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분별이 명확하지 않은 어린 날에 들은 이야기이다. 서너 명의 할머니 사이에서 놀고 있었든지, 자고 있었든지, 아무튼 분명치 않은 상황에서 나는 할머니들의 수다를 흘려들으며 빈둥대고 있었다. 그중 한 할머니가 자기 할아버지 흉을 보자 할머니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라 맞장구를 쳤다. 걔 중에는 "네 영감 젊어서 좋겠다", "나도 귀찮아 죽겠다" 등의 대꾸가 섞여 있었지만, 반응의 주종은 늙은 남자의 성욕에 대한 못마땅함이었다.
할머니 이야기의 요지는 할머니의 남편인 할아버지가 "젊어서 녹용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그 나이에도 가끔씩 (섹스를) 하겠다고 덤비는데 귀찮아 죽겠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그래서 아예 "나는 늙어서 감당이 안 되니 밖에 나가서 오입을 하고 오라"고 했으나 "영감쟁이가 돈이 아까워서 다 고꾸라진 나한테 여전히 그 짓을 하려고 든다"고 하소연했다. "남자는 문지방 넘을 힘만 있어도"란 말이 이어졌고, 내용의 심각성에 비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화기애애하고 떠들썩하게 계속되었다.
어린 나는 어렴풋하게 대화의 주제가 섹스임을 알았지만, 노인들이 섹스를 한다는 사실에 적잖게 당황했던 것 같다.
노인의 성욕에 관한 또 다른 불편한 경험은 30대 초반쯤에 우연찮게 어느 60대 후반 남자의 책상을 훑어볼 때였다. 야동임이 확실해 보이는 비디오테이프를 서류 틈에서 목격한 것이다. 할머니들의 수다를 들었을 때와 달리 그 즈음엔 늙은 남자에게도 성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으나 발견된 장소가 장소인지라 약간 불편했다고 할까.
나는 직업상 나보다 나이가 많이 든 사람들을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기회를 많이 가지며 사회생활을 했다. 술까지 한 잔 걸치며 인생 선배들과 담소를 나누다 보면 중장년 혹은 노년의 성 이야기 나오기도 했는데, 상당수에겐 성욕의 존재 자체가 내 식으로 해석하자면 '실존적 비대칭'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해소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욕망이란 게 소거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다른 측면의 원숙함과 인격적 성취와 달리 성욕의 영역에 있어선 젊은 남자에 비해 현저하게 비루해진다는 것이 일부 늙은 남자들의 고백이었다.
"장식용인 거시기는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다"며 박장대소하는 남자 중늙은이들의 술자리는, 지금은 더 이상 젊은 남자가 아닌 시인 장정일이 '햄버거에 관한 명상'에서 거세 욕망을 말한 젊은 날과 비교하면 김빠진 사이다 느낌이었다. 탄산이 다 날아가고 그저 단맛만 남아 먹을수록 갈증을 증폭시키는 사이다 병에 든 설탕물.
이건희 삼성회장 성매매 의혹 동영상 보도를 접한 나의 첫 느낌은 측은함이었다. 희로애락을 잃어버린 채 현재 돌처럼 누워 지내는 이 회장이 노년의 욕망을 노인다운 우아함으로 '승화'하지 못하고 배설 욕구에 무기력하게 순응하는 모습은, 내가 주변에서 흔히 본 그런 늙은 남자를 연상케 했다. 그런 정황은 부도덕하다기보다는 불쌍하다는 느낌을 먼저 끌어낸다.
"누워 있는 노인을 욕보이지 말라"는 일각의 옹호 논평은 아마 그런 입장을 반영하고 있을 게다. 삼성의 대처 역시 맥락을 같이 한다. "이건희 회장 관련 물의가 빚어져 당혹스럽게 생각합니다. 회장 사생활과 관련된 문제여서 회사로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는 삼성의 입장에서 핵심은 '사생활'이다. 인간적인 욕망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또한 인간으로서 물리적인 한계를 어쩌지 못해 지금은 투명인간처럼 누워 있는 인간 이건희에 초점을 맞춘 해명이다. '사생활'로 선을 긋고 비교적 신속하게 죄송하다는 입장을 표명한 삼성의 태도에서 나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인간 이건희에 측은함을 느꼈다. 누워 있지 않는 삼성 회장이었다면 삼성의 대처가 어떠했을까.
이번 이건희 회장의 성매매 의혹 동영상 보도를 통해 나는 평생 처음으로 이 회장에게서 인간적인 면모를 확인했다고 하면, 아마도 부적절하다는 핀잔을 받기 십상이겠지만 그런 느낌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다이다.
보도를 통해서 내가 재삼 확인한 건 자본가의 본질이다. 무력한 노인을 성매매 의혹 동영상으로 협박하려고 했다는 식의 코믹한 논리, 노인 혼자 성매매를 할 수 없으니 누군가 도와줬을 테고 장소 제공에 회사가 개입했으니 실정법 위반 및 기업 윤리 저촉이란 일리 있는 논리를 넘어, 나는 이건희란 개인을 통해 자본가의 본질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결론적으로 이 회장의 욕망에서, 음경 아래 비틀거리는 늙은 남자의 '실존적 비대칭'의 어떠한 기미도 발견하지 못했다. 늙어가는 보통의 사적 남자는 그러한 비대칭을 통해 비루함을 자각하고 그러한 자기 존엄의 훼손과 갈등을 통해 대체로 모종의 실존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늙은 인간 여성이 폐경을 통해 섹스에서 더 이상 젊은 여성과 경쟁하지 않고 대신 젊은 여성의 조력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는 인류학적 설명에서 인간 남성의 위치는 모호하다. 남성이 여성과 다른 방식으로 늙은 인간의 길을 걷게 된다는 점만 확실하다. 약간 가부장적으로 설명하면, 음경의 무게 아래 비틀거리지만 결코 남근의 휘장을 잃지 않는 노년을 기약한다고 할 수도 있다. 가부장제 코드 하에서 남자는 결코 중성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회장이 욕구를 실현하는 전 과정에서 처음 느낀 측은함은 사라지고 기계적이고 합리적이며 무절제하고 한계를 모르는 순수 욕망을 관찰하게 되면서 나는 자본가의 전형적인 존재 양식을 떠올렸다. 흔히 자본과 자본가 사이에서 혼동을 일으키는데, 자본가가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비롯된 혼동이다. 자본가는 인간의 모습을 취하지만 인간이 아니며, 따라서 그에게는 사생활이 없다. (단순화하자면)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었지만 신의 아들이며 그에게 신의 과업만이 주어진 것이나 동일하다. 자본가를 남자로 치면 무한 발기의 무한 확장의 음경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세상에 그런 인간 남자나 생명체는 없으며 생명종이 아닌 것 중에 유일하게 비슷한 존재양식을 지닌 게 자본이다.
동영상 속 이 회장은 터미네이터 같은 말투로 "네가 오늘 수고했어"라고 말한다. 평소 생각과 많이 다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살짝 비약하자면, 영화 속 터미네이터가 현실에서는 자본가가 아닐까. 문제는 "네가 오늘 수고했어"라고 말할 때 그 오늘이 오늘로 끝나는 오늘이 아니라 내일, 모레로 매일 반복되는 오늘이라는 점이다. 문제는 이건희 회장의 성매매 의혹 동영상 보도의 파문이 가라앉은 다음 언제가 나올 이 회장의 사망 보도 이후에도 다른 이름의 이건희가 "네가 오늘 수고했어"라고 말할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문제는 그 "네"가 이 회장과 대면한 그 성 노동자가 아니라 "나"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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