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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감시 받았던 황제, 대통령은?

[한인희의 중국 역사의 뒤뜰] 중국 황제 이야기② 황제의 일상

중국의 황제는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고귀한 존재였다. 모두가 황제 한 사람을 위해 존재했고, 황제가 죽으면 함께 죽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면 황제들은 마음대로 행동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황제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은 일일이 기록되고 엄격하게 관리 되었다. 황제의 행동은 사소한 것일지라도 왕조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무거운 통치 행위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격하게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국의 전통이었다.

모든 말과 행동이 빠짐없이 기록된 중국 황제의 삶

황제의 언행에 대한 기록으로 <실록(實錄)>과 <기거주(起居注)>가 있었다. <실록>은 사관이 황제의 언행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서 편년체 형식으로 통합적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내용의 첨삭이 가능했다. 이에 비해 <기거주>의 기록은 매우 단순했다. 황제의 언행과 행동을 빠짐없이 모두 기록했다. 다만 차이점은 <기거주>는 <실록>과 달리 언행에 대한 기록을 첨삭할 수 없었다. 따라서 황제의 언행의 진면목은 <기거주>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기거주>의 기록은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관원이 있었다.

<예기(禮記)>에는 천자의 일상생활이 모두 기록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천자의 동작은 좌사서(左史書)가, 발언은 우사서(右史書)가 기록했다."

황제의 말과 행동을 따로 구분해서 기록한 것이다. <기거주> 제도는 당나라 때 기틀이 잡혔다. 이후 송, 원, 명, 청 시기에는 기록자의 관직 명칭과 역할에는 변화가 있었지만 그 기본 정신은 바뀌지 않았다. 결국 황제의 삶은 평범할 수 없었고, 감시를 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조심하고 신중하게 행동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중국 황제들의 궁중 생활은 어떠했을까? 역대 황제들이 대동소이했다. 엄격하게 관리되고 '예제(禮制)'에 포위되어 있었다. 중국 청대에도 황제의 일상생활은 모두 엄격한 규정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 반드시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유가적 가치관에 맞추어 행동해야만 했다.

황제는 일상적인 생활과 정무를 보지만 때로는 특수하고 중요한 일도 처리해야만 했다. 황제는 궁중에서의 일상생활 외에도 즉위식, 출정식 등 중요한 정치 활동도 참석했다. 황제의 일상생활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나는 국가 정무와 관련된 일이고, 다른 하나는 황제의 일상생활로 의, 식, 주, 학습, 예불, 오락 등과 관련된 것이다.

청대의 황제는 부모에 대한 효를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 따라서 선대 황제가 붕어하면 남겨진 후비들은 직급이 달라진다. 황제의 할머니는 태황황후가 되고, 어머니는 황태후라 불렀다. 그들은 주로 자녕궁(慈寧宮)에 거주했다. 이에 비해 태비와 태빈 등은 수강궁(壽康宮)이나 수안궁(壽安宮)에 거주했다. 이 또한 예제였다. 황제는 매일 아침 일찍 태황태후나 황태후께 문안을 올려야만 한다. 이를 '청안(淸安)'이라 한다. 비록 황제의 신분이지만 부모에 대한 효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청대의 황제들은 강희제를 제외하고 모두 자금성 내 양심전(養心殿)에 거주했다. 황제는 매일 아침 '청안'을 하기 위해 자금성 내 길상문(吉祥門)을 나와서 두 명의 태감이 부축하는 가마를 타고 서이장가(西二長街)를 거쳐 계상문(啓祥門)을 통해 '청안'을 하러 갔다.

건륭제의 경우,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제위 기간인 61년을 능가할 수 없다고 스스로 재위 60년 만에 퇴위한 뒤 보좌를 아들 가경황제에게 넘기고 자신은 태상황이 되었는데, 이때는 가경황제의 '청안'이 더욱 복잡해지기도 했다.

