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시기 전 꽤 오랫동안 아버지는 당시 나이 든 여느 집 가장과 마찬가지로 '뒷방 노인네'로 살았다. 가족 중에 아버지 보고 뒷방으로 가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가족 여럿이 모여 식사라도 한 다음에는 어느 순간 슬그머니 뒷방으로 물러났다. 내심 말이 안 통하는 아버지가 한자리에 없는 게 편하긴 했다. 그러나 '뒷방'에 엄밀한 배제의 의미가 담겼다고 할 수는 없었다. 옛날 양반집과 달리 아버지의 뒷방은 거실과 곧바로 이어져 있어서 거실에서 어머니와 자식들이 나누는 대화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단지 대화에 참여하지만 않을 뿐이었다. 아버지의 의사소통은 어머니를 통하거나 손자·손녀를 메신저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직접적인 소통은 아주 드물었고 아주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목격되었다. 지금은 귀국하여 또 다른 '뒷방 노인네'의 길을 가고 있는 큰형이 젊어서 뉴질랜드 이민을 위해 출국하는 날, 나는 '뒷방 노인네'의 눈물을 처음으로 보았다.
'뒷방 노인네'라 하여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파악되었다. 간접적 의사소통 방식 중에 방백이 있었는데, 예컨대 대학생인 내가 거실에라도 있을라치면 "빨갱이"라고 '김대중이' 욕을 해댔다.
'어버이연합 게이트'로 나라가 시끄럽다. 나라가 시끄럽다고 한다면 조금 과장일 수 있겠다. 이런 국민적 관심사가 공중파 등에선 완전히 실종된, 어느 네티즌의 말대로 "소름 끼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기에 말이다. 많이 산 인생은 아니지만, 또한 내 평생 이렇게 지질한 게이트는 처음 본다. 그 지질함으로 인해 마음이 참담하다. 우파라고 부르기에도 거시기 한 아무튼 어느 소위 우파논객의 "참담함"과는 180도 다른 의미에서이다.
이제 곧 현대사에 사소한 추문으로 기록된 뒤 사라지고 말테지만, 어버이연합과 관련하여 일단 그 명칭이 형용모순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번에 자기편으로부터 천덕꾸러기가 되고 반대편으로부터 조롱거리가 된 추선희 사무총장은 어느 인터뷰에서 어버이연합을 "회초리를 든 아버지"로 표현했다. 간단히 말해 회초리를 든 어버이는 어버이연합을 하면 안 되기에 어버이연합이란 명칭이 형용모순이다.
아버지는 가장이기 때문에 집안에서 회초리를 들 수 있을 뿐 집밖에서 회초리를 들면 폭력이 된다. 어버이연합 집회에서 가끔 보았듯 회초리 대신 몽둥이를 들면 폭력배가 되고 회초리를 들고 설치면 치매가 된다. 집밖의 가장은 아무리 나이가 많이 들었어도 단지 시민으로서 시민적 방법으로 의사표현에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버이연합의 올바른 명칭은 '박근혜를 지지하는 장·노년 연합' 정도였을 게다. 정당에 청년위원회가 있듯 시민단체 행세하지 않고 정당의 장·노년 위원회로 활동했으면 형용모순이 발생하지 않고 이런 수모와 참담함을 겪지 않았으리라. 물론 어버이연합을 정당이 정당 내 조직으로 수용할지는 논외이다.
어느 정도 양보해 우리 사회가 가족주의적 체제라면 그나마 어버이연합이란 표현이 용인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족주의는커녕 이미 가족마저 해체되고 있는 마당에 어버이들의 연합이 회초리를 드는 게 가당키나 한가. 어르신이란 용어도 그렇다. 전통 규범으로도 스스로를 어르신이라고 주장한 어르신은 없었다.
정작 사악함은 어버이연합의 배태에 깃든 이러한 모순을 알고도 정치적 욕심에 이 단체를 이용한 세력에게서 발견된다. '뒷방 노인네'들이 존경받는 시대가 끝났다 하여도 그들을 아스팔트로 끌어내고, 무식하고 폭력적이고 막무가내인데다 추한 존재로 낙인찍게 한 그 끝장 사악함. "김대중이 빨갱이"를 내게 설파한 선친의 선동은 집안이나 친구들 사이의 술자리에서 그쳤고 아스팔트로 나설 때는 투표장을 찾을 때뿐이었다.
사악한 기획의 결과로 '아스팔트 노인들'은 이제 그나마 남아 있을지 모를 노인에 따라 붙는 원숙함과 지혜, 존경을 잃어버리고 추하고 지질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금의 풍요로움을 만드는 데 헌신하고 희생한 노인세대는 젊은 세대로부터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나아가 국가나 사회로부터 언제든 따뜻한 식사를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 대접이 "점심도 안 먹고 집회에 참가했다가 집에 가면서 2만 원 받아서 김밥 한 줄 사먹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2만 원에 목매서 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애국정신으로 하는 것"이라는 그들의 절절한 주장이 광대극의 대사로 수용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참담함을 느낀다.
어버이연합의 후원자들이 광대극에서 쏙 빠져 우아하게 모르쇠로 일관하는 풍경은 더욱 참담하다. 대표적으로 전경련의 허창수 회장은 4월 30일 경제부총리와 만나 경제살리기를 논의하였지만 어버이연합 지원에 대해선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허창수 회장은 1948년생으로 나이로는 어버이연합 회원들과 함께 활동해도 되는 '어버이' 반열에 속한다. 하지만 '골프장 노인네'는 '아스팔트 노인네'들에게 푼돈을 지원하는 건 묵인해도 그들과 엮이는 것 자체에는 경기를 일으켰을 법하다. 자신과 그들은 같은 계급이 아니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허창수 회장의 침묵에 대해 그가 전경련에서 '뒷방 노인네' 취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져본다. 믿기진 않지만, 이승철 전경련 상근부회장 등이 알아서 처리하고 비상근인 회장에겐 보고조차 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만일 그렇다면 허 회장 또한 어버이연합의 회원들처럼 이용당했다고 할 수 있을 테니 일견 측은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을 추종하는 어버이연합에 대해 편집·보도국장 간담회에서 선을 그었다. 확인된 어버이연합과 청와대의 '협의'의 의미가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질 리는 없을 테고, 어쩌면 퇴임 후에나 실체적 진실이 밝혀질 약간의 가능성이 남아 있지만 이 또한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일 공산이 크다. 사실 진실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안다. 사법적인 진실과 공표된 진실이 실체적 진실과는 다를 뿐이며, 대중의 인식체계에선 이미 실체적 진실이 파악되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신뢰를 중시하는 분이며, 배신을 극도로 싫어한다. 지난 대선 기간 국정원의 댓글공작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듯 어버이연합에 대해서도 현재까지의 정황으로는 박 대통령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다만 자신을 추종한 사람들에 대한 신뢰의 책임은 가능하지 않을까. 문득 드는 생각이, 퇴임 후에는 자연인으로 돌아가고, 나이도 드실 만큼 드셨을 테니 만신창이가 된 어버이연합을 복원하면 어떨까.
전경련에서 '뒷방 노인네' 취급당하는 허창수 회장과 함께 힘을 모아 파고다공원 등지에서 김밥도 제대로 못 먹는 결식 노인들을 돕는 새로운 형태의 어버이연합을 부활시키면 어떨까 하는 기대를 품어본다. 그때 나는 존경받는 정치인과 기업인으로 주저 없이 박근혜와 허창수를 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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