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럽'을 추구해 온 유럽연합(EU)의 꿈이 24일 깨졌다. '영광스런 고립'을 선택한 '브렉시트'의 나비효과는 경제적 충격이나 유럽 극우정당의 준동에 그치지 않는다. 영국이 빠진 유럽연합의 지정학적 리스크도 커졌다. 브렉시트가 서구유럽은 물론 미국과 러시아까지 포함한 세력 지형을 뒤바꾸는 변곡점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영국은 미국을 유럽으로 연결하는 가교다.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 협력을 매개하는 특수 관계국이 영국이다. 양국의 정보 교환과 안보 협력은 최상위 수준이다. 경제와 군사 분야에서, 유럽의 중재자로서 영국의 역할도 미국의 뒷받침 하에 성립된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미국과 영국이 이끌어간다. 나토 동맹국 가운데 군사력을 가장 많이 제공하는 나라가 영국이다. 미국 대서양위원회에 따르면 영국의 EU에 대한 군사비 부담률은 20% 이상이다.
브렉시트가 영국의 나토 탈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EU를 통해 추구해 온 '하나의 유럽'이 깨진 충격은 유럽의 집단안보 체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런 이유로 미국은 브렉시트가 야기할 유럽 동맹국들의 군사적 결속력 약화를 우려해왔다.
이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이 영국의 EU 잔류가 "미국과 세계의 이익"이라고 밝힌 데서 엿볼 수 있다. 미군 기관지 성조지도 21일 유럽 결속의 악화는 미국과 나토 동맹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옌스 슈톨텐베르크 나토 사무총장도 브렉시트 투표를 하루 앞둔 22일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유럽의 분열은 지역적 불안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했다. 그는 테러 위협에 직면한 유럽의 현실에서 "강력한 유럽과 강력한 영국이 나토에 유리하다"고 했다.
미국과 나토의 핵심적 근심은 러시아의 팽창이다. 이들은 유럽 안보의 최대 위협 세력으로 이슬람국가(IS) 등 극단주의 세력과 함께 러시아를 상정하고 있다. 나토와 EU, EU와 미국을 매개해온 영국의 유럽사회 이탈이 러시아의 팽창으로 이어져 안보 위기로 직결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동유럽에선 현재 '신냉전'이 공공연히 거론될 정도로 러시아와 나토 간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진 상태다. 지난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고 우크라이나 내전을 촉발한 이래 이 같은 긴장은 줄곧 상승해왔다.
월터 슬로콤브 전 미국 국방부 정책 담당 차관은 나토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속내를 직접적으로 밝혔다.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영국의 EU 탈퇴를 좋아한다는 것은 이미 비밀이 아니다"며 "푸틴은 EU 회원국 간에, EU와 나토 회원국 간에 발생하는 마찰로 러시아가 이득을 볼 것으로 기대하는 게 분명하다"고 했다.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외교전문가 마이클 맥폴 역시 브렉시트가 확정되자 트위터를 통해 "오늘 사건은 푸틴 대외정책의 큰 승리다. 그가 브렉시트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니지만 이로부터 이득을 얻었다"고 했다.
일각에선 러시아가 '탈 EU'를 주장하는 유럽 극우정당을 은밀히 지원한다는 음모론도 제기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를 부인했다. 그러면서 그는 브렉시트 투표 전 "영국이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해야 한다"며 원론적인 입장만을 밝혔다.
그러나 영국이 선택한 '영광스런 고립'이 촉발하는 유럽의 분열을 러시아가 대외 정책의 기회로 간주할 경우, 신냉전의 파고는 위험 수위를 넘어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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