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泰安)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준말로, ‘안면도(安眠島)’나 ‘안흥(安興)’도 같은 뜻을 지닌 지명입니다. 태안반도의 앞바다인 안흥량(安興梁)이 잔잔하여 섬들이 편안하게 잠들 수 있어야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해진다는 바람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고려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침탈이 잦았던 곳이라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싱그러운 6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32강은 ‘국태민안’의 염원이 담긴 고을, 태안을 찾아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32강은 2016년 6월 26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서산IC-굴포운하-백화산(백화산성/태안마애삼존불/태을암)-태안읍치구역(목애당/경이정/태안향교)-점심식사 겸 뒤풀이-안흥성-소근진성-이종일유적지(이종일생가/사당/이종일기념관)-서울의 순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32강 답사지인 <태안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국내 유일의 해안국립공원을 품다
태안은 북쪽으로는 가로림만(加露林灣), 남쪽으로는 천수만(淺水灣)이 깊숙이 들어와 있고 서쪽으로는 서해가 버티고 있으며 동쪽으로만 내륙인 서산과 맞닿아 있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이면서 국내 유일의 해안국립공원을 품고 있습니다. 안면도 천연송림, 금모래의 아름다운 30여 개의 해수욕장, 그리고 전설을 간직한 많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륙은 낮은 구릉지로서 많은 산지가 개간지로 개발되어 논과 밭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태안은 삼한시대 마한(馬韓) 54국 중의 하나로서 태안에 자리한 나라는 신소도국(臣蘇塗國)과 고랍국(古臘國)이었습니다. 신소도국은 지금의 태안읍 동문리 백화산 기슭의 샘골이며, 고랍국은 고남면 고남리에 있었습니다.
마한 54개국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는 충남 직산(稷山)에 있었던 목지국이었는데, 이 목지국의 진왕(辰王)이 정치적으로 최고의 연맹장이 되어 주변 여러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따라서 태안에 위치했던 신소도국은 제천의식을 담당한 신앙적인 소도(蘇塗)의 종주국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태안의 옛 이름이 소태(蘇泰), 소주(蘇州), 소성(蘇城) 등이었던 점도 소도와의 연관성을 말해줍니다.
백제가 기원전 18년 한강 유역인 위례성에서 온조에 의해 건국되고 근초고왕이 369년 마한 54개국을 완전 정복하여 고대국가인 백제에 병합할 때 태안에 위치했던 신소도국과 고랍국도 백제에 편입되어 성대혜현(省大兮懸)으로 불리게 됩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소태현(또는 소주)이라 하였고 고려시대에 12주로 나누어 목사(牧使)를 파견하여 다스릴 때는 공주목(公州牧) 관할이었습니다. 전국을 10도로 나누었을 때는 하남도(河南道)에 속했으며 현종(顯宗) 때 전국을 5도 양계(五道兩界)로 나누었을 때는 지금의 홍성인 운주에 속했으며, 1298년(충렬왕 24)에 소태현(蘇泰縣) 출신 이대순(李大順)이 원(元)으로부터 총애를 받아 소태가 태안(泰安)으로 개칭되고 군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태안군을 폐합하여 서산군에 예속시켜 면으로 격하되었다가 지난 1989년 태안군으로 복귀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특히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주민들이 약탈과 피살을 당하자 1373년(공민왕 22)에 왜구의 침탈에 못 견디고 태안 군수가 몇 명의 아전을 데리고 서산군으로 가서 태안군이 폐군(廢郡)된 적도 있으며, 조선 초 1439년(세종 21)에 비로소 새 공관(公館)을 짓고 김흔지(金炘之) 군수가 부임하였는데, 1479년(성종 10)에는 국조(國祖)인 단군 영정을 경상도 의성에서 태안으로 이안하여 그 영험으로 오랑캐를 막으려고도 하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해변 고을이지만 산성이 많이 있었습니다. 안흥성(安興城)은 1655년(효종 6)에 둘레 1,568m 높이 3.5m로 축조된 석성(石城)으로 서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으며 안흥진성(安興鎭城)이라고도 부르며 중국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기도 한데 1894년 동학혁명 때 성내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으나 성곽과 동문인 수성루(壽城樓), 서문인 수홍루(垂虹樓), 남문인 복파루 (伏波樓), 북문인 감성루(坎城樓)의 성문이 비교적 원형대로 남아 있습니다.
