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서울학교(교장 최연. 인문지리학자, 서울해설가) 제52강은 관악산에 올라 청량한 정기를 받고 자하동천으로 내려와 탁족(濯足)을 즐기며 연일 계속되는 폭염에 지친 심신을 힐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탁족(濯足)이란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창랑의 물이 맑거든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발을 씻는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세속의 모든 근심을 잠시 내려놓고 자연의 품에 안겨 안일(安逸)의 여유를 즐긴다는 의미입니다.
서울학교 제52강은 2016년 7월 10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 관악구 서울대 신공학관(제2공학관) 앞에서 모입니다(서울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로 나와서 20m 앞 좌회전하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습니다. 서울대 가는 02번을 타고 신공학관(제2공학관) 앞에 하차하세요. 배차시간은 6분 간격이고 약 15분 걸립니다). 정시에 출발하니 출발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대 신공학관-효령각-연주암-연주대-관악사지-자하동천-암각글씨-점심식사 겸 뒤풀이(탁족)-과천향교-온온사-선정비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7월 답사에 대해 들어봅니다.
관악산, 경기5악(京畿五岳)의 하나로 중요 역사무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속리산(俗離山)에서 갈라진 한강 남쪽, 금강 북쪽의 산줄기인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안성의 칠현산(七賢山)에서 서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김포 문수산(文殊山)에 이르는 해발 고도 200m 내외의 낮은 산줄기를 일러, 한강의 남쪽을 지나는 산줄기란 뜻으로 한남정맥(漢南正脈)이라고 합니다.
이 산줄기는 경기도의 한강 본류와 남한강의 남쪽 유역의 분수령으로, 서쪽에 위치한 인천, 시흥, 안산, 수원, 오산, 평택, 천안 등 아산만을 중심으로 한 해안평야와의 경계를 이룬 산줄기로서, 서해안 가까이에는 100m 미만의 낮은 구릉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남정맥의 산줄기가 수원 광교산(光敎山)에서 서해안으로 향하는 본줄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나와 한강 남쪽에 이르는 지맥(支脈)에 마지막으로 우뚝 솟아오른 봉우리가 관악산입니다. 예로부터 개성의 송악산(松岳山), 가평의 화악산(華岳山), 파주의 감악산(紺岳山), 포천의 운악산(雲岳山)과 함께 경기5악(京畿五岳)의 하나로 수려한 봉우리와 빼어난 바위를 자랑하는 명산으로 꼽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는 남경천도(南京遷都)의 적당한 천도지로 삼각산(三角山) 남쪽의 오덕구(五德丘)가 거론되었는데, 오덕구란 중앙에 토덕(土德)의 백악(白岳), 서쪽으로 금덕(金德)의 계양산(桂陽山), 동쪽으로 목덕(木德)의 아차산(峨嵯山), 북쪽으로 수덕(水德)의 감악산(紺岳山), 그리고 남쪽으로 화덕(火德)의 관악산이 둘러친 명당으로 한강을 중심으로 한 지금의 서울 일대를 말합니다.
관악산은 일찍이 역사무대에 등장하여 많은 옛 기록에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강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삼국이 쟁탈전을 펼칠 때나, 결국 한강을 차지한 신라가 당나라를 내몰 때에도 관악산은 지형적 특성으로 군사적 요충지의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은 관악산에 잇대어 서쪽에 솟아있는 호암산(虎岩山)에 삼국시대에 쌓은 석축산성이 남아 있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호암산은 호랑이 모양을 한 범바위[虎岩]가 있어 그렇게 불렀으며, 이 바위호랑이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 시흥에 있던 호암사라는 절을 산위로 옮겨 호압사(虎壓寺)라 이름 짓고, 이것도 모자라 호암산이 바라보이는 상도동 국사봉(國師峰)에 호랑이와 쌍벽을 이루는 사자를 상징하는 사자암(獅子庵)을 세웠다고 합니다.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潤筆) 스님이 세웠던 세 개의 초막
관악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여덟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팔봉능선(八峯陵線)을 따라 잇대어 솟아있는 삼성산(三聖山)은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潤筆) 세 스님이 이곳에 세 개의 초막을 짓고 수행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인데, 고려 말에는 스승과 제자 사이이며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주석(駐錫)하였던 지공(智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서산(西山)과 사명(四溟) 대사도 이곳에서 수행하였습니다.
