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국가 소송(ISD)'. 한때는 '괴담'이라고 불렸다. 수조 원대 돈을 요구하는 ISD가 진행되는 지금은, 그런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다. 이제는 '괴물'에 가깝다. 정부 정책에 실제로 영향을 끼친다. 결국 국민 부담이 된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 그래서 '괴물'이다.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지만, 우린 정체를 잘 모르니까.
진행 중인 ISD 사안은 모두 닮은 꼴이다. 정보 공개 요구가 나온다. 정부는 그걸 무시한다. 그래서 다수 국민은 결과에 따른 부담을 예측할 수 없다. 아울러 그 부담이 누구 책임인지조차 알기 힘들다. 분명한 건, ISD는 그 자체로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점이다. ISD를 건다는 건, 국제 중재에 회부한다는 뜻이다. '중재'는 그 성격상 한쪽이 완벽하게 이길 수 없다. 상대가 요구한 돈을 어느 정도는 물어주고 끝내는 게 보통이다.
ISD, 줄줄이 이어진다
이른바 '만수르 회사'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ISD를 예로 들어보자. 한국 정부 측 대리인은 법률사무소 김앤장이다. 한국 정부가 설령 '완승'을 거둔다고 해도, 천문학적인 변호사 비용은 남는다. 납세자 입장에선 속 타는 일이다.
이 같은 ISD가 줄줄이 이어질 전망이다. 예컨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 개입했던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ISD를 제기할 수 있다. 지난 14일, 국정감사에 출석한 홍완선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 본부장이 한 이야기다.
하지만 실제로 ISD가 제기돼도,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납세자가 알 수 있는 게 전무하다. ISD를 제기당한 한국 정부에게 과연 잘못이 있는지, 있다면 누구 책임인지, ISD를 제기한 측은 어떤 이유를 내걸었는지, 구체적으로 뭘 요구하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
국민은 아무런 정보 없이 정부를 믿어야 한다. 정부가 알아서 잘 대응하기만을 기대해야 한다. 결과가 나온 뒤에도, 그게 과연 최선인지, 더 나은 결과를 끌어낼 방법은 없었는지 등에 대해 따지기 어렵다.
"ISD 관련 비용, 결국 국민 부담인데…"
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 지난달 31일 '만수르 회사'가 한국을 상대로 낸 ISD 청구액 및 청구 원인, 계산 내역 등의 정보 공개를 요구한 건 그래서다. 민변 국제통상위원장인 송기호 변호사는 "국민의 알 권리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봤다. 공개를 요구한 정보가 기업 비밀, 혹은 정부 기밀에 해당한다고 보긴 어렵다. 정보 공개가 국제 중재 결과에 영향을 준다고 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법무부는 정보 공개를 거부했다.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제기한 ISD와 판박이다. 론스타는 한국 정부더러 5조 원을 물어내라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어떤 근거로 5조 원을 청구하는지 등 구체적 정보는 완전히 감춰져 있다. 관련 정보를 공개하라는 요구에 대해 한국 정부는 줄곧 거부 입장이었다. 천문학적인 소송 비용이 국민 호주머니에서 나간다. 그 비용이 왜, 누구 때문에 생겨났는지에 대해 국민이 알 권리는 계속 무시당할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지금 정부의 태도에 비춰보면, 그렇다.
법무부의 옹색한 답변 "만수르 ISD 관련 문서 접수한 적 없다"
이들 기업은 지난 5월 21일 한국 정부를 상대로 ISD를 제기했다. IPIC 회장은 아부다비 국왕의 둘째 아들 만수르 빈 자예드 알 나얀인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시티 구단주로 널리 알려졌다. 만수르 회장은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부총리도 겸한다.
15일 민변에 따르면, 법무부는 "국제석유투자공사(IPIC)나 자회사인 하노칼로부터 중재의향서 및 중재신청서를 접수받은 사실이 없어 정보공개 청구에 따를 수 없다"는 통지서를 보냈다. 내용은 이게 전부다. 법무부가 '만수르 회사'로부터 ISD 관련 문서를 받은 적이 없다는 뜻.
하지만 '만수르 회사'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ISD를 제기했다는 점 자체는 명백한 사실이다. 정부 역시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법무부의 통지문은 무슨 뜻일까.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우선, 법무부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론 관련 문서를 접수했는데, 아니라고 한 경우다.
"ISD 주무 부처, 무책임하다"
또 '만수르 회사'가 보낸 문서를 다른 정부 기관이 접수했을 가능성도 있다. 예컨대 '론스타'는 "대한민국을 국제 중재에 회부하겠다(ISD를 제기하겠다)"라는 문서를 지난 2012년 5월 21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 앞으로 보냈다. '만수르 회사' 역시 박근혜 대통령 또는 청와대, 금융위원회 등을 수신인으로 표기해서 문서를 보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관련 서류를 접수받은 적 없다는 법무부의 통지문은 적어도 거짓은 아닌 셈이 된다. 하지만 무책임하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다.
송기호 변호사는 "ISD 관련 주무 부처인 법무부가 (관련 문서에 대해) 비공개 처분을 한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설령 문서 수신인이 다른 부처라고 해도, 법무부가 문서 내용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는 것. 단지 접수처가 다르다는 이유로 비공개 통보를 했다면, 무책임하다는 지적이다.
'만수르 회사',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남은 건 ISD뿐
만수르 회장이 이끄는 IPIC의 네덜란드 법인인 하노칼은 지난 1999년과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현대오일뱅크의 주식을 취득한 뒤 2010년 8월 보유주식 전량을 현대중공업에 매각했다. 당시 매각 금액는 약 1조8381억 원으로 양도차액은 1조2000억 원에 달했다.
현대중공업은 주식 양도대금을 하노칼에 지급할 때 당시 법인세법에 따라 양도가액의 10% 상당액(1838억 원)과 양도차익의 20%상당액(2481억 원) 중 적은 금액인 1838억 원을 세금으로 납부(원천징수)했다. 아울러 한국 세무당국은 IPIC에도 법인세와 증권거래세를 부과했다.
이에 하노칼은 "조세 이중과세 회피와 탈세 방지를 위한, 한국과 네덜란드 정부 사이의 협약에 따라 과세가 면제돼야 한다"며 소송을 냈고, ISD도 제기했다. 하지만 하노칼은 지난달 6일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했다. 한국 조세당국이 부과한 세금이 정당하다는 게다. 남은 건 ISD인데, 한국 정부가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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