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에서 청년 수당·배당을 둘러싼 논란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보수 진영에서는 젊은층 표를 돈 주고 사겠다는 심보라고 비판합니다. 실제 그럴까요. 이들 제도가 청년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과연 실효성은 있는지 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 사회의 '산업화 세대'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사실상 우리 사회의 보수층입니다. 이들은 지금의 청년들을, 그리고 청년수당·배당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그리고 그들은 왜 그런 시각을 가지게 됐는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청년, 청년 배당을 말하다>
박영숙(가명·64) 씨는 경상북도 구미 인근 시골에서 태어났다. 벼농사를 짓는 집안이었다. 학창시절부터 집안일을 도와야만 했다. 학교 가기 전에는 늘 무, 시래기, 짚 등을 정리해서 소 여물을 먹였다. 학교를 다녀온 뒤에도 일은 끊이지 않았다. '소꼴베기'부터 콩 타작 등 일은 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에 다니는 박 씨가 마뜩잖았던 할아버지는 '여자가 무슨 학교냐'며 집안일이나 도우라고 했다. 학교를 더 다니고 싶었다. 평생을 농사일만 하다 죽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나섰다. 앞으로 박 씨가 살아갈 세상은 여성도 학교를 나와야 하는 시대가 될 거라고 설득했다. 아버지가 책임지겠다는데 할아버지가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어렵게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하지만 졸업 이후 취업은 쉽지 않았다. 시골 촌구석에서 일자리 찾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였다. 도시로 나가야 했다. 그나마도 변변찮은 일자리들이었다. 집안에서도 반대했다. 늘 일손이 모자란 농촌이다.
달리 답이 없었다. 결국, 집안 농사일을 하면서 20대를 보냈다. 농사가 지겨웠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모두가 그렇게 살던 시기였다. 굶지 않고 사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1960년대 후반의 일이다.
시부모, 시동생들까지 부양해야 했던 박 씨
스물 네살에 첫 맞선을 봤다. 서울에서 있는 건설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대학교를 나온 사람이었다. 성실해 보였다. 처자식은 굶겨 죽이지는 않겠다 싶었다. 아버지도 마음에 들어 했다. 대학을 나와서 대기업에 다닌다고 하자 흡족해했다. 두 번 더 본 뒤, 결혼을 결정했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결혼하는 줄 알았다.
신혼은 서울에서 시작했다. 부엌 딸린 단칸방이었다. 생활은 쉽지 않았다. 남편은 새벽에 나가서, 밤이 다 돼서야 들어왔다. 그렇게 한 달 일해 가져오는 돈은 10만 원 남짓. 현금이 귀했던 당시로는 나름 큰돈이었다. 하지만 이 돈으로는 박 씨가 사는 집 월세와 생활비, 그리고 시골 시부모 생활비를 충당하기도 빠듯했다.
남편은 장남이었다. 결혼하지 않은 동생들이 줄지어 있었다. 시부모와 시할아버지도 살아계셨다. 남편이, 아니 박 씨가 이들을 모두 부양해야 했다.
그 와중에 첫째를 임신했다. 막막했다. 산달을 며칠 앞두고는 고심 끝에 시골 친정집으로 향했다. 병원비도 걱정이고 일가친척 하나 없는 서울에서 혼자 아이를 낳자니 불안했다. 행여 내려가는 기차에서 아이를 낳을까 큰 바구니까지 준비했다.
그렇게 도착한 집. 아버지는 박 씨의 등을 아무 말 없이 두드려 주었다. 병원비부터 아기 배냇저고리까지 모두 아버지가 마련해줬다.
한국의 고속성장 시대를 살아온 박 씨
없는 살림에도 아이는 자꾸 생겼다. 둘째를 임신했다. 이대로는 힘들겠다 싶었다. 둘째를 임신할 즈음 중동에서 건설 붐이 일어났다. 1970년대 후반이다. 그곳에 가면 현재 받는 월급의 몇 배를 더 준다고 했다.
남편이 망설였다. 임신한 아내를 두고 몇 년이나 해외에 나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세 살 된 아이까지 있었다. 박 씨는 그런 남편 등을 떠밀었다. 중동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박 씨였다.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 당신은 중동 가서 돈이나 많이 벌어 오시라.'
남편은 사우디아라비아행을 결심했다. 1979년 3월 봄이다. 매달 그곳에서 번 돈을 고스란히 한국으로 부쳤다. 기숙사에서 먹고 자다 보니 돈 쓸 일이 없다고 했다. 매달 100만 원 가까이 되는 돈이 날라 왔다. 박 씨 역시 그 돈 중 일부를 시댁에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은행에 저금했다. 당시는 고금리 시대였다. 연 20%대 이자가 붙었다.
아이들과의 생활비는 박 씨가 집에서 하는 부업으로 충당했다. 인형에 눈을 붙이는 일을 했다.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아 지하 방 두 칸짜리 집을 샀다. 4년 만에 사우디에서 돌아온 남편은 '무슨 돈으로 집을 샀느냐'고 혀를 내둘렀다.
