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의 8월, 제34강은 고려·조선시대에 걸쳐 대도호부로 영동지역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던 <강릉고을>을 찾아갑니다. 율곡 이이(李珥)의 탄생지이며, 허균과 허난설헌 오누이의 향취가 서려있고, 관동팔경의 하나인 경포대 주변으로 조선시대 사대부의 품격 높은 별당과 정자가 즐비한 고을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34강은 2016년 8월 28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남강릉IC-굴산사지(부도/당간지주/미륵불/학바위)-송담서원-읍치구역(임영관삼문/임영관칠사당/강릉향교)-점심식사 겸 뒤풀이-오죽헌-선교장-해운정-경포대-허균·허난설헌유적공원-경포해변-서울의 순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34강 답사지인 <강릉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영동지방의 중심고을
백두대간 상의 대관령을 사이에 두고 바닷가인 동쪽을 영동지방, 내륙인 서쪽을 영서지방이라고 하며 영서지방의 중심고을이 원주이고 영동지방의 중심고을이 강릉입니다.
강릉은 동쪽으로는 동해에 닿아있고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이 남북으로 병풍처럼 둘러쳐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양양, 속초와 남쪽으로 동해, 삼척과 접해 있고, 오대산과 노인봉에서 발원한 연곡천(連谷川)이 소금강을 지나 동해로 흘러들고, 고루포기산과 삽답령에서 발원한 남대천(南大川)이 오봉저수지에서 합류하여 강릉 시내를 지나 동해로 흘러듭니다.
강릉지방은 천혜의 요새 백두대간이 가로막고 있고 동해는 배가 접안하기 쉽지 않아 왜구의 침입이 드물었던 곳입니다. 이런 연유로 해서 관방시설인 산성이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대공산성(大公山城)은 보현산성(普賢山城) 또는 대궁산성(大弓山城)이라고도 불리며, 백두대간에서 동쪽으로 돌출한 보현산(944m)에 대관령과 연결된 자연적인 산세를 이용하여 축성한 석성으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쌓았으며 소금강에 있는 금강산성(金剛山城)과도 연결되어 있는 성입니다.
언제 처음 쌓았는지 내력에 관한 확실한 고증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전설에 의하면,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이곳을 도읍지로 정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기 위하여 축조하였다고도 하고, 발해(渤海)의 왕인 대씨(大氏)성을 가진 사람이 쌓았다고 하여 대공산성이라 불린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 이 산성이 백제의 온조왕이나 발해의 대조영과 직접 연결된 가능성은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산성의 총 길이는 약 4㎞ 정도이고, 성벽은 크기가 다양한 성들을 불규칙하게 쌓았는데, 높이 2.3~2.5m 정도이며 현재 동문(東門), 남문(南門), 북문(北門)의 흔적과 함께 성안에는 성문터, 건물터, 우물터 등이 남아있고 토기조각을 비롯한 기와파편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금강산성(金剛山城)은 아미산성(峨嵋山城) 혹은 만월성(滿月城)이라 하는데, 이 산성이 언제 처음 축조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전설에 의하면, 신라의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재기를 위해 성을 쌓았다는 설도 있고,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최극림(崔克霖)이 의병(義兵)을 거느리고 성을 쌓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성은 구룡폭포의 동, 서쪽 능선을 따라 험준한 지역에 축조된 성으로, 성벽이 여러 겹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고, 성벽의 전체 길이는 약 5㎞ 정도이며,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현존하는 성벽은 대개 1∼2m 정도입니다. 성안에는 건물터로 보이는 곳이 여러 군데 있고 성문터가 남아있으며 성 주위에는 연병장(練兵場), 수양대(修養臺), 망군대(望軍臺) 등으로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강릉고려성(江陵高麗城)은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괘방산(해발 384m)의 구릉 정상부 주변을 한 겹 둘러싼 돌로 쌓은 산성으로, 지리적으로 바닷가에 위치한 해안성인데 강릉지역의 주민들이 바다로부터 침략하는 적들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쌓은 성입니다.
