妃)의 아들과 딸인 대군(大君)과 공주(公主), 왕의 서자(庶子)와 서녀(庶女)인 군(君)과 옹주(翁主), 왕의 후궁(後宮)인 빈(嬪), 귀인(貴人), 숙의(淑儀) 등의 무덤을 묘(墓)라고 부릅니다.
반정(反正)으로 왕위(王位)에서 쫓겨난 연산군(燕山君)과 광해군(光海君)은 묘호(廟號)를 받지 못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尹)씨는 복권이 되지 않아서 능(陵)이라 부르지 않고 묘(墓)라고 부릅니다.
역성혁명으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국한(1392년) 이래 한일합병(1910년)까지 519년 동안 지속된 조선왕조는 왕과 왕비 및 추존 왕과 왕비 그리고 폐위된 두 왕의 묘를 합하여 44기의 무덤이 모두 보존되어 있으며 이들 왕릉은 대부분 서울 근교에 있는데, 그 연유는 조선시대 왕릉은 한양도성에서 10리 거리인 성저십리(城底十里)에서 100리 거리인 교(郊) 사이에 마련되도록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규정에 예외인 경우로는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에 죽은 본처인 신의왕후(信義王后)의 능인 제릉(齊陵)과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을 겪고 개경으로 환도(還都)한 정종(定宗)의 능인 후릉(厚陵)이 개성에, 유배지에서 죽은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이 영월에, 세종(世宗)과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합장릉인 영릉(英陵)과 효종(孝宗)의 능인 영릉(寧陵)이 여주(驪州)에 있습니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은 원래 대모산(大母山) 기슭에 있던 것을 예종(睿宗) 때 무덤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여주로 옮겼습니다.
6가지 왕릉 형식
조선의 왕릉은 능침(陵寢)에 모신 분의 수, 봉분의 수, 봉분의 위치에 따라 6종류의 형태로 나누어집니다.
단릉(單陵)은 왕이나 왕비가 홀로 모셔져 있는 능이고, 합장릉(合葬陵)은 왕과 왕비 두 분 또는 왕과 왕비 그리고 계비의 세분이 같은 봉분에 모셔진 능이고, 쌍릉(雙陵)은 왕과 왕비의 재궁(梓宮)과 봉분이 따로 마련되어 외형으로 보아 좌우로 나란히 붙어 조성된 능으로 우양좌음(右陽左陰)의 원칙에 따라 오른편이 왕, 왼편이 왕비의 봉분입니다.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은 혈이 좁아 좌우로 벌려 놓을 수 없어 아래위로 조성한 능으로 상왕하비(上王下妃)의 원칙에 따라 위쪽이 왕, 아래쪽이 왕비의 봉분이며,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은 넓은 영역에 하나의 정자각 뒤로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의 봉분을 배치하였으며, 삼연릉(三連陵)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 그리고 계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하고 곡장을 두른 형태로, 죽은 사람의 위계는 전통적으로 서쪽을 위로 하는 서상제(西上制)를 채택하게 되는데 종묘(宗廟)와 왕릉에 모두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왕릉에는 조성된 시설물들을 입구에서부터 살펴보면, 왕을 비롯한 모든 헌관(獻官)들이 말에서 내리라는 표시인 하마비(下馬碑)가 제일 먼저 나타나는데 왕은 이곳부터 말에서 내려서 가마[輦]로 갈아탑니다.
다음으로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인 재실(齋室)은 향과 축문을 두는 향대청(香臺廳),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제사음식을 마련하는 전사청(典祀廳), 제관이 머무는 재실(齋室)로 이루어져 있으며, 재실은 평소에는 왕릉을 지키는 능참봉(陵參奉)이 거주합니다.
금천교(禁川橋)는 능 입구에 놓여 있는 다리로서 속세에서 신성한 공간으로 건너는 상징물인데, 궁궐에도 입구에 금천교가 놓여 있습니다.