살면서 형편은 나아졌다. 모은 돈으로 지하방을 탈출했다. 집을 조금씩 넓혀갔다. 인근 시장을 돌면서 '일수 놀이'도 했다. 은행 금리보다 곱 갑절 이자를 받았다. 그래도 서로 박 씨에게 돈을 빌리려 아우성이었다. 현금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금융권에서 개인에게 쉽게 대출해주지 않던 시절이다. 대기업 다니는 남편 월급이 박 씨에게는 '화수분'이었다.
그 돈으로 시동생들 결혼도 시키고 시부모도 봉양했다.
"다들 배가 불러서 일을 안 한다"
셀 수 없이 이사했다. 조금이라도 가격 대비 좋은 집이 나오면 저축한 돈으로 이사했다. 돈의 가치는 떨어져도 집의 가치만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다. 박 씨에게 집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 일종의 불패신화였다.
그러다 우연히 자신이 살던 집이 재건축 지역으로 선정됐다. 꿈에도 그리던 아파트에서 살 수 있게 됐다. 부동산 경기가 좋을 때였다. 분담금이 부담스러웠으나 빚내서 아파트를 장만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산 아파트는 10년 만에야 오롯이 박 씨 소유가 됐다.
그 사이 남편은 부동산 중개사 자격증을 따서 조그마한 중개업을 하고 있다. 박 씨 자신도 건물 청소 일을 한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그다.
그렇게 살아온 박 씨 눈에는 요즘 젊은이들이 탐탁치 않다. 주변을 둘러보면 대학까지 나와서 아무 일 안 하고 있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박 씨 친구 자식 중에는 프랑스 파리로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여전히 집에서 놀고 있는 이도 있다. 그런 젊은이들이 영 못마땅하다. 요즘 시대에 조금만 눈을 낮추면 차고 넘치는 게 일자리라고 생각하는 박 씨다. 다들 배가 불러서 일을 안 한다고 생각한다.
박 씨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말한 것처럼 모든 일을 정부 탓, 남의 탓, 사회 탓으로만 돌리는 젊은이들이 못마땅하다. 자기는 평생을 누구 탓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단다. 하다못해 국내에서 돈 벌기 어려우면 중동 같은 곳에 가서 돈 벌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을 때는 속이 시원했단다.
물론, 지금 시대를 사는 청년들의 어려움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자기 자식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녹록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자식 둘 다 어렵게 취업해서 힘들게 일하지만 천정부지로 오르는 전셋값과 생활비를 감당하기 어려워한다. 살기 힘들다는 말을 입에 늘 붙이고 다닌다. 하지만 '배부른 투정'이라고 생각한다. 박 씨에게 인생이란 늘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지금 세상은 밥 굶고 사는 이는 없지 않은가.'
"돈 받는 재미로 앞으로 더욱 아무 일 안 하겠지"
그래서 서울시와 성남시가 진행 중인 청년수당과 청년배당이 불쾌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막무가내로 돈을 퍼주는 정책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세금이 일하려는 의지도 없는 젊은이들에게 간다고 생각하니 아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 돈까지 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돈 말고 다른 지원을 하면 모르겠다. 배를 곪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지금 세상이 우리 때처럼 일하고 싶어도 일을 못 하는 세상도 아니지 않나.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데 그러지 않는 이들에게 돈까지 준다. 결국, 이들은 그 돈 받는 재미로 앞으로 더욱 아무 일도 안 하지 않겠나."
박 씨가 그간 살아온 삶에 비춰보면 지금의 젊은이들, 그리고 청년수당·배당이라는 정책은 이해하기 어려운 '흐름'이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사회는 박 씨가 살아온 한국 사회와는 매우 다른 게 사실이다. 과거처럼 열심히만 일하면 일한 만큼 보상 받는 시대는 아니다.
그들의 공식을 지금의 청년들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 위험이 크면 보상도 크다는 뜻이다. 고성장 시대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1970~1980년대만 해도 힘든 일, 어려운 일을 하는 게 출세, 즉 돈 버는 지름길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독일 탄광으로, 간호사로 가는가 하면, 베트콩 잡는다고 전쟁터를 가기도 했다. 이뿐이랴. 오일 머니를 잡기 위해 불볕더위 모래밭에서 하루 12시간 넘게 일하기도 했다. 일하면 그만한 보상을 받았다. 한국의 산업화를 이뤄 낸 공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들에게 이 공식을 적용할 수 있을까.
지난 31일, 미국 언론 <워싱턴포스트>는 과거 부모세대가 누렸던 고성장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청년층에서 헬조선 현상이 공통으로 나타난다고 꼬집었다. 부모세대는 1960, 1970년대 놀라운 경제성장과 1980년대 민주화를 경험했으나 급격한 사회발전기 후에 태어난 이들은 이런 고성장의 부정적인 효과만 경험하고 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면서 <워싱턴포스트>는 '한국 청년들을 더 좌절시키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노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부모들'이라는 한 30대의 불만을 인용하며 기사를 마무리했다. 해외 언론도 알고 있는 사실을 정작 한국 기성세대는 잘 모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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