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혼자 이 크레인(TTC-06호) 위에 올라 있나. 집에서 혼자 밥을 끓여먹고 학교를 가고, 다시 돌아와 혼자 잠을 청할 고3 딸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겁다. 2011년에 이어 두 번째 고공농성. 2011년 88일과 오늘로 144일째인 두 번째 고공농성일을 합치면 딸과 떨어져 하늘에서 생활한 것만 230여일 된다. 당장이라도 한달음에 달려 내려가 딸을 껴안아주고 싶다.
2011년 88일간의 고공농성 끝에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로 다시 복직이지만 2012년 말까지 복직하기로 합의도 했었다. 대한민국 조선업계 매출 1위 기업. 아니 올해 현재 전 세계 조선산업 내 수주잔량 세계 1위의 대기업인 대우조선해양에 나 같은 사내하청 노동자 한 명 채용은 아무런 일도 아닐 테지만, 그들은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정말 오르고 싶어서 오른 하늘이 아니었다.
아침 출근 시간 70m 높이의 크레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장관이다. 거대한 대열의 노동자들이 대우조선으로 출근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으로 출근하는 전체 노동자는 약 5만 5000명. 그중 사무직 포함 직접고용 정규직노동자들은 1만여 명이 채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모두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직접 생산을 담당하는 하청노동자의 비중은 이미 70% 이상을 넘어섰다. 과거엔 모두 정규직으로 했던 일들이다. 위에서 보면 누군 정규직이고 누군 비정규직인지 전혀 분간이 안 되지만, 현장에서 차별은 너무도 뚜렷하다. 산재사고로 죽어가는 이들도 모두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우리의 처지는 언제쯤이나 바뀔까
현대판 노예. 비정규직. 우리들의 처지는 언제쯤이나 바뀔까. 안타까운 마음에 출퇴근 시간마다 크레인 아래로 지나가는 수많은 동료 노동자들을 향해 조그만 핸드 마이크로 목청이 터져라 호소를 한다. 나의 목소리가 가늘게나마 그들의 억눌린 마음에 한가닥 희망의 소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비정규하청노동자 여러분!
오늘로써 고공농성 142일차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비정규하청노동자가 대우조선해양 생산의 중심입니다. 우리들은 더 많이 노동하고 더 많이 다치고 더 많이 죽어나갑니다.
그런데 임금과 복지는 정규직에 비해 딱 절반입니다.
비합리적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 이 간접고용 비정규직 제도로 인해 우리들은 눈에 뚜렷이 보이는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노동의 능력은 대동소이합니다. 우리가 뭐가 부족합니까?
그리고 도대체 대우조선으로 출근해서, 대우조선의 생산시설에서, 대우조선의 공정에 따른 생산계획과 지시에 따라 노동하는 우리가 왜 간접고용 비정규하청노동자여야만 합니까?
현대기아차 등 수많은 사업장에서 이미 불법파견으로 판정이 나서 모두 정규직화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도 나와 있습니다.
대우조선 배를 우리 하청노동자가 거의 다 만듭니다. 우리가 생산의 중심입니다.
자본가들의 더 많은 이윤을 보장해 주기 위해 우리나라 정부가 이러한 비정규직 제도의 노동자 차별정책을 확대해왔고 이제는 대한민국 전체 노동자 절반 이상이 이러한 이등 국민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분노할 줄 모른다면,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차별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가 노예임을 인정하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과 감정과 부당한 사회현실에 분노할 줄도 모르는, 주면 주는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만 하는 기계입니까?
우리는 차별과 굴종의 비정규하청노예입니까?
분노합시다! 저항합시다! 하청노동자의 힘을 모읍시다!
얼마 전에는 하청노동자가 어처구니없는 화재로 불에 타죽었습니다.
대우조선 자본이 비용을 들여 필요한 사전 조치만 했더라면 죽지 앓아도 될 기업 살인을 당했습니다. 맨날 천날 우리만 죽고 우리만 절망의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여러분!
우리는 돈만 차별받는 것이 아닙니다. 삶, 노동, 죽음 그리고 모든 것에서 차별받는 이등 국민입니다.
우리 대에서 비정규하청노동자의 차별과 굴종의 사슬을 끊어야 합니다. 우리 자식들에게 나와 똑같은 절망의 삶을 물려줄 순 없지 않습니까? 힘을 모읍시다.
대우조선비정규하청노동조합 건설합시다.
우리는 대우조선해양 생산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대한민국 사회발전의 중심입니다. 단결. 투쟁합시다!