홍살문은 제향공간의 입구에 세워진 문으로 ‘화살 모양의 붉은 문’이라는 뜻으로 죽은 사람의 영역인 사당과 묘역 입구에 설치합니다.
홍살문에 들어서면 오른쪽 옆에 전(塼)돌로 조성한 한 평 정도의 정방형(正方形) 판석이 있는데 이를 배위(拜位) 또는 판위(版位)라 부르며, 임금이 선왕에게 제향을 모시기 위해 왔다고 알리는 알릉례(謁陵禮)와 제향을 마치고 돌아간다고 알리는 사릉례(辭陵禮)를 올리는 곳으로 어배석(御拜席) 또는 망릉위(望陵位)라고도 부릅니다.
참도(參道)는 왼쪽이 높고 오른쪽이 낮은 두 개의 길인데 왼쪽 길은 왕릉에 묻힌 왕과 왕비가 다니는 신도(新道)이고 오른쪽 길은 현재의 왕이 다니는 어도(御道)로서 이 길은 정자각까지 박석(薄石)으로 깔려 있습니다.
정자각은 제향공간의 중심건물로 모양이 정(丁)이라는 글자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제향을 모시는 정전(正殿)과 수행한 향관들이 배열하는 배위청(拜位廳)으로 나뉩니다. 수복방(守僕房)은 정자각의 동쪽에 위치하고 능을 지키는 수복(守僕)이 머무는 공간이며 수라간은 정자각의 서쪽, 수복방 건너편에 있으며 제향음식을 준비하는 부엌 역할을 하는 곳이며 근처에 제례 때 사용할 물을 긷는 제정(祭井)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자각 오른편에는 비각(碑閣)이 서 있는데, 비문의 내용에 따라 묘표(墓表), 묘갈(墓碣), 그리고 신도비(神道碑)로 구분합니다.
묘표는 왕실과 사대부를 비롯하여 중인이나 서민들까지도 세울 수 있으며 양식은 비부(碑趺)를 귀부(龜趺)가 아닌 방부(方趺)를 사용하였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묘갈은 사대부층이 주로 세웠지만 공주와 후궁 등 왕실에서도 사용하였고, 서민층에서도 세운 기록이 보이며 양식은 묘표와 거의 같다고 보면 됩니다.
신도비는 태조의 건원릉신도비, 태종의 헌릉신도비, 세종의 영릉신도비 등 초기 왕릉에만 있으며 이후 문종 때부터 국왕의 사적(史蹟)은 <실록(實錄)>에 기록된다는 주장에 따라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많은 사대부들은 신도비를 세웠는데 실제 관직이나 사후에 추증된 관직(贈職)으로 2품 이상인 경우에만 세울 수 있으며 양식은 귀부(龜趺)와 이수(螭首)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고 이수에는 제액(題額)도 새겼습니다.
비문의 내용이 망자(亡者)의 일대기(一代記)만 간략하게 기록된 것을 서(序)라 하고, 살아 있을 때의 업적을 칭송한 장황한 기록을 명(銘)이라 하는데 묘표는 서만 있고 묘갈과 신도비는 서와 명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도비를 묘의 동남쪽에 세우게 된 것은 풍수지리상 묘의 동남쪽을 귀신이 다니는 길, 즉 신도(神道)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정자각의 북서쪽 뒤편에는 축문(祝文)을 태우는 소전대(燒錢臺)와 폐백(幣帛)을 묻는, 정방형의 석물로 둘러쳐진 예감(瘞坎)이 있는데, 태조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에만 두 가지가 모두 있고 세종 때부터는 예감 하나만 설치되었습니다.
예감과 마주보는 동쪽에는 장방형의 판석이 놓여 있는데 능침이 위치한 산신에게 제향을 올리는 곳입니다. 이는 산신석(山神石)이라고도 하고, 달리 환인(桓因), 환웅(桓雄), 환검((桓儉)의 삼신에게 제물을 올리는 곳이라는 뜻의 삼신석(三神石)이라고도 합니다.