성의 총 길이는 451m이고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2∼3.5m 정도이며, 가장 잘 남은 내벽의 높이는 2m 정도입니다. 성벽은 일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산돌을 이용하여 장방형의 불규칙한 석재를 사용하였으며 일부 성벽 사이사이의 공간에는 잔돌 끼움쌓기를 하여 성벽의 무너짐을 방지하였습니다.
서벽과 동벽의 북쪽에는 각각의 문터를 2개 두었고, 서문터 북쪽에는 관측과 방어에 유리하도록 치(雉)를 만들었으며, 동북 모서리에는 성벽을 돌출시켜 쌓음으로써 치성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에서는 고려·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의 자기조각과 어골무늬, 격자무늬, 사격자무늬, 직선무늬, 사선무늬, 복합무늬 등의 기와조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성은 옛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고려성'이란 이름과 축조수법·발굴유물 등을 통해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정되며 주변의 삼한산성(三韓山城)과 함께 강원 영동지방의 삼국시대 및 고려 초기의 성곽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고구려가 가장 먼저 차지한 땅
역사적으로 강릉지방은 삼국 중에서 고구려가 가장 먼저 차지하였습니다. 고구려가 한창 강성할 때는 백두대간 넘어 남쪽의 내륙지방과 동해안을 따라 경주부근까지 그 세력이 미쳤는데, 이때 강릉은 하서랑(河西良) 또는 하슬라(何瑟羅)로 불렸습니다.
고구려 장수왕 이후에는 신라의 영향권에 들었는데 내물 마립간 42년(397년)에 하슬라에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들고 기근이 심하여 왕이 죄수를 놓아주고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이곳이 신라의 행정구역이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신라는 한강유역에 진출하여 영토 확장이 진행되면서 512년(지증왕 13) 강릉에 이찬 이사부(異斯夫)를 군주로 하슬라주를 설치하여 신라 동북지방의 군사중심지의 역할을 하게 했고, 639년(성덕여왕 6)에는 하소서경이 되어 사신을 두었으며 668년(무열왕 5) 소경이 철폐되어 하서주(河西州)로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에 명주(溟州)로 개명되었습니다.
강릉이 신라 정치사에서 중요하게 부각된 것은 김주원(金周元)이 왕위계승 경쟁에서 밀려 서라벌에서 이곳으로 낙향하면서부터입니다. 그는 선덕왕이 죽은 뒤 왕위계승 과정에서 김경신(金敬信)과 경쟁하다가 정치적인 패배로 강릉으로 낙향한 다음 원성왕(元聖王)이 된 김경신으로부터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해졌습니다. 그 이후 명주를 비롯하여 양양, 삼척, 평해, 울진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강릉지역에서 독자적인 지방세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신라 후기에는 진골귀족 상호간에 정권쟁탈전이 전개되면서 각 지역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원주의 양길(梁吉), 전주의 견훤(甄萱), 철원의 궁예(弓裔)가 두드러진 세력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양길에게 군사를 나누어 받은 궁예는 동정(東征)을 개시하여 강릉을 장악한 후 장군이라 자칭하면서 독립된 세력기반을 구축하였는데, 궁예의 군사적 지지기반은 신라에서 임명한 지명주군주사(知溟州郡州事) 왕순식(王順式)과 토착세력으로 군사적 실력자인 왕예(王乂)가 중심이었습니다.
고려시대 936년(태조 19)에는 명주가 동원경(東原京)으로 개칭되어 임영관((臨瀛館)이 설치되었고 940년 후삼국을 하고 주, 부, 군, 현의 명칭이 개정되면서 다시 명주로 부르게 되었으며 983년(성종 2)에 명주는 하서부(下西府)라 했다가 987년에는 명주도독부(溟州都督府)로, 993년에는 다시 명주목이 되었으며, 996년에는 다시 주가 되어 단련사(團練使)가 설치되었습니다.
한편 995년에 화주와 명주를 합쳐서 삭방도(朔方道)로 편제하고 춘주(春州)를 예속시켰으며, 1178년(명종 8) 삭방도를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 개칭하면서 춘주를 분리하여 춘주도로 편제하였고, 1261년(원종 원년)에는 몽고의 침입 때 국왕을 보필한 공신 김홍취(金洪就)의 고향이라 하여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시켰습니다.
