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열린 삼성물산 주주총회 안건은 세 가지였다. 모두 삼성 측 뜻대로 관철됐다. 이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앞길은 탄탄대로인 걸까. 다들 그렇게 본다. 과연 그럴까. 차근차근 따져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주주자본주의', 한국 재벌에겐 여전히 낯선 경영 환경
이번 주주총회 결과는, 한국 재벌이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경영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신호였다. '주주자본주의와 총수 카리스마의 양립'이라는 숙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껏 통했던 '황제경영'은 주주자본주의가 미성숙했기에 가능했다. 이젠 환경이 변했다. 조금 딱딱하지만, 숫자를 들여다보자.
안건 가운데 첫 번째, 즉 1호 안건은 제일모직과의 합병이다. 2호 안건은 주식 현물배당 안이다.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지분 4.1%, 제일기획 지분 12.6% 등을 갖고 있다. 이걸 주주들에게 나눠주라는 내용이다. 3호 안건은 회사 정관 개정이다. 이사회가 아닌 주주총회 결의로도 중간배당이 가능하도록 할 것, 중간배당은 현물로도 가능할 것 등의 내용이다. 배당은 이익 결산이 끝난 뒤에 하는 게 보통이다. 중간배당이란 말 그대로 영업 연도 중간에, 즉 이익이 얼마나 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배당을 한다는 것이다.
언론의 관심은 1호 안건에 쏠렸다. 69.53% 찬성으로 승인됐다. 참석률 대비 3분의 2라는 문턱을 아슬아슬하게 넘긴 셈. 하지만 2호와 3호 안건에 대한 찬성 비율도 곱씹어 볼 만하다. 2호 안건 찬성률은 45.93%였다. 3호 안건 찬성률은 45.82%였다.
모호한 미래와 구체적 현재, 주주들의 선택은?
1호 안건에 대한 지지와 2, 3호 안건에 대한 지지는 성격이 다르다. 이번 합병이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프로그램의 일환이라는 걸, 다들 안다. 따라서 1호 안건에 대한 찬성은 '이재용 체제'에 대한 신임과 맞물려 있다. 적어도 국내 투자자들은 대체로 신임 표시를 한 셈이다. 주주 입장에서 당장의 이익과는 큰 관계가 없다. 실제로 1호 안건이 승인됐다는 보도가 나오자, 삼성물산 주가는 급락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주식을 팔았기 때문인데, 국내 투자자들의 신임 표시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신호다.
2, 3호 안건은 보다 직접적인 이익에 관한 내용이다. 이들 안건이 통과되면, 주주는 당장 이익을 얻는다. 요컨대 1호 안건이 모호한 미래에 관한 것이라면, 2, 3호 안건은 구체적 현재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2, 3호 안건에 대한 찬성률이 46%에 육박했다.
'주주친화경영' 요구, 선명해졌다
삼성물산 지분 가운데 '고정표'라고 할 수 있는 비율은 42.04%다. 삼성 계열사, 이건희 회장, 국민연금, 삼성물산 자사주를 매입하며 '백기사'로 나선 KCC, 국내 기관투자자 등의 지분을 합친 숫자다. 이들은 삼성 총수 일가와 이해관계가 겹친다. 눈앞의 이익보다 지속적인 관계가 우선이다.
따라서 이들은 2, 3호 안건에는 관심이 없다. 삼성물산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이재용 부회장이 장악하기 위한 합병이라는 걸 뻔히 아는데, 삼성전자 주식을 현물 배당하자는 주장에 동의할 까닭이 없다.
나머지 57.96%는 엘리엇, 다른 외국인 기관투자자, 국내 소액 주주 등이다. 이 가운데 엘리엇이 아닌 외국인 기관투자자는 다시 성격을 구분해야 한다. 아시아 지역에 거점을 둔 기관투자자는 현재의 삼성 경영진을 지지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 따라서 이들 역시 2, 3호 안건은 관심 밖이다. 그렇다면, 2, 3호 안건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주주 비율은 57.96%보다 낮다. 이날 주주총회에서 의결권 있는 주식의 참석률은 83.57%였다. 이 두 수치를 곱하면, 약 48.44%가 된다. 그리고 2, 3호 안건에 대한 찬성률은 각각 45.93%, 45.82%였다.
이게 무슨 뜻인가. 삼성 총수 일가와의 관계를 고려할 필요가 없는 집단은, 매우 높은 비율로 2, 3호 안건에 찬성했다는 뜻이다.
이번 주주총회에서 드러난 소액 주주들의 메시지가 분명해졌다. '이재용 체제'는 인정한다. 그러나 주주가 누릴 수 있는 이익은 최대한 확보하겠다. 이 두 가지다. 이른바 '주주친화경영'에 대한 선명한 요구다. 주주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렸다는 뜻도 된다.
'이재용 체제'와 '이건희 체제'의 차이
'이재용 체제'의 난점이 여기에 있다. 이건희 삼성 회장 시대는 달랐다. 회사의 이익을 주주에게 배당해야 한다는 생각은 뒷전이었다. 주주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그래서 경영이 불투명했다. 대신, 총수의 재량 폭이 넓었다. '이건희 체제'의 성공은, 주주의 희생에도 빚진 면이 있었다.
'이재용 체제'에선 그게 안 통한다. 주주의 몫을 최대한 떼어주고, 남은 이익으로 회사를 키워가야 한다. 이날 주주총회에서 확인된 메시지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능력에 대한 신임이 확고하다면, 별 문제 없다. 주주자본주의가 정착한 나라의 기업이 대개 이런 식으로 운영된다. 숫자에 강한 이들 나라에서 '최고경영자의 카리스마'라는 무형 자산을 높게 쳐주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재용, 적어도 5년의 과도기 거쳐야"
이 부회장은 이 같은 무형 자산을 갖고 있나. 그렇지 않아 보이니까 문제다. 이 부회장의 나이는 올해 48세. 그동안 대중에게 내놓을 만한 성공 사례를 만들지 못했다. 회장이 된다고 해서 바로 '카리스마'가 생기는 건 아니다. 이건희 회장도 1987년 취임부터 1993년 신경영 선언까지 긴 과도기를 거쳤다. 물밑에서 조직을 장악하고, 구성원의 신뢰를 얻는 기간이다.
김상조 한성대학교 교수는 "이재용 부회장 역시 최소 5년의 과도기는 거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함께 삼성을 이끌어 갈 참모들과의 팀워크 체제를 만들고, 회사 안팎의 신뢰를 얻기 위한 최소 기간이다. 그러고 나면, 이 부회장의 나이는 50대 초중반. 성미 급한 주주들이 그때까지 기다려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때가 되면 이 부회장 역시 후계 구도를 준비하게 된다. 오로지 회사를 키우는 일에만 전력투구하기 어려워진다는 뜻.
'주주자본주의와 총수 카리스마의 양립' 가능할까?
대다수 언론은 17일 주주총회에 대해 '엘리엇에 대한 삼성의 승리' '이재용 체제 확정' 등의 프레임으로 보도한다. 틀린 건 아니다. 그러나 피상적이다.
이번 주주총회는 한국도 본격적인 '주주자본주의'에 들어섰음을 보여줬다. 이제까지 한국 재벌이 제대로 학습하지 못했던 경영 환경이다. 총수의 카리스마는 주주의 요구를 묵살한 바탕 위에서만 작동했다. '주주자본주의와 총수 카리스마의 양립'이라는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재벌 기업은 아직 없다.
김상조 교수는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는 이제 시작"이라고 말했다. "대신 책임져줄 사람이 없는, 본격적인 시험대에 이 부회장이 올라섰다"라는 말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