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당시 남한 영토였던 개성과 옹진반도에 포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강릉 인근에서 북한 해병대의 상륙 작전이 시작됐다. 북한의 대대적 기습은 향후 3년에 걸쳐 25개국이 참전한 냉전 이후 최초의 열전(熱戰),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인 한국 전쟁의 서막이었다.
한국 전쟁은 평화란 없다는 신앙을 한반도에 심었다. 전쟁 기간에만 200만 명이 넘는 이가 목숨을 잃었다. 대다수가 민간인이었다. 1953년부터 1990년까지, 비무장지대(DMZ) 근교에서만 10만 건에 달하는 정전 협정 위반사건이 일어났다. 남북 정부는 증오를 발판삼아, 때로는 증오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체제 선전을 강화했다. 통일은 다다를 수 없는 명제처럼 희미해졌다. 소련 해체 후, 세계가 새로운 차원의 이슈(환경, 무슬림, 지구화, 자유주의 등)로 관심을 옮겼으나, 한반도는 20세기의 화석이 된 냉전 체제에 스스로를 가뒀다.
한국 전쟁은 세계사적으로도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우리는 이 전쟁의 세계사적 맥락을 짚어볼 여력이 없다. 오랫동안 한국 학자와 교류한 독일의 역사학자 베른트 슈퇴버 포츠담 대학교 교수가 쓴 <한국 전쟁>(황은미 옮김, 한성훈 해제, 여문책 펴냄)은 비당사자의 시각으로 한국 전쟁의 전후를 정리하고, 나아가 이 전쟁이 세계에 끼친 영향을 훑어볼 의의를 제공하는 책이다.
책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냉전 이후 최초의 전면적 현대전을 기술하기 위해 일제 강점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국주의 시대의 유물로 한반도를 상정하고, 제국주의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해체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국제질서로 떠오른 동-서의 대립이 제3세계에서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 형태로 일어난 비극의 하나로 남북 갈등을 정리한다. 따라서 저자는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내전, 인도와 파키스탄의 갈등,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전쟁과 한국 전쟁을 한 맥락에 묶는다. 우리가 한국의 비극을 세계 시민의 시각으로 바라볼 기틀을 제공한 셈이다.
이후 책은 전쟁의 전개-결과-2000년대까지 이어진 전후 남북 정부의 대응 등으로 정리된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이야기다. 애초 이 책은 한국 현대사에 관해 잘 모르는 독일인을 위해 만들어졌다.
다만, 저자의 시각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외부인이기에 우리처럼 일방의 논리로만 역사를 바라보지 않는다. 전후 남북의 독재 정권(이승만 정부와 김일성 체제)이 자기 권력을 공고화하는 과정을 병렬해 설명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우리에게 북한이 절대 악이었다고 해서, 이승만에게 면죄부를 줄 생각은 없는 셈이다.
한국 독자의 흥미를 끄는 대목은 5장 '한국 전쟁이 전 세계에 미친 결과'다. 저자는 크게 미국과 소련, 중국, 유럽으로 나눠 이 전쟁이 이들 강대국에 미친 영향을 정리했다. 우리에겐 막연히 '남침을 막아준 혈맹' '인해전술로 통일을 막은 적' 정도로만 이해되고 말 열강이 극동의 조그마한 반도에서 일어난 이 전쟁 후 어떤 변화를 겪었는가는 흥미롭다. 우리가 파편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간 강대국의 현대사를 저자는 한국 전쟁의 연장선에서 평가한다.
애초 한반도를 전략적 최우선 순위로 보지 않았던 미국은, 역설적으로 전쟁의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휴전 협상이 이어지던 1952년 국가안전보장국(NSA)이 세워졌다는 점이 상징적이다. 현재 도청 파문의 씨앗을 뿌린 정보기관의 첩보 활동이 본격적으로 가동된 계기가 한국 전쟁으로 드러난 공산화에 대한 공포였다.
한국 전쟁은 미국이 본격적으로 군사 강대국으로 질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1년 미국 의회는 군사 비용을 전년 대비 70% 가까이 증액했다. 이후로도 미국은 경쟁자가 사라진 후에도 군사 대국화에 골몰했다. 무기 생산과 판매에 중독되어 버린 전쟁 국가 미국의 탄생 배경이 한국 전쟁이었던 셈이다.
냉전의 실질적 충돌을 겪은 후, 미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극단적 매카시즘 광기에 빠져들었다. 공산주의자는 국가의 적이 되었다. 반공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미국에서 좌파 세력이 설 자리를 잃는데 한국 전쟁은 적잖은 원인을 제공했다.
무엇보다, 미국은 위에 열거한 모든 영향을 발판으로 세계의 패권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1950년대 경제는 전쟁 특수를 맞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경제적 발판은 소련의 추격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미국을 세계의 절대 권력에 올렸다.
소련과 중국은 전쟁을 계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소련의 공중 지원을 기대하며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반면 스탈린은 애초에 미국과 전면적 분쟁 상태에 돌입하는 걸 꺼렸다. 스탈린 사망 후 골은 더 깊어졌다. 소련은 약속했던 핵폭탄 설계도를 중국에 넘기지 않았다. 중국은 소련의 수정주의를 비판했다.
결국 1970년대 들어 중국은 극동 진출을 노린 미국과 관계 개선을 시작했다. 중국은 동아시아 패권을 노리던 소련을 제어하는 동시에, 미국을 등에 업고 스스로 동아시아의 패권자로 올라설 계기를 만들었다. 소련은, 한국에서의 (간접적) 패배를 맛본 후, 본격적으로 군비확장에 들어갔다. 동구권 전역이 소련의 군비확장 프로그램에 어쩔 수 없이 참여했고, 이는 장기적으로 동유럽의 연쇄 봉기로 이어져 소련 체제 해체의 기원을 만들었다.
이 책은 독일에서 2013년 나왔다. 때문에 최근의 정세 변화를 수록하진 못했다. 그 아쉬움은 옮긴이의 적절한 추가 설명으로 달랠 수 있다. <한국 전쟁>의 세밀한 부분에 관해서는 동의하지 못할 독자가 적잖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저자는 미국의 애치슨 라인(1950년 당시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설정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으로, 한반도는 방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을 근거로, 스탈린이 주저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한반도 개입 가능성이 우려보다 적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가설과 해석의 영역일 뿐이다.
저자는 전쟁 중 일어난 범죄인 노근리 학살 등 군인의 민간인 학살 사건은 물론, 전쟁 전후의 제주 4.3 사건, KAL기 폭파 사건 등도 모두 한국 전쟁과 연관해 희생자가 잊힌 사건으로 정리한다.
우리는 여전히 극단적 체제 경쟁의 장에 머물러 세계의 화석이 되었다. 전쟁이 일어난 지 66년째지만, 남북의 갈등은 끝날 줄 모른다. 이제 삐라를 사용한 심리전, 비무장지대, 판문점 등 모든 휴전의 상징물이 세계인에게는 연구 대상이 되어버렸다. <한국 전쟁>은 우리의 비극이 세계사에 영구히 남긴 변화를 구슬로 꿰어 정리하고, 한편으로 잊힌 사람들과 한국의 미래에 관심을 건넨다. 한국 전쟁은 특수한 시간에 머무른 과거의 유물이 아님을, 60년이 넘도록 (간간이) 이어진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위한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됨을 새삼 깨달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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