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기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Charlemagne) 대제의 등장은 중세 유럽의 시작이라고 역사가들은 입을 모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뒤를 이어 유럽의 기초를 만든 샤를마뉴의 존재는 이슬람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서구 유럽과 중동의 오랜 문명사적 관계의 뿌리를 환기시키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 중세 역사의 권위자 앙리 피렌느(Henri Pirenne)는 그런 점에서 이슬람 문명이 없었다면 유럽문명은 가능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사실 샤를마뉴 대제는 이슬람 군대의 기병이 가진 대담한 이동 솜씨와 전투능력을 본보기로 중무장 기병을 육성하게 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유럽 전역을 석권하다시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슬람 문명은 단지 이러한 군사력으로만 형성되지는 않았습니다. 7세기 이후 이슬람권이 발전시켜 온 문명의 수준은 당시 유럽을 훨씬 압도했었습니다. 이라크의 바그다드에는 이슬람 경전은 물론이었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각종 서적들이 아랍어로 번역, 장서로 쌓여 있었고 건축과 미술은 거대하고 정교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이는 훗날,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슬람 문명에서 가장 주목할 만 했던 것은 이들이 기병을 앞세운 유목민족이라는 수준에 머문 것이 아니라, "책을 읽고 논하는 종족"이라는, 찬탄할 면모입니다. 이슬람의 지배자 칼리프들은 주요 도시에서 도서관 건설을 비롯해 각종 예술과 문학, 자연과학의 발달을 적극 지원한 것으로 역사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슬람 문명의 핵심에는 <지성>의 문제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900년 경의 이슬람 제국은 오늘날의 스페인인 이베리아로부터 북부 아프리카를 거쳐 중동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파키스탄을 포함한 인도의 국경지대와 중국 접경지역에 이르는 거대한 활동무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에 이슬람 문명의 소산인 알람브라 궁전이 있는 것과, 인도에 타지마할 궁전이 있는 것은 모두 이러한 까닭입니다.
8세기 경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자 지도자의 한 사람이던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가 샤를마뉴 대제와 외교관계를 맺고 문화적 교제를 이루기도 했다는 역사의 기록은 뒤떨어졌던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려던 샤를마뉴 대제의 열망을 반영해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로부터 1000년이 지나면서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은 역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문화의 힘에 바탕을 둔 역전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침략과 지배, 그리고 정복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슬람 문명은 모멸의 대상이 되었고, 그곳에 속하는 사람들과 자원은 끊임없이 유린되어 왔습니다.
미국과 영국에 의한 이라크 침략은 그 유린의 21세기 판입니다. 오랜 문명의 자궁에 대한 반문명적 공격입니다. 우리는 그만 여기에 가담하고 있는 나라의 하나가 되고 말았습니다. 파병 연장 동의안, 대통령과 상당히 가까운 것으로 주목받는 한 젊은 정치인은 이제 부끄러움 없이 떳떳하게 찬성표를 던지겠다고 했습니다.
과연 어떤 선택이 부끄러운 것인지, 그리고 어떤 결정이 떳떳한 것인지 역사는 이미 대답을 내놓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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