1263년(원종 4)에는 연해명주도가 강릉도로 불리다가 1298년(충렬왕 24)에 강릉부로 되었고, 1356년(공민왕 5) 강릉삭방부로 개칭되었으며, 1388년(우왕 14)에는 강릉도에서 삭방도를 분리하고 교주도와 합쳐서 교주강릉도로 편제한 후 1389년(공양왕 원년) 강릉대도호부로 승격하고 별호를 임영(臨瀛)이라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도 강릉대도호부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1413년(태종 13)에 전국이 8개의 도로 나뉘면서 강원도에 소속되었고 대도호부로 승격된 이래 조선 세조대에 진관체제가 정비되면서 삼척도호부와 양양도호부, 그리고 평해, 간성, 고성, 통천 등 4개 군과 울진, 흡곡 등 2개의 현을 통할하게 되었습니다. 읍치구역은 지금의 명주동 지역에 읍성과 함께 관아가 있었고, 읍성 밖 동쪽에 향교가 있었습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개혁으로 전국을 23부로 개편하고 종래의 부, 목, 군, 현 등 크고 작은 행정구역을 폐합하여 군으로 획일화하고 336군을 신설하여 23개의 부 밑에 분속시켰는데, 이에 따라 강원도에는 강릉부와 춘천부가 신설되었고 강릉부에는 강릉, 울진, 평해, 삼척, 고성, 통천, 흡곡, 양양 등 9개 군이 포함되었습니다.
유서 깊은 임영관 삼문
강릉대도호부의 관치구역에 남아 있는 임영관 삼문(臨瀛館 三門)은 고려 936년(태조 19)년에 창건된 강릉부 객사(客舍)의 정문입니다. 총 93칸의 건물을 짓고 '임영관'이라 하였는데, 이 문에 걸려있던 제액(題額) 글씨 '임영관'(臨瀛館)은 1366년(공민왕 5년)에 공민왕이 낙산사로 행차하는 도중에 쓴 친필(親筆)로 전해지며, 현재 임영관 현판은 객사 정청인 전대청으로 옮겨놓았고 1308년에 건립된 수덕사 대웅전보다 건축연대가 앞선 것으로 추정됩니다.
객사(客舍)란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두었던 관청건물의 하나로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가 오면 여기서 묵게 하였습니다.
강릉대도호부 관아(江陵大都護府 官衙)는 1993년 구 강릉경찰서 부지 발굴조사에서 객사 관련 유적이 확인되었고 2005년에는 구 시청사 부지에서 관아유적이 확인되었습니다. 이곳에 2006년 객사의 정청인 전대청과 중대청 및 좌우 익사를 복원하였고, 동헌 영역은 2012년 아문, 동헌, 별당 및 의운루 등을 복원하였습니다.
칠사당(七事堂)은 최초 건립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1632년(인조 10)에 고쳐지었고, 1866년(고종 3)에는 진위병(鎭衛兵)의 군영으로 쓰이다가 이듬해에 화재로 타버린 것을 강릉 부사 조명하(趙命夏)가 다시 지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수비대가 사용하였고, 그 후에는 강릉 군수 및 강릉 시장의 관사로 사용되다가 1980년에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칠사(七事)란 수령이 현지에 부임하여 백성을 다스릴 때 꼭 수행해야 하는 업무로서 수령칠사(守令七事)라고도 하는데 농상성(農桑盛), 호구증(戶口增), 학교흥(學校興), 군정수(軍政修), 부역균(負役均), 사송간(詞訟簡), 간활식(奸猾息)의 일곱 항목을 말합니다.