황제들의 공(公)과 사(私)

청대의 황제는 반드시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한다. 아침 5시에 일어나야 했다. 황제는 기상하자마자 목욕을 한다. 그러면 태감들이 갈아입을 옷을 준비한다. 만주족인 청조의 경우, 황제도 유목 민족의 풍습을 습득해야만 했다. 따라서 황제는 아침마다 활시위를 당겨 몸을 단련했다. 말위에서 천하를 얻었던 만주족의 후예로서 조상들이 가졌던 근본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활을 당긴 후에 황제는 바로 서재로 가야했다. 먼저 어학공부를 한다. 몽고어, 만주어, 한문을 익힌다. 정복왕 조이기 때문에 배울 언어가 많았다. 이어서 아침 독서를 해야 한다. 황제들이 읽는 책은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실록>과 <성훈>이다. <성훈>과 <실록>을 읽는 이유는 조상들의 통치 의지를 정신적 무기로 삼기 위해서다. 황제가 아무리 정무에 바빠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청대 황제들은 특히 학문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황자가 되었을 때부터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 6세가 되었을 때부터 서재에 들어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황제가 성인이 되어 친정(親政)을 하면 학식이 풍부한 한림학사나 대학사들을 자신의 스승으로 모셨다. <사서오경>과 <사기>, <시부> 등을 읽었다. 평상시에도 황제들은 독서를 많이 했다. 황제의 전용 서재는 자금성 내에 화원유(和園囿) 등 별도로 10여 곳이나 있을 정도다.

▲ 책을 읽고 있는 옹정 황제의 초상. ⓒwikimedia.org

황제의 일상생활은 공(公)과 사(私)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개인 독서를 마치고 나면 7시 이전에 황제는 아침 조회를 거행하고 신하들을 접견한다. 그날그날 정무의 성격에 따라 아침 조회는 건청궁(乾淸宮)에서 거행되기도 하고 건청궁 서쪽에 위치한 황제의 개인 서재인 양심전에서 거행되기도 한다. 황제의 하루 생활 중 대부분의 시간은 국가 정무를 처리하는데 사용된다.

그렇다면 황제의 정무란 무엇인가? 전형적인 것으로 각 지역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자신이 관리하는 지역의 기후, 자연재해, 하천의 수리, 토지 개간, 양식의 수확 및 지방의 물가 등을 상소문의 형태로 보고한다. 황제는 이에 대해 결재를 한다. 그러한 업무 중 가장 중대한 것은 법률 안건이다. 황제는 문제가 있는 법률 안건에 대해 최종 판결을 한다. 또한 모든 문무 관리들의 임명, 전보, 강등의 인사 문제에 대해 결재를 한다. 그리고 특별히 진행되는 건설 공사들, 이를 테면 사묘, 제방 공사, 궁정 건설이나 대규모의 경축 행사 혹은 중요한 출판물에 대한 편찬 등에 대한 검열도 진행한다.

그 밖에도 황제는 다량의 정식 공문에 대해 결재를 해야만 한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정기적인 업무도 포함된다. 특히 옹정제 때 설치된 군사, 정무의 최고 기관인 군기처(軍機處)의 으뜸 벼슬인 군기대신(軍機大臣)이 황제에게 보고한 내용에 대한 의견을 회신해야한다. 만약 황제가 해당 업무에 동의를 하면 공식적인 상유조서(上諭詔書)를 하달하여 집행하도록 조치해야한다. 그러나 때로 대신들의 상소를 황제가 거부하면 대신이 다시 설명하는 기회를 갖는다.

만약 대규모 군사 행동이 발생하면 황제는 더욱 신중하게 근무를 해야 한다.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군기대신들과 함께 군사 전략을 수립하거나 군사 행동을 계획하고 치밀하게 발생 가능한 모든 다양한 문제들을 고려한다. 그리고 전쟁에 관한 상소문에 대한 평가를 진행한다. 상소문의 긴급한 정도에 따라 황제는 수시로 군기대신을 접견한다. 이럴 경우 황제의 일상적인 일정도 변경되기 일쑤이다.

