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의 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 방침 때문에 40년 만에 다시 글자 논쟁이 날카로워졌다. 우리 사회에서 글자 논쟁이 격렬했던 때는 1970년대다. 박정희 정부가 산업화를 위해 한글 전용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이 정책을 편 것이 발단이었다.
이 논쟁은 약 30년간 진행되었는데,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논리가 아니라 사회적 수요였다. 한글 수요가 한자 수요를 압도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한글 전용이 전산화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간파한 신문이 모두 한글 전용을 따랐고, 급기야 한글 세대가 우리나라의 정보 산업을 세계 일류로 일구어 놓음으로써 한자는 서양의 라틴어처럼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야 할 처지가 되었다.
오랜 논쟁과 사회적 수요에 따라 글자 논쟁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한글 전용 정책의 미비점을 개선하는 데 전념해야 할 교육부가 흐름을 뒤집고 갑자기 40년 전의 한자 사용 정책을 추진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한자를 몰라서 국민의 지적 수준이 낮아졌다거나 한자가 동양 삼국의 공통 문자라는 주장은 한 나라의 어문 정책을 바꿀 만한 타당한 이유로는 너무 초라하다. 그렇다면 정부가 별로 타당하지 않은 이유를 내세워 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라는 무리수를 두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 그 이유가 친일파가 사회 주도권을 잡은 현 시점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명박 정부 이후 정치적으로 보수화하는 상황 속에서 친일파들은 산업화 이후 처음으로 사회적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친일파들은 이 주도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두 가지 정책을 추진하였다. 하나는 우리 역사를 친일 사관으로 바꾸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한자를 일본 수준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역사 교과서 친일화 시도는 지난해까지 사회적 반대에 부딪혀 크게 진척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고 만만한 초등 교과서 한자 사용 문제는 자신 있게 추진하고 있다. 이 정책은 '아이들에게 한자 가르치자는 것이 왜 문제인가'라는 단순한 질문으로 반대파를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초등 교과서에 한자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친일파의 본질적인 목표를 우회하는 전술일 뿐이다. 그들의 본질적인 목표는 우리 사회의 친일화 내지 일본 예속화이다. 친일로 가문을 일으키고 사회적 명성을 쌓은 그들이 이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를 지키는 길은 우리 사회의 친일화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한자 논쟁이 단순한 글자 논쟁을 벗어나 정치적이 되었다고 본다. 한 국어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한글은 우리 사회의 근대화와 자주적인 민족 국가 형성이라는 역사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반대로 말하면 한자는 우리 사회의 보수화와 예속적인 사회 형성이라는 역사적 함의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정부와 국민이 한자 논쟁에 숨은 친일파의 논리를 걷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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