그들은 아마도 이런 나의 굴하지 않는 목소리와 정신이 싫을 것이다. 해고(계약해지) 사유 역시 사내하청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였다. 지금도 나와 함께 하는 대우조선 하노위(하청노동자조직위원회) 회원들은 드러내놓고 활동을 하지 못한다. 두려워서가 아니다. 이름이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회원들이 속한 사내하청업체 전체가 계약 해지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당연한 요구가 이곳에서는 목줄을 내걸어야 하는 일이 되고 만다.
이런데도 더 쉬운 해고와 더 많은 비정규직을 위한 노동시장 구조개악을 하반기 국정과제로 밀어붙이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은 분명 딴나라 대통령이거나 1% 자본가들만의 대통령일 뿐이다. 좋은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대우조선해양은 산업은행이 관리하는 공기업으로 정부가 주요한 운영 주체이다. 3만5000명에 이르는 간접고용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불법으로 사용하며 수많은 이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인권을 탄압하는 책임 역시 이 정부와 대통령에게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고마워요. 9.12 거제행 희망버스
결사적인 마음으로 올라와 있지만 사실 많이 지치기도 하고, 외롭기도 했는데 이 먼 거제까지 9월 12일 희망버스가 달려온다고 한다. 와서 3만5000명의 우리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만나겠다고 한다. 퇴근 시간에 맞춰 모든 대우조선 출입문을 찾아 3만5000명의 비정규노동자들이 정규직노동자들과 더불어 진정한 대우조선해양의 주인이며, 헌법에 보장된 노동의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함께 확인하겠다고 한다. 70%가 넘는 인원을 비정규직으로 채우고, 우리의 피와 땀을 불법으로 착취하는 대우조선해양의 불의를 전체 한국사회에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항의하겠다고 한다. 그런 마음을 담은 예쁜 희망의 배도 만들어 오시겠다고 한다. 함께 하는 시민사회 단체들에서는 50여 개의 플랜카드를 보내, 거제 시민들에게 희망버스의 방문을 알리고, 거제 시민들이 이 투쟁과 연대의 물결에 함께 해줄 것을 호소하겠다고 한다.
그날만큼은 딸에게 조금은 덜 미안해도 될까. 아빠의 투쟁을 응원해주는 이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아빠가 꿈꾸는 세상이 이렇게 많은 이들이 함께 꾸는 세상이라는 것을 보게 되면 딸도 아빠를 조금은 용서해주지 않을까.
사실 너무 먼 길이라 많은 분이 못 오실 수도 있다. 하지만 수에 연연하지 않는다. 10명이 와도 20명이 와도 내겐, 우리에겐 무슨 동방박사들처럼 고맙고 기적 같은 분들이다. 그 힘으로 어떻게 이 거대한 대우조선해양을 이기겠냐고? 이길 수 있다고 난 믿는다.
2011년 6월 11일, 부산 한진중공업 1차 희망버스 당시 나도 85호 크레인 아래에서 꼬박 밤을 새웠다. 그해 6월 2일 나 역시 고공철탑에서 내려온 지 며칠 안 됐지만 꼭 가봐야 하는 자리였다. 검찰 조서에 의하면, 당시 '희망버스 기획단'은 '파견미술팀'과 함께 4월에 사전답사와 계획 모의차 내가 고공농성 중인 거제 철탑과 김진숙 동지가 고공농성 중이던 85호 크레인을 연이어 방문했다고 한다. 웃기는 얘기지만 그들이 내게 와서 했던 일은 주변에 떨어진 동백꽃잎으로 철탑 아래에 예쁜 하트를 만들어 주고 간 일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나는 보았었다.
생각해보면 그 후 나 역시 쌍용자동차로, 밀양으로, 유성으로, 울산현대차로 향하는 모든 희망버스의 단골 승객이기도 했다. 멋쩍지만 그런 승객의 한 사람이라는 마음으로 9월 12일을 기다려본다. 이 버스는 나나, 우리 대우조선해양의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을 위한 버스가 아님을 생각해본다. 이 버스는 대한민국 비정규직 천만 노동자들의 가슴을 향한 버스다. 모든 이들의 인권을 바로세우는 버스다. 서울에서 거제로 밀양으로 울산으로 부산으로 동해로 아산으로 구미로 쉬지 않고 대한민국의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달리는 연대의 버스다.
더더욱 이번 버스는 노동시장 구조개악을 연말까지 밀어붙이겠다는 박근혜 정부와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아래로부터의 결의의 버스다. 마지막 결의 시간엔 10월 말께 전국비정규노동자의 날을 대한민국 '모든 비정규 노동자들의 연대와 항전의 날'로 선포하고 모이자는 집단적 결의를 모으겠다고도 한다. 그날엔 나도 다시 거제에서 출발하는 희망버스 승객의 한 사람으로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가서 여러분들의 연대에 힘입어 대우조선해양을 굴복시키고 끝내 현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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