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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화나, 섹스 토이숍…누가 떠오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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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화나, 섹스 토이숍…누가 떠오르나요?

[프레시안 books] <가만한 당신>

한국에서 유독 주목받지 않는 기사 형식의 하나가 부고다. 우리가 여전히 죽음을 터부시해서인지, 우리 사회가 아직 어려서인지 알 수 없다. 웬만큼 유명한 인물이 아닌 한, 죽은 자의 생전을 되새기는 기사란 쓸 생각도, 읽을 생각도 들지 않는 이야기다.

<프레시안> 역시 이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협동조합 전환 초기, 협동조합에 걸맞은 기사 형태란 무엇인가를 논의하다 나온 아이디어의 하나가 부고였다. 이름 없는 이들의 삶을 기록하는 일은 작은 사람들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매체의 특성과 부합하리라 여겨졌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는 실현되지 않았다. 읽을 이가 없으리라는 내부 판단이 내려졌다. 한정된 인력이 해당 기사 작성을 위해 긴 시간 에너지를 투입하는 게 조직 차원에서 옳은 선택이 아니라는 의견이 나왔다. 다만 이 아이디어의 부분은 살아남아, 현재 프레시안 협동조합 조합원을 소개하는 '이 주의 조합원' 코너로 변형되어 정리된다.

<가만한 당신>(최윤필 지음, 마음산책 펴냄)은 가만한(조용히 있거나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의 부고 모음집이다. <한국일보>에 같은 제목으로 2년간 연재된 이야기 가운데 서른다섯 편을 추렸다. 해당 코너를 연재한 최윤필 <한국일보> 선임기자는 이 책이 "차별과 억압과 무지와 위선에 맞서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가치와 권리를 쟁취하고자 우리 대신 우리보다 앞서 싸워준 이들"의 이야기라고 썼다.

따라서 이 책에 실린 서른다섯의 죽음은, 비록 우리 사회에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지금 우리가 부분적이나마 누리는 자유, 평등, 박애, 인권, 연대, 윤리, 평화의 거대한 뿌리다.

강간이 일상이 된 생지옥 콩고에서 평생 피해 여성의 재활을 도운 전쟁 피해자 레베카 마시카 카추바, 인류애를 지키기 위해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마지막 '링컨여단'의 병사 델머 버그, 아우슈비츠 생존자로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압제를 누구보다 앞서 비판한 유대계 네덜란드인 하요 마이어, 빅 브러더로 질주하는 정보 통제 세상에 맞서 보안 웹 토르(Tor)를 개발하고 인터넷 개인 정보 보호 운동을 이끈 카스파 보든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이 책은 특히 여성에 주목했다. 목숨을 걸고 미국 인디애나 주의 동성혼 합법화를 이끈 니키 콰스니, 영국 성폭력 피해 여성 구제 단체 '이브스' 대표를 지낸 데니즈 마셜, 무슬림 페미니즘 운동을 개척한 파테마 메르니시, 아프리카와 중동 여러 나라에서 행해진 대표적 대 여성 가혹 행위인 할례 금지 운동을 이끈 에푸아 도케누, 1970년대 초 여성 최초로 뉴욕 중심부에 여성을 위한 섹스 토이숍을 연 델 윌리엄스의 생애가 요약됐다.

▲ <가만한 당신>(최윤필 지음, 마음산책 펴냄). ⓒ마음산책
저자는 "읽히는 시점에 필요한 목소리를 내주는 사람"을 책에 소개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기에, 가만한 여성의 이야기를 많이 수록했다고 밝혔다. 한국 사회는 극우적 남성 누리꾼의 여성 대상화, 서초동 살인 사건 등을 계기로 페미니즘 논쟁에 (서구에 비해 뒤늦게) 합류했다. 지금 한국에서 읽혀야 할 인물의 이야기로 저자는 범페미니스트의 이야기를 채집할 필요가 있다 여겼고, 이에 기사로 쓴 인물 중 여성을 특별히 더 많이 골라낸 셈이다.

아직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기 힘든 삶이나, 조금은 이색적인 삶, 미처 알지 못했던 놀라운 이면의 삶도 등장한다. 마리화나 합법화를 위해 마리화나 전문 월간지 <하이타임스>를 발행한 '히피 변호사' 마이클 존 케네디, 자살의 주요 원인이 우울증임을 밝힌 자살학 연구자 노먼 파버로, 지금 한국에는 조금 부정적 의미로 더 회자된 의류 브랜드 노스페이스 창업자 더글러스 톰킨스, 가정주부를 공장으로 이끌어낸 그림 <리벳공 로시>의 모델 메리 도일 키프, 1960년대 흑인 인권 운동의 숨은 주역인 존 마이클 도어, 조력 자살 합법화에 여생을 바친 엘리자베스 리비 윌슨의 삶은 아직 세상에 문을 활짝 열지 못한 한국의 오늘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 책에 소개된 이들에 관해 책은 '생을 거의 완전 연소한 이들'로 설명한다. 좋은 문장으로 잘 정리된 이들의 삶을 책을 통해 돌이켜 보면 저 인용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국내 최초로 기획된 부고 연재 시리즈가 낳은 책인 <가만한 당신>은 우리의 레이더에 잊힌 이들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오늘을 돌아보게 하고, 나아가 읽는 이가 삶을 반추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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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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