능침(陵寢)은 정자각 뒤에 있는 비탈진 사초지(莎草地)부터 봉분까지의 언덕을 말하고 능침을 둘러친 담장을 곡장(曲墻)이라고 합니다.
능침 주변의 다양한 석물(石物)들
능침 주위에는 여러 종류의 석물(石物)들이 나름의 의미를 갖고 배치되어 있습니다. 능침 앞은 삼계단(三階段)으로 나뉘어 있어 아래로부터 하계(下階), 중계(中階), 상계(上階)라 합니다. 하계에는 한 쌍의 무인석(武人石)과 석마(石馬)가, 중계에는 한 쌍의 문인석(文人石)과 석마가 임금의 명만 떨어지면 어디라도 달려갈 듯이 서 있고, 중간에는 능침에 모셔진 분의 장생발복(長生發福)을 기원하는 뜻으로 장명등(長明燈)이 서 있으며 상계에는 양 옆에 육신에서 분리된 혼(魂)이 체백(體魄)을 찾아올 때 봉분을 잘 찾을 수 있도록 표지 구실을 하는 망주석(望柱石)이 서 있고 중간에는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으며 혼유석은 북 모양의 고석(鼓石)이 받쳐주고 있습니다.
또한 봉분 주위에는 두 쌍씩의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이 능침을 수호하기 위해 봉분 밖을 향해 서 있습니다.
석물(石物)도 시대에 따라 변하여 상계, 중계, 하계로 이루어진 삼계단은 영조(英祖) 때부터는 중계와 하계가 합쳐져 상계, 하계의 2단으로 구성되어, 하계에는 문인석과 무인석 그리고 석마가 함께 배치되는 양식으로 변했으며 초기에는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와 폐백을 묻는 예감이 함께 있었으나 세종 때부터 예감 하나만 설치하였고 신도비는 태조, 태종, 세종의 것만 남아 있고 문종(文宗) 때부터 신도비 대신에 묘표로 바뀌게 됩니다.
동구릉에는 여섯 분의 왕(王)과 한 분의 추존왕(追尊王), 열 분의 왕후(王后)가 아홉 왕릉(王陵), 열여섯 봉분(封墳)에 나누어 모셔져 있습니다.
건원릉(建元陵)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 이성계의 단릉, 현릉(顯陵)은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동원이강릉, 목릉(穆陵)은 선조(宣祖)와 의인왕후(懿仁王后) 그리고 계비(繼妃)인 인목왕후(仁穆王后)의 동원이강릉, 휘릉(徽陵)은 인조(仁祖)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의 단릉, 숭릉(崇陵)은 현종(顯宗)과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쌍릉, 혜릉(惠陵)은 경종(景宗)의 비 단의왕후(端懿王后)의 단릉, 원릉(元陵)은 영조(英祖)와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쌍릉, 경릉(景陵)은 헌종(憲宗)과 정비(正妃) 효현왕후(孝顯王后) 그리고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의 삼연릉, 수릉(綏陵)은 추존 왕 문조(文祖. 翼宗)와 흔히들 조대비(趙大妃)라고 부르는 신정왕후(神貞王后)의 합장릉입니다.
동구릉 부근에 있는 사노리(四老里)라는 자연부락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태조의 건원릉을 조성할 때 영월에서 부역으로 동원된 사람들 중에 네 명의 노인네가 공사가 끝나도 돌아가지 않고 박씨가 안말에, 추씨가 두레물골에, 주씨가 양지말에, 엄씨가 언제말에 눌러 살았으며 이곳을 네 노인네가 눌러 산 곳이라 사노리(四老里)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양지말에는 조선중기에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내고 좌의정에 추증(追贈)된 구포 나만갑(羅萬甲)의 신도비가 있습니다. 나만갑은 병자호란 때 홀로 말을 타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인조(仁祖)로부터 공조참의에 기용되어 먹을거리를 책임지는 관량사(管糧使)로서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산행차림(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번씩, 둘째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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