점심때가 되면 당일의 가장 긴박한 업무는 대부분 처리가 완료된다. 그런 뒤 황제는 짬을 내어 신임 관리들을 접견하기도 한다. 이때 신임 관리들은 녹색패(綠色牌)를 준비한다. 이 녹색패에는 자신의 성명과 경력이 적혀있다. 이부(吏部)에서는 관리들에 대한 완벽한 인사 관련 자료를 준비한다. 그렇게 되면 황제가 관료를 접견할 때 효율을 높일 수 있다. 황제가 하루에 접견하는 관료는 대체로 50여 명 정도이다. 황제는 이러한 신임 관료들을 접견할 때 그들의 가정과 고향, 그리고 그 밖의 상황들도 질문을 한다. 아마도 이 시간이 신임 관료들에게는 가장 긴장되는 순간일 것이다.

황제는 신임 관료들에게 심각한 문제들을 질의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지방 관리의 문제점, 긴박한 경제 문제나 인생 철학 등도 질문하게 된다. 황제들은 신임 관료 접견이 끝나면 비준을 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황제는 관리들에 대한 신뢰감을 높일 수 있다. 또 황제와 신하와의 개인적 관계를 만들 수 있다. 이를 통해 황제는 신임 관료들의 능력 여부를 직접 확인하는 자리가 된다. 이러한 접견을 통해 향후 더욱 중요한 직책에 발탁하는 자료를 축적하게 된다. 당연히 황제가 보기에 책임감이 결여되고 봉사 정신이 부족한 관리들은 도태를 시키기도 한다.

접견이 완료되면 오후 2시까지 만선(晩膳)을 갖는다. 실제로는 점심 식사지만 저녁 식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청대의 황제들은 하루에 공식 식사를 두 번 했다. 어선이 끝나면 황제는 잠시 정무에서 벗어나 회화와 서예를 하는 시간을 갖는다. 때로는 시를 짓기도 하고 골동품을 감상하기도 한다. 특히 청대의 건륭제는 예술적 심미안이 뛰어난 황제였고 세계적으로 뛰어난 회화 골동품과 도자기의 소장가이기도 했다. 건륭제는 특히 이러한 골동품에 대한 감상의 시간을 즐긴 황제였다.

저녁이 되면 황제에게 있어 가장 즐거운 시간이 된다. 때로는 연극을 감상하고 불사를 올리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황제의 하루 생활이 마무리되고 다음 날의 황제 일정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긴급한 정무가 아니면 일반적으로 8시에서 9시 사이에 잠자리에 들었다. 이때 자금성 내의 황제의 거처에는 남자는 황제 한 명만 남는다. 태감들은 모두 건청문 밖으로 물러난다. 황제의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황제는 최고 권력의 상징이지만 고독한 존재였다. 예제의 번잡함에 적응해야 하고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등 막중한 책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한 인간으로서는 외롭고 힘든 삶이었다. 요즘 스타트업(start-up)으로 성공하여 엄청난 부를 거머쥔 젊은 기업가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수많은 자본과 사람을 거느리는 그들의 권력 또한 황제처럼 막강하다.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알리바바 그룹의 마윈(馬雲), 샤오미(小米)의 창업자 레이쥔(雷軍) 등이 있다. 과거 황제들의 삶을 돌이켜 보면, 천문학적 돈을 한 손에 쥐고 좌지우지한다고 그들의 삶을 무작정 부러워할 바는 아닌 듯하다. 그들은 평범한 삶의 행복을 기회 비용으로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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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희

건국대학교 국제학부에서 가르치며, 한중사회과학학회 회장과 KU 중국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대만 중국문화대에서 중국 근대 정치사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대 중국의 영웅들>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와 <중국 외교사> 시리즈 및 <대만 현대 정치사> 등 20여 권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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