효종이 이곳 지형에 대해 묻자 지경연사(知經筵事)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이곳은 바다 가운데로 수십 리를 뻗어 들어가 있으므로 여기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양곡을 저장하면 안으로는 강도의 표리(表裏)가 되고 밖으로는 호남과 영남을 제어하게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백화산성(白華山城)은 1287년(충렬왕 13)에 태안의 진산(鎭山)인 백화산에 축조된 길이 619m, 높이 3.3m의 석성(石域)으로, 성안에는 2개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봉수대가 설치되어 동쪽으로 서산의 북주산(北主山), 남쪽으로 부석면의 도비산(島飛山)과 연락을 취했으나 지금은 폐성되고 태을암 동쪽 약 100미터 지점에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소성현(蘇城縣) 때는 태안읍성(泰安邑城)으로 사용되었으며 태안군내 성곽 중에서 제일 먼저 축성된 것입니다.
해변 고을이지만 산성 많아
소근진성(所斤鎭城)은 태안 해안의 방비 및 조운선의 호송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쌓은 산성입니다. 이곳은 고려 때부터 오근이포(汚斤伊浦)라 불리던 포구였는데 1404년(태종 4) 소근포로 이름을 바꾸어 ‘진(鎭)’을 설치하고 왜구를 소탕하여 ‘소근포진’이라 하였고 1467년(세종 12) ‘좌도수군첨절제사영(左道水軍僉節制使營)’을 두고 당진포만호, 파지도만호, 안흥량만호를 관할하였습니다. 1514년(중종 9)에 당진포만호 및 파지도만호 첨절제사들이 와서 둘레 630m, 높이 3m의 석성을 쌓았으나 임오군란 이후 군제도 폐지에 따라 ‘첨절제사’가 철수하고 ‘진’도 폐지되었습니다.
토성산성(吐城山城)은 토성산(土城山)에 둘레가 590m, 높이 3.3m로 쌓은 석성(石城)으로, 정확한 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태안반도의 지형적 특수성 등으로 미루어 보아 16세기 초엽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동학혁명 때 출병하기 위해 동학군(東學軍)이 집결했던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큰 산성입니다. 그후 폐성되어 90여 년 내려오면서 성벽이 허물어지고 퇴락되어 지금은 부분적으로 그 윤곽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밖에 두야리산성(斗也里山城)은 둘레가 600m의 석성이고, 한의산성(漢衣山城)은 둘레가 200여m의 석성이며 양잠리산성(兩潛里山城)은 둘레가 270m의 토성으로, 비교적 작은 규모의 산성들인데 축조 시기는 확인할 수 없어나 모두가 태안의 해안방어를 위하여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태안읍치구역에는 태안읍성 일부와 경이정, 목애당 그리고 태안향교가 남아 있습니다. 태안읍성(泰安邑城)은 조선 태종(太宗) 때 축성된 석성(石城)으로서, 그 둘레는 473m에 높이 3.6m이며 성안에는 4개의 우물이 있었고 동서남북으로 4대문이 있었으며 동학혁명 때 폐성되었는데, 다행히도 구 군청 뒤쪽 민가 근처에 일부의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어 태안읍성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경이정(憬夷亭)은 1399년(정종 원년)에 태안현 관아 내에 세워졌던 건물로 중국의 사신들이 안흥만(安興灣)을 통하여 들어올 때 휴식을 취하던 곳이기도 하고 방어사(防禦使)가 군사에 관한 명령을 내릴 때도 이용하였습니다. 매년 정월 보름날 밤에 주민들이 모여 태안의 안전과 태평을 위해 재우제(宰牛祭)를 지내기도 하였으나 1907년(순종 1)에 없어지고 일제강점기에는 야학당, 그 후에는 경로당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경(憬)’은 원행(遠行)을, ‘이(夷)’는 평안(平安)하다는 뜻으로 “중국으로 멀리 항해하는 사신들의 평안함”을 기원하기 위해서 붙여졌다고 하며, 다른 하나는 태안이 외적의 침입이 잦은 지역이라 “오랑캐를 경계하라” 의미로 <시경(詩經) 노송반수(魯頌泮水)>에 나오는 경피회이(憬彼淮夷)에서 따 왔다고 합니다.
