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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약물 쇼크, 현대판 '윈터 솔져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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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약물 쇼크, 현대판 '윈터 솔져 사태'

[이종훈의 영화 같은 스포츠] 러시아, 올림픽 정신은 어디로?

"선수들은 주는 것은 다 입에 넣는다. 마치 어린 아이들처럼..."

과거 러시아반도핑기구(RUSADA) 책임자였던 그리고리 로드첸코프가 러시아의 도핑 스캔들을 폭로했다. 로드첸코프는 지난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당시 금지약물 3가지를 혼합해 술에 타서 러시아 선수 수십 명에게 줬고, 선수들은 '귀부인'이라고 불렸던 이 금지약물 칵테일을 마셨다고 한다.

러시아반도핑기구 훈련 책임자를 지낸 비탈리 스테파노프는 금지약물 투여로 2013년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으로부터 2년간 자격정지 처벌을 받은 세계적인 여자 중장거리 육상선수이자 자신의 아내인 율리아 스테파노바를 비롯해, 러시아의 거의 모든 선수들이 금지약물을 복용하고 있으며, 금지약물 복용은 코치의 종용으로 이루어진다고 증언해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겨준 바 있다.

국가 단위에서 금지된 행위가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제기된다. 영국의 BBC는 러시아 선수들이 체육부 권유를 받아 적혈구 생산을 촉진해 지구력을 향상하고 피로회복을 증진하는 '크세논 가스'라는 금지약물을 10년 이상 꾸준히 흡입하는 등, 러시아 선수 99%가 금지약물을 복용하고 있다고 폭로한 바 있다. 지금은 세계반도핑기구(WADA)가 금지약물로 지정한 크세논 가스 덕분에 러시아는 지난 2004년 아테네 하계올림픽과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메달을 쓸어 담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하는데, 러시아 선수들이 흡입기를 이용해 크세논 가스를 흡입하는 사진은 지금도 버젓이 세상에 공개되어 있다.

로드첸코프와 비탈리 스테파노프, BBC 등의 폭로와 증언을 종합하자면, 영화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가 떠오른다. 주인공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 분)는 미국 정부가 개발한 '슈퍼솔져 세럼'이라는 약물을 맞아 신진대사 속도가 수십 배나 빨라져, 엄청난 근육질로 변하는 동시에 상처를 빠르게 회복하고,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강력한 몸을 갖게 된다. 이륙하는 헬리콥터를 한 손으로 잡아 끌어 내릴 정도의 강력한 힘과 보통 사람은 비교도 되지 않을 스피드와 지구력도 얻는다.

한때 캡틴 아메리카의 절친한 동료였다가 적이 되는 윈터 솔져(세바스티안 스탄 분) 역시 비슷하다. 윈터 솔져는 캡틴 아메리카의 주적 집단 하이드라에 의해 수많은 약물실험과 세뇌를 당했고, 한쪽 팔이 기계인 전사가 된다. 그는 실험으로 인해 캡틴 아메리카와 거의 대등한 힘과 스피드를 얻게 된다.

여태까지 세상에 공개된 러시아 정부 주도의 도핑 프로그램은 '스포츠판 윈터 솔져 프로그램'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비탈리 스테파노프에 따르면, 러시아 정부는 일명 '모스크바 실험실'에서 금지약물과 유사한 효과를 보이는 대체 약물을 개발하거나 유사 약물을 찾아내, 코치를 통해 선수들에게 복용하도록 했다. 누군가가 도핑테스트에서 걸리면 그 약물을 폐기하고, 다른 약물을 찾아 복용하도록 하는 시도를 반복해왔다고 한다.

스테파노프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러시아 정부는 선수를 대상으로 끔찍한 약물 실험을 벌인 셈이다. 선수들은 "코치와 정부가 주는 거니까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별다른 의심 없이, 로드첸코프가 말했듯 "마치 어린 아이들처럼" 모든 약물을 복용했다. 약물 실험의 대가로 선수들은 -윈터 솔져와는 달리- 아주 잠깐의 근력 향상 효과를 봤고, 올림픽 메달을 손에 넣었다.