산 중턱에는 세 개의 초막 중 하나인 삼막(三幕)만이 삼막사(三幕寺)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고 일막(一幕)과 이막(二幕)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습니다.
삼막사에는 몽골이 고려를 침범했을 때 삼막사 스님인 김윤후(金允侯)가 승병(僧兵)이 되어 용인 처인성(處仁城) 전투에서 몽고군 원수(元帥) 살리타이를 죽였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된 3층석탑이 전해져 오고, 달리 살례탑(撒禮塔)이라고도 부릅니다. 김윤후는 전쟁이 끝난 후 나라에서 상장군(上將軍)의 지위를 내렸으나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며 끝내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관악산은 한양도성의 외사산(外四山)의 하나로, 조선의 법궁(法宮)인 경복궁(景福宮)의 조산(朝山) 또는 외안산(外案山)이 해당합니다. 산의 형세가 불의 모양을 하고 있어 풍수상으로 화성(火星)으로, 예로부터 ‘왕도남방지화산(王都南方之火山)’이라 하여 화기(火氣)의 산으로 보았습니다.
한양도성의 외안산인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한 압승책(壓勝策)으로 숭례문 밖에 인공 연못인 남지(南池)를 조성하였고, 관악산 옆에 있는 삼성산에도 한우물이라는 연못을 설치하였으며, 관악산 주봉인 연주대에는 아홉 개의 방화부(防火符)를 넣은 물단지를 놓아두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도성의 사대문의 글씨를 모두 가로로 썼는데 남대문만 숭례문(崇禮門)이라고 세로로 썼는데, 이것은 숭례문의 예(禮)는 5행(行)의 화(火)에 해당되고 숭(崇)은 불꽃이 타오르는 상형문자(象形文字)이므로 숭례(崇禮)라는 이름은 세로로 써야 불이 잘 타오를 수 있고 이렇게 타오르는 불로 맞불을 놓음으로써 관악의 화기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야말로 불로써 불을 제압하고[以火除火] 불로써 불을 다스리는[以火治火] 격입니다.
관악산 정상에 잇대어 죽순처럼 하늘을 향해 치솟은 절경 속 바위가 연주대(戀主臺)인데 이곳 바위틈에 30m의 축대를 쌓고 나한을 모신 응진전(應眞殿)을 지었습니다.
응진전 입구에는 우진각지붕 형식의 마애감실에 중생의 질병을 구제하고 법약을 준다는 약사여래가 입상으로 봉안되어 있는데, 왼손에 약병을 들고 오른손에 시무외(施無畏)의 인(印)을 하고 있습니다. <응진전법당 중수기>에는 효령대군이 조성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건립연대가 고려시대인 것으로 추정되며 감실의 조각수법 등 가치가 높은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연주대는 원래 의상대(義湘臺)라 불렸는데 <연주암지(戀主庵誌)>에 의하면 677년(신라 문무왕17) 의상조사가 한강 남쪽에 유화(遊化)하다가 관악산의 수려함에 끌려 산정에 의상대를 창건하는 동시에 관악사(冠岳寺)를 개산(開山)했다고 합니다.