태안의 객사로 목애당(牧愛堂)이 있습니다. 영조 때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태안의 객사에는 정청 6칸, 동헌 12칸, 서헌 10칸, 중대청 8칸, 하마대 5칸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소실되었고 지금은 목애당, 내삼문, 경이정과 이름을 알 수 없는 건물 등 4동만 남아 있으며, 특히 목애당은 당시 소실되고 남은 목재와 소근진성의 목재를 사용하여 1904년(고종 8)에 신축한 것입니다.
태안향교는 1047년(태종 7)에 창건되어 그 뒤에 2번씩이나 옮겨지어 현재의 위치에 이르는데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동무(東廡), 서무(西廡), 제기고(祭器庫),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홍살문 등이 남아 있으며 동국18현을 포함하여 39위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태안마애삼존불, 우리나라 마애불의 시초
태안 지역은 5세기 말부터 대륙으로 통하는 교통로(交通路)였습니다. 이런 곳에는 바다 멀리 길 떠나는 이들이 무사히 귀향하기를 바라는 신앙의 대상으로 마애불이 많이 형성되었는데 이를 뒷받침 해줄 수 있는 유적이 백화산 태을암 옆의 태안마애삼존불(泰安磨崖三尊佛)로서 이는 우리나라 마애불의 시초가 됩니다.
태안마애삼존불은 태안의 진산(鎭山)인 백화산 정상 부근 자연암벽에 감실(龕室)을 마련하고 중앙에 본존불을, 좌우에 협시보살을 배치하는 일반적인 삼존배치와 달리 중앙에 보살을 좌우에 불상을 배치한 독특한 형식으로 새겼습니다. 좌우의 불상은 크고 중앙의 보살은 상대적으로 작은데 다만 오른쪽 불상의 얼굴이 뚜렷하고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수인(手印)은 시무외, 여원인(施無畏, 與願印)을 한 모습입니다.
태을암(太乙庵)은 백화산 중턱에 있으며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태을암’이란 명칭은 단군 영정을 모셨던 태일전(太一殿)에서 연유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태일전은 태안마애삼존불의 위쪽 약 200미터 지점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습니다.
복성암(福成庵)은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일설에 따르면 고려 말에 창건되어 매우 번창하였다는데 그때는 절구통이 무려 15개가 사용되었다고 하니 매우 큰 사찰이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이렇던 복성암이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숭유억불정책으로 사세(寺勢)가 약화되어 마침내 폐사 위기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나마 한국전쟁으로 모두 소실되었고 지금은 대웅전, 요사(寮舍), 그리고 산신당(山神堂)이 남아 있습니다.
흥주사(興住寺)는 창건 연대가 확실치 않으나 1983년 흥주사의 원통전(圓通殿)을 개축하기 위해 해체했을 때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 중에 재중수(再重修)가 영락19년(1421)에, 3중수가 강희29년(1690)에, 4중수가 도광11년(1831)에, 5중수가 광무10년(1906)에 실시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983년의 개축을 6중수로 본다면 재중수에서 6중수까지 모두 562년으로 이를 평균해 보면 약 112년 간격으로 한 번씩 중수한 셈이 되는데 이를 근거로 고려말로 추정되며 현재 대웅전, 만세루(萬歲樓), 요사채, 3층석탑이 남아 있습니다.