현재 남아있는 강릉대도호부 관아, 임영관 삼문, 칠사당(七事堂) 등은 강릉의 고려시대 이후 관아건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계련당(桂蓮堂)은 강원도내에서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사마소(司馬所) 유적입니다. 과거에 급제한 이 고장 출신들이 고장의 발전과 미풍양속의 진작을 위해 모여 의논하던 곳으로, 조선 초에 처음 지어졌으나 훼손되어 1810년 주민의 주도 아래 다시 건립되었는데, 이때 많은 부분이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절계(折桂)라 하고 진사(進士)를 홍련(紅蓮)이라 하는데 이곳이 이들이 모이는 장소라고 해서 계련당이라고 하였습니다. 계련당은 생원, 진사에 합격한 사람들과 대과에 합격한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의 우의를 두텁게 하고 주민의 교화와 풍속의 순화에 힘쓰는 한편 행정에 건의와 자문을 하던 지방의 원로원(元老院) 구실을 하던 곳입니다.
송담서원과 오봉서원
강릉향교는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강원도 존무사(江原道存撫使) 김승인(金承印)에 의하여 세워졌으나 1411년(태종 11)에 불에 타버렸고 1413년에 강릉도호부판관(江陵都護府判官) 이맹상(李孟常)이 강릉문사(江陵文士) 68인과 발의하여 중건한 것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방향교로는 그 규모가 웅장한 편이고 한국전쟁 때에도 건물이 불타지 않아 옛 규모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향교입니다.
송담서원(松潭書院)은 문성공(文成公) 율곡 이이를 제향하는 서원으로 1624년(인조 2)에 강원감사 윤안성(尹安性), 강릉부사 강주(姜紬) 등이 석천서원(石川書院)으로 구정면 학산리에 세웠으나 1652년(효종 3) 강원감사 김익희(金益熙)와 강릉부사 이만영(李晩榮) 등이 협의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는데, 이때 건물은 사당(祠堂), 월랑(月廊), 동, 서재(東, 西齋), 강당, 광제루(光霽樓), 서고(書庫) 등이 있었습니다.
1660년(현종 1)에 송담서원(松潭書院)이라 사액(賜額)을 받았고 묘정비(廟庭碑)는 1726년에 영의정 정호(鄭澔)가 글을 짓고 우의정 민진원(閔鎭遠)이 글을 썼습니다. 1804년(순조 4) 큰 산불로 서원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1905년(고종 42) 지방유림의 모금으로 사당을 다시 지었고 1971년 송담사를 비롯하여 동, 서재, 삼문 등을 복원하여, 지금은 '송담사'(松潭祠)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사당과 대문(大門), 중문(中門). 재실(齋室), 묘정비(廟庭碑)가 남아 있습니다.
오봉서원(五峰書院)은 공자, 주자, 송시열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학생들을 교육하던 곳입니다. 1556년(명종 11)에 함헌(咸軒), 최운우(崔雲遇), 관찰사 윤인서(尹仁恕), 강릉부사 홍춘년(洪春年) 등이 이곳의 지명인 구산(邱山)이 공자와 관계있는 중국의 구산(丘山)과 같다하여 공자묘우(孔子廟宇)를 짓기로 하고 그 이름을 오봉서원이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공자만 배향했으나 1782년에 주자(朱子), 1813년 송시열(宋時烈)의 영정을 차례로 봉안하였습니다. 1868년(고종 5년)에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철폐되자 공자의 영정은 향교로 옮겼고, 주자와 송시열의 영정은 연천의 임창서원(臨彰書院)으로 옮겼으며 1914년에 집성사(集成祠)를 중건하였고, 그 후 칠봉사(七峰祠), 강당(講堂) 등을 건립하였습니다.
경양사(鏡陽祠)는 신라시대 충렬공(忠烈公) 관설당(觀雪堂) 박제상(朴堤上)의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박제상은 신라 19대 임금인 눌지왕(訥祗王) 때 사람으로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있던 왕의 동생 복호를 데려오고,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는 왕자 미사흔을 탈출하게 하고, 자신은 목도(木島)에 유배되었다 살해당했는데 그의 부인은 그를 기다리다가 망부석이 되었다고 합니다.
강릉 경포대 주변의 경관은 서쪽 멀리 백두대간의 연봉들이 장쾌하게 이어져 있고 동쪽으로 동해가 출렁이고 있어 그야말로 관동팔경의 하나로서 모자람이 없기에 이곳에는 사대부의 별당과 정자가 많이 세워졌습니다.