의상대(義湘臺)가 연주대(戀主臺)로 불리게 된 연유
의상대(義湘臺)가 연주대(戀主臺)로 달리 불리게 된 것은 고려가 멸망하자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오빠 강득용(康得龍)이 서견(徐甄), 남을진(南乙珍), 조견(趙狷) 등과 같이 두문동 72인의 행적을 본따 불사이조(不思二朝)의 뜻을 품고 관악산 의상대에 올라 개성(開城)을 향해 통곡하며 고려(高麗)를 연모한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하며, 강득룡의 묘는 과천정부종합청사 뒤편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세종의 둘째형인 효령대군이 이곳에 올라 시를 짓고 궁궐에 있을 세종을 그리워하며 제일 높은 바위에 연주대라는 글씨를 친히 새겼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관악산에 의상대를 세우고 수행할 때 그 아래에 관악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대웅전 앞에 있는 3층석탑이 고려의 석탑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됨으로 창건 연도가 꽤 오래된 고찰이라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관악사가 연주암(戀主庵)으로 달리 부르게 된 연유는, 고려 말에 의상대가 연주대로 이름이 바뀌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동생인 충령대군이 왕위를 물려받자 평소 불교에 심취하여 많은 불사(佛事)와 역경사업(譯經事業)을 한 효령대군이 유랑길에 나섰다가 관악사를 찾아와 수행하면서 궁궐이 잘 보이는 현재의 위치에 40칸 규모의 건물을 새로 지었는데, 이때부터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 때문인지 연주암 바로 곁에는 효령대군의 영정(影幀)을 모신 효령각(孝寧閣)이 세워져 있는데, 원래는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을 1994년 효령각을 짓고 옮겨 봉안하고 있습니다.
연주대 바로 밑에 위치한 관악사지(冠岳寺址)는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연구소의 발굴 조사로 15세기부터 18세기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으며 관악사는 적어도 6개 이상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일시에 건립된 것이 아니고 시기에 따라 일정한 가람을 건립하고 이것이 수해(水害)에 의해 폐사(廢寺)되며 인근으로 옮기거나 혹은 그 자리에 대지를 조성하여 새로운 가람을 건립하여 명맥을 유지하다 18세기에 폐사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사찰 건물은 급경사 지역에 석축을 쌓아 평탄하게 만든 후 평탄대지를 따라 계단식으로 축조하였는데 이는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인공적인 건물과 자연지형과 조화를 꾀하려는 전통적인 산지가람의 배치방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결국 관악사지는 신라 의상이 창건한 사찰 터로, 1411년(태종 11) 양령대군과 효령대군이 충령대군에게 세자위를 전위한 후 관악산에 올라 전위에 따른 심정을 달랠 때, 특히 효령대군이 이곳에서 2년간 수양하며 관악사를 옛 터로부터 현 위치로 이축하면서 40칸의 가람을 건설하였다고 전해지며 이것이 현재의 연주암이 되었습니다.
관악사지는 최근 2015년 5월 14일에서 9월 25일까지 대한불교조계종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제2차 유적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청동숟가락과 철제 방탄모 등 금속 81건 포함, 모두 1446건을 출토하였고 이후 경기도 문화재 심의위원회 승인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리고 2016년 5월 4일 과천시는 민간자본사업 보조로 관악사 복원공사를 승인하였는데,관악사 복원공사에는 모두 25억8000만원이 투입될 예정이며, 과천시가 15억6000만원을 지원하고 조계종이 10억2000만원을 부담하게 됩니다.
복원의 내용을 살펴보면 승방과 누각, 공양간 등 건물 4동을 먼저 짓는데 사지의 총 너비는 4천843㎡이며, 조계종이 짓는 건물은 연면적 333.5㎡(건축면적 294.95㎡)에 해당됩니다.
관악산에서 우면산과 이어진 산줄기 안부에는 남태령(南泰嶺)이 있는데 예전에 과천(果川)을 거쳐 수원(水原)으로 가던 옛길로서 삼남(三南)으로 통하던 길이었고, 한때는 정조가 지극한 효성에서 아버지를 그리워하여 묘소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과천을 지나서 남쪽으로 조금 더 가면 물맛이 좋아 정조가 가자(加資)로 당상(堂上)벼슬을 제수(除授)했다는 찬우물이 있고 그 위에는 묘가 하나 있는데, 이는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을 때 협력한 김상로(金尙魯)의 형인 좌의정(左議政) 김약로(金若魯)의 것입니다. 정조가 이곳을 지날 때 지난날의 아버님의 애절함을 생각하여 그 묘소조차 보기 싫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다고 하며 그 뒤 안양에 만안교(萬安橋)를 새로 놓고 새 노정(路程)을 택한 것이 이러한 연유에서였다고 합니다.