태국사(泰國寺)는 안흥성 내 성동산(城東山)에 자리하고 있는데, 창건 연대는 기록으로 전하지 않고 <서산군지(瑞山郡誌)>에 “태국사는 국란이 있을 때 주승이 수막대장의 명을 받아 수군이 있는 18읍의 각 사찰의 승군을 지휘할 수 있는데, 이때의 군사상의 직권은 첨절제사와 같다”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호국사찰의 역할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옥파 이종일의 생가터에는 새로 복원한 생가와 사당 그리고 이종일기념관이 있습니다. 이종일(李鍾一)은 아호가 옥파(沃波), 천도교 도호는 묵암(默庵)으로 1858년 태안군 원북면에 서 출생하였고 1873년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하게 되는데 1882년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에 갈 때 사절단 일원으로 방일하여 명치유신 이후의 일본 근대문물을 직접 보고 온 뒤로 유교사상에서 벗어나 실학과 개화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896년 서재필, 윤치호, 주시경 등과 함께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였고 1898년 개화운동 단체인 대한제국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1898년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으나 10개월 만에 사퇴하였습니다.
1899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폐쇄당하자 언론활동에만 전념하여 이후 이승만 등과 함께 한글신문인 <제국신문(帝國新聞)>을 창간하고 <대한황성신문(大韓皇城新聞)> 사장을 맡았습니다. 1906년 손병희를 통해 천도교에 입교한 뒤, 윤치호 윤효정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 1907년 대한협회에도 참여하였고 한일합병 이후에는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천도교 월보과장(月報課長)과 보성인쇄주식회사(普成印制株式會社) 사장을 역임했습니다.
독립운동가 이종일의 생가터
1919년 3·1만세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으로서 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는데 천도교가 운영하는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 사장을 맡고 있던 이종일이 공장장 김홍규가 채자(採字)한 <기미독립선언서>를 직접 교정 본 후 21,000부를 인쇄하여 경운동(慶雲洞) 자신의 집에 보관해 두었다가 28일 아침에 승동예배당에 모여 있는 학생대표들에게 전달합니다. 이후 종로 이북은 불교학생이, 종로 이남은 기독교학생이, 남대문 밖은 천도교학생이 맡아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습니다.
이종일은 1922년 3.1만세운동 3주년이 되는 날을 기해 천도교 신자들, 보성사 직원 50여명 등 천도교 교인들을 중심으로 다시 거리로 나가 제2의 3.1운동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계획하고 그때 낭독할 제2의 독립선언문인 <자주독립선언문> 초고를 직접 작성, 김홍규에게 인쇄토록 하였으나 일제의 감시망에 걸려 인쇄물은 모두 압수당하였습니다. 그가 쓴 <자주독립선언문>은 구전으로만 전해 오다가 1979년 2월 27일 이현희 교수가 <묵암비망록(黙庵備忘錄)>에서 찾아냈습니다.
태안은 해안 고을의 특성상 무형문화유산인 고유한 민속신앙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동신제(洞神祭)는 마을의 안녕과 국가의 평안을 바라는 마음과 풍년을 기원하는 뜻에서 동신(洞神)을 모시고 마을 주민들이 함께 지내는 제의(祭儀)입니다. 원래는 백화산 중턱에 자리 잡은 태을암과 마애삼존불이 있는 중간 지점에 산신당을 짓고 매년 정월에 산신제(山神祭)를 지내던 것에서 기인한 것인데, 제례의식은 1936년에 중단되었다가 1972년 주민들이 숙의하여 동신제의 형식으로 경이정(憬夷亭)에서 중앙대제(中央大祭)를 지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과거에 중앙대제와 함께 지냈던 노신제(路神祭)는 태안읍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4방에서 거행하였는데, 이 네 곳에 긴 말뚝을 박고 밀짚방석으로 가린 다음 자리를 깔아 상을 차려놓고 제물은 주(酒), 과(果), 포(脯), 채(菜)를 비롯하여 시루떡을 통째로 놓고 각 마을 이장이 주관하여 제례를 거행하였습니다.