▲ 21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 주코프스키에서 열린 러시아 육상컵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다. 이날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는 러시아 육상 선수들이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에 낸 리우올림픽 출전금지 처분 취소 소송을 기각했다. ⓒAP=연합뉴스

윈터 솔져는 끔찍한 약물 실험으로 인해 초인적인 힘과 스피드를 얻게 되지만, 그 대가로 큰 부작용에 시달린다. 그는 예전의 기억과 독립적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모두 잃어버린 '살인기계'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했다. 더 끔찍한 건, 세뇌가 풀린 이후에도 윈터 솔져는 세뇌상태에서 수행한 모든 살인 임무를 온전히 기억했다는 점이다. 그 기억들로 인해 그는 매일매일 고통 받는 삶을 살게 된다.

러시아 선수들의 운명 역시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들은 금지약물 덕분에 잠깐의 힘을 얻었지만, 그간 스포츠 선수로서 쌓은 모든 것을 잃어버릴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였다. 지난 18일 세계반도핑기구는 러시아가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금지 약물을 복용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하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모든 러시아 선수의 리우 올림픽 출전을 금지하도록 촉구했다. 이에 IOC는 국제육상경기연맹으로부터 리우올림픽 출전 금지 처분을 받은 68명의 러시아 육상선수들이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출전금지 처분 취소를 위한 소송을 신청했으니, 그 결과를 토대로 오는 24일 집행위원회를 열어 최종 결정을 내리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약물로 쌓은 영광을 유지하기란 쉽잖아 보인다. 지난 21일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는 러시아 육상선수들의 소송을 기각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재판소는 러시아 육상선수들의 리우 올림픽 출전 금지를 확정했다. 따라서 오는 24일 열릴 IOC 집행위원회가 러시아의 리우 올림픽 출전금지 결정을 내릴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영화와 코믹스에서 윈터 솔져는 암살 활동 등을 통해 냉전체제의 갈등과 혼란을 야기하는 인물로 소개된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러시아 정부가 만든 스포츠판 윈터 솔져들 역시 새로운 냉전체제와 혼란을 촉발한다.

러시아는 정부, 선수, 그리고 국민이 하나가 되어 격렬한 분노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IOC를 압박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을 비롯한 러시아 정부 인사는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의 결정을 두고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내린 정치적 판단'으로 규정했다. 이어 "부패한 인사들이 깨끗한 선수들의 꿈을 빼앗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하는 동시에 "IOC가 선수들의 꿈을 지켜줄 수 있는 결정을 해 달라"고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서유럽 14개 국가 역시 각국 반도핑기구 대표 명의로 러시아의 리우 올림픽 출전을 금지할 것을 촉구하는 공동 성명서를 IOC에 보내며 IOC를 압박하는 중이다. 지금 세계는 러시아의 리우 올림픽 출전 문제를 둘러싸고 스포츠판 신 냉전 체제에 돌입한 셈이다. 때문에 IOC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러시아와 서방이 스포츠 무대에서 충돌하리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나온다. 리우 올림픽이 가까워오는 이때, 러시아판 윈터 솔져 사태가 고립화하며 갈등을 키우는 세계 정세를 압축해 보여주는 건 아닌가 우려된다. 러시아의 윈터 솔져로 인한 스포츠판 신 냉전 체제는 향후 스포츠 역사는 물론, 정세에도 어떤 영향을 미칠지 우려 섞인 시선을 주목해야 할 때다.

▲ 영화에서 윈터 솔져는 생체실험으로 인간병기가 된 희생양으로 그려진다. ⓒ마블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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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훈

제가 만난 스포츠 스타들은 셀 수 없이 많은 패배가 자신을 승리자로 만들어 줬다고 말합니다. [이종훈의 더 플레이어]를 통해 수많은 이들을 승리자로 만들어 준 '패배와 실패'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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