이내번이 우연히 발견한 명당 선교장
선교장(船橋莊)은 강원도 지역에서 가장 잘 남아있는 품위 있는 사대부 가옥입니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었을 때 '배타고 건너다'라고 하여 이 동네를 ‘배다리마을[船橋里]’이라 불렀는데, 선교장이란 이름은 바로 여기서 유래하였습니다.
선교장터는 효령대군 11세손인 가선대부(嘉善大夫)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이 우연히 발견한 명당으로, 이곳에 처음 집을 지은 후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이내번은 원래 전주에 살다가 강릉으로 옮겨와 경포대 주변의 저동에 살면서 어느 날 족제비떼를 쫓다가 지금의 터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지세(地勢)를 살펴보면 시루봉에서 뻗어내린 그리 높지 않은 산줄기와 울창한 송림이 평온하게 둘러쳐져 바람을 막고, 왼쪽으로는 살아있는 용의 형상으로 재화(財貨)가 증식할 만하고, 오른쪽으로는 약진하려는 듯 내달린 언덕이 자손(子孫)의 번창을 보이는 풍수로서 앞에는 얕은 내가 흐르고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천하의 명당입니다.
이내번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가세가 크게 번창하고 여러 대에 걸쳐 많은 집들이 지어졌는데 대문이 달린 행랑채와 안채, 사랑채[悅話堂], 별당, 사당 그리고 연당(蓮塘)과 정자[活來亭]까지 완벽한 조선 사대부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으며, 특히 사랑채인 열화당에는 <용비어천가> <고려사> 등 수천 권의 책, 글, 그림 등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오죽헌(烏竹軒)은 율곡 이이가 탄생한 곳입니다. 세종 대(世宗代) 공조참판과 예문관 제학의 벼슬에 오른 강릉 사람 최치운에 의해 건립된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별당 사랑채로, 우리나라 주거건축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인데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 년 전에 지어진 것입니다. 최치운이 처음 건립한 후 아들인 최응현에게, 최응현은 그의 사위 이사온에게, 이사온도 그의 사위 신명화에게 물려주었는데, 이때 율곡 이이가 태어났습니다.
해운정(海雲亭)은 조선 상류사회의 별당건축으로 경포호가 멀리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1530년(중종 25)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현판은 송시열(宋時烈)의 글씨이며 기문은 권진응(權震應)이 지었고 율곡 이이를 비롯한 여러 명사들의 시문판(詩文板)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특히 1537년(중종 32) 명나라의 사신인 정사 공용경(正使 龔用卿)이 쓴 ‘경호어촌(鏡湖漁村)’이란 액자와 부사 오희맹(副使 吳希孟)이 쓴 '해운소정(海雲小亭)'이란 액자가 남아있는데 강릉지방에서는 오죽헌 다음으로 오래된 건물입니다.
임경당(臨鏡堂)은 1500년대에 지어진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별당으로, 별당 측면에 'ㅁ'자 배치의 본채가 있고, 뒤로는 제월루와 사당이 있으며 조선시대 별당건축의 전형적인 형태로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건물 안에는 율곡의 ‘호송설(護松說)’과 ‘송어시(松魚詩)’ 등의 현판이 걸려있는데 건물 이름은 김광헌의 장자 김열(金說)의 아호(雅號)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김열(金說)은 율곡과 동시대 인물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고 해운정의 심언광과도 교류하였습니다.
경포대(鏡浦臺)는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1326년(고려 충숙왕13) 강원도 안렴사(按廉使) 박숙(朴淑)이 현 방해정(放海亭) 뒷산 인월사(印月寺) 옛 터에 처음 지었던 것을 1508년(중종 3) 부사 한급(韓汲)이 현 위치로 이전한 후 1742년(영조 18) 부사 조하망(曺夏望)의 중수를 비롯한 수차례의 중수가 있었습니다.
경포대(鏡浦臺)의 전자액(篆字額)은 유한지(兪漢芝), 해서액(楷書額)은 이익회(李翊會)의 글씨이고, 정자안의 ‘제일강산(第一江山)’은 주지번(朱之蕃) 또는 미불(米芾)의 글씨라 전하나 확실치는 않으며, 율곡이 10세에 지은 <경포대부(鏡浦臺賦)>를 비롯하여 숙종(肅宗)의 어제시(御製詩)와 여러 명사들의 기문(記文), 시판(詩板)등이 걸려있습니다.