이후 미신타파운동으로 중단되었다가 1980년에 부활하여 남문리에서 다시 열렸으나 1987년부터 중앙대제에 통합되었습니다.
황도당제(黃島堂祭)는 안면읍 황도리에서 매년 정월 초순에 거행되는 대동제(大同祭)입니다. 그 유래는 오랜 옛날 짙은 안개가 자욱한 어두운 밤에 출어를 한 황도리 어선들이 항로를 잃고 표류할 때 지금의 당산(堂山)에서 밝은 불빛이 귀로를 밝혀 모두 무사히 돌아 올 수 있었기에 이때부터 주민들은 자신들을 보살펴준 신성한 곳이라 하여 이곳에 당집을 짓고 제사를 모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선(滿船)을 하면 배에 대나무를 잘라서 장식한 붕기를 달고 황도로 돌아오는데 배가 물에 잠길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 사용하는 이 붕기는 만선의 상징으로 풍어를 희망하는 어부의 바람을 담아 당제를 지내기에 ‘붕기풍어제’라고도 부릅니다.
제사는 황도리에 처음 정착한 나주정씨(羅州鄭氏)와 해주오씨(海州吳氏)가 나주정씨의 당집에서 산신제를 지내던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원래는 뱀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고 당집에 뱀의 그림을 붙여 신봉했으나 미신 타파의 일환으로 지금은 임경업(林慶業)장군을 어로신(漁撈神)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해안 고을의 민속신앙 많이 남아
이처럼 황도의 당제는 어민들은 불안전하고 변화무쌍한 바다가 삶의 터전이어서 그들의 실생활에서 가장 절실했던 풍어와 안전을 바라는 강렬한 종교적 열망이 당굿으로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려와 조선은 도읍이 서해에서 가까운 개경(開京)과 한양(漢陽)에 위치함에 따라 서해의 연안해로가 운송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당시 세곡(稅穀)과 각종 공납품(貢納品)의 주요 생산지는 경상, 전라, 충청의 삼남지방이어서 물류의 대부분이 태안반도 연안을 경유하여 개경 혹은 한양으로 옮겨졌습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전라도에서 생산된 세곡이 나주의 영산창(榮山倉)과 영광의 법성포창(法聖浦倉)에 보관했다가 서해안의 해로를 따라 강화도 앞바다를 지나 조강(祖江)을 거쳐 서강(西江)의 광흥창(廣興倉)에 모여들었는데 이 뱃길에서 암초가 많고 물살이 빠르고 파도가 높은 곳이 태안 앞바다인 안흥량(安興梁)으로 세곡선이 자주 침몰하여 이곳에 운하를 파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태종 때 하륜(河崙), 세종 때 신숙주(申叔舟), 효종 때는 대동법의 주창자 김육(金堉), 현종 때 송시열(宋時烈)에 의해서 태안반도 운하공사에 대한 논의들이 시도되고 직접 굴착 공사에 들어가기도 하였지만, 돌산이라는 이 지역의 토질 여건, 조수 간만 차이, 새로운 조창의 설치 등 수반되는 난제들이 많아서 완공을 보지는 못했으며, 특히 정조는 태안반도 운하 건설에 관한 내용을 과거시험 문제로 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로 태안에는 ‘다 판 운하’와 ‘파다 만 운하’ 두 개가 남아 있는데 파다만 운하는 천수만 북쪽 끝과 가로림만 남쪽 끝을 잇는 굴포운하(掘浦運河)로 여러 차례 공사를 했으나 결국 실패하여 흔적만 남겨 놓았습니다. 다 판 운하는 지금의 안면대교 아래에 있었던 판목운하(鑿項運河)로 이 운하가 만들어지기 전에 안면도는 섬이 아니라 곶이었는데 운하가 개통되어 섬이 되었다가 다시 연륙교(連陸橋)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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