관악산이 부려놓은 고을은 안양, 시흥, 과천 그리고 서울의 관악구인데, 특히 과천고을은 관악산과 청계산 사이에 형성된 고을로서 한양에서 삼남지방(三南地方)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도성 안의 정보에 제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고을이라 일찍부터 과천현감을 제일로 꼽았습니다.
관악산은 마주보고 있는 청계산에 비해 골이 얕은 골산(骨山)이라 ‘남성산’ 또는 ‘백호산(白虎山)’에 비유되고 청계산은 관악산보다 비록 높이는 낮지만 골이 깊은 육산(肉山)이라 ‘여성산’ 또는 ‘청룡산(靑龍山)’에 비유됩니다.
관악산이 품은 계곡을 자하동천(紫霞洞天)이라 합니다. 그 흘러내리는 물줄기의 방향에 따라서 삼성산 아래 안양 쪽 계곡을 남자하동이라 하고 연주대에서 과천 쪽 계곡을 동자하동이라 하며 서울대학교에서 신림동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북자하동이라 하였습니다. 남자하동은 안양천으로, 북자하동은 신림천으로 이름이 바뀌어 복개되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고, 동자하동만이 자하동천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으며 20여리에 이르는 골짜기 입구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와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수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어 특히 이 일대를 ‘자하시경(紫霞詩境)’이라고 부릅니다.
이곳은 조선시대 정조, 순조, 헌종에 이르는 3대에 걸쳐 시, 서예, 그림의 3절로 유명한 신위(申緯)가 살던 마을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자하’는 신위의 호입니다. 신위는 관직을 버리고 자하동천에 내려와 시, 글씨, 그림으로 낙을 삼고 여생을 보냈다고 하며 자하동천의 바위에는 4종의 암각글씨가 새겨져 전해지는데 그중 ‘단하시경(丹霞詩境)’ ‘자하동문(紫霞洞門)’ ‘백운산인 자하동천(白雲山人 紫霞洞天)’은 신위의 글씨고 ‘우암서(尤庵書)’는 송시열의 글씨로 추정됩니다.
온온사(穩穩舍) 현판 내린 정조
과천고을의 관아(官衙)는 대부분 폐허가 되었고 객사(客舍)와 향교(鄕校)만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온온사(穩穩舍)는 조선시대 과천현의 관아에 부속된 객사의 정당 건물입니다. 객사는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관사(官舍)로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의 숙소 역할과 함께 궐패와 전패를 모셔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향궐망배(向闕望拜)를 행하는 곳이었습니다.
과천의 객사는 1649년(인조27) 현감 여이홍이 객사 동헌을 건립하여 창건하였고, 1666년(현종 7) 남창조에 의해 객사 서헌이 건립되어 다른 지역의 객사보다 규모가 컸는데, 그 이유는 조선시대 왕이 남행할 때에는 과천을 경유해야 했고 경우에 따라 왕이 묵어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온온사란 명칭을 갖게 된 것은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원묘인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현륭원으로 고치고 이곳에 참배하기 위해 능행할 때 과천의 객사에 머물며 주위경관이 좋고 쉬어가기 편하다 하여 온온사(穩穩舍)란 현판을 내림으로써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때 관아동헌에는 옛 별호인 부림을 따서 부림헌(富林軒)이란 현판도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온온사는 일본인들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과천면의 청사로 사용하다가 1932년 기존 건물을 헐어 원형을 변형하여 새로 지은 것을 1986년 전라남도 승주군 낙안 객사의 형태를 참고로 하여 완전 해체 복원하였기 때문에 원형을 찾는 데는 새로운 연구조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온온사 입구에는 병자호란 때 관악산 바위굴에 은거하면서 청군과 싸운 현감 김렴조, 명성황후의 친정아버지 민치록 등 과천현감 15명의 선정비가 남아 있습니다.
과천향교는 1398년(태조 7)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본래의 위치는 과천 관아 동북 2리에 있었으나 1690년(숙종 16) 과천현감 황이명이 관아 서쪽 지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1959년 시흥군의 군명에 따라 시흥향교로 불리다가 1996년 본래의 명칭인 과천향교로 바뀌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산행차림(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번씩, 둘째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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