방해정(放海亭)은 원래 삼국시대 고찰인 인월사(印月寺)가 있었던 곳입니다. 1859년(철종 10)에 통주군수(通州郡守)였던 산석거사(山石居士) 이봉구(李鳳九)가 퇴관(退官) 후 객사의 일부를 옮겨 정자를 건립하고 만년을 보낸 곳으로, 산과 송림을 배경으로 남쪽의 경포호를 향하고 있습니다.
금란정(金蘭亭)은 조선 말 이 고장 선비인 김형진(金衡鎭)이 경포대 북쪽 시루봉 아래에 건물을 짓고, 주변에는 매화를 심어 학과 더불어 노닐던 곳이라 하여 매학정(梅鶴亭)이라 불렀던 것을 그후 금란계원(金蘭契員)으로 주인이 바뀌어 현 위치로 옮겨지면서 '금란정'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호해정(湖海亭)은 경포호의 북쪽 언덕위에 있는 정자로 1950년 초 진사 신정복(辛正復)이 건립한 것입니다. 이곳에는 원래 장호(張昊)가 그의 호를 따 지은 태허정(太虛亭)이 있던 자리로, 이 터를 조카사위 김몽호(金夢虎)에게 물려주었는데 그 후 김몽호는 아들 득헌(得憲)에게, 득헌은 사위 신만(辛晩)에게, 신만의 아들 성하(聖河)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을 위하여 이곳에 조그만 초옥(草屋)을 짓고 이곳에 선생을 거처하게 하였습니다. 그후 성하의 손자 정복은 실화(失火)로 타버리자 강릉시 죽헌동에 있던 자기 집 별당인 안포당을 헐어 이곳에 옮겨 짓고 '호해정'이라 하였습니다.
오성정(五星亭)은 1627년(인조 5)에 지어진 정자라고 잔해지고 있으나, 현재의 건물은 1927년에 정묘생(丁卯生) 동갑계원 20인이 강릉객사(江陵客舍) 일부를 뜯어 옮겨지었다고 합니다.
굴산사와 범일스님
굴산사(崛山寺)는 신라 문성왕(文聖王) 13년(851)에 굴산조사 범일(梵日)스님이 창건하였습니다. 범일스님은 15세에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 왕자 김의종(金義宗)을 따라 당(唐)나라에 들어가 수행하다가 847년(문성왕 9)에 귀국하여 백달산에 들어가 불법을 닦던 중 명주도독 김공(金公)이 불법을 펴줄 것을 요청하여 굴산사를 창건하고 사굴산문을 개창하고 개조(開祖)가 되었습니다.
굴산사지(崛山寺址)로 추정되는 일대는 농경지로 변해 확실한 규모나 배치는 알 수 없었으나, 2002년 태풍 '루사'로 인한 수해로 긴급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사역(寺域)은 동, 서 140m, 남, 북 250m의 크기이며 법당지, 승방지, 회랑지, 탑지 등도 확인되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굴산사지부도, 굴산사지당간지주, 굴산사지석불좌상, 범일스님 탄생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석천(石泉)과 학바위 등이 남아있습니다.
대관령성황사(大關嶺城隍祠) 및 산신각(山神閣)은 강릉단오제가 시작되고 끝나는 곳입니다. 성황사에는 신라 말기의 고승인 강릉 출신의 범일국사를 모셨고 산신당은 대관령의 산신을 모셨는데, 강릉의 옛 향토지인 <임영지(臨瀛誌)>의 기록에 의하면 장군 왕순식(王順式)이 고려 태조를 모시고 신검(神劍)을 정벌하려고 전쟁을 치르려고 할 때, 꿈에 두 귀신이 구해주어서 이겼다고 하는데, 그후 두 분을 산신으로 받들어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전하지만 현재 사당에는 일반적인 산신도 형식의 탱화를 모시고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8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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