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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원 레시피조차 따라하기 힘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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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원 레시피조차 따라하기 힘든 이유

[기자의 눈] TV는 독신 가구를 보여주지 않는다

얼마 전, 지인 A의 집에 들를 일이 있었다. 독신 생활자였던 A는, 깜짝 놀랄만한 저녁 만찬을 선보였다. 능숙한 솜씨로 직접 만든 미트볼과 덮밥, 깔끔한 국을 내 왔다. "요리하는 재미"를 내게도 권유하며.

A가 TV 예능 프로그램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확실히 영향을 받았다. 요 몇 개월간, 집에서 본 TV 프로그램 중 기억에 남는 건 <집밥 백선생>과 <한식대첩>, <신동엽, 성시경은 오늘 뭐 먹지?> 정도다. 다른 일로 들른 마트에서 굴 소스를 사고, 갖가지 채소를 장바구니에 담고, 집에 없던 설탕과 고추장까지 골랐다. 나도 어느새 요리 프로그램 열풍에 빠져 있었나 보다.

딱 거기까지였다. 혼자 사는 직장인에게 제대로 된 요리란, 생각 이상으로 과소비다. 백종원의 비법을 따라 카레를 한 번 끓이니, 남아도는 감자와 당근을 처리할 방법이 난망했다. 급하게 비엔나소시지를 사와 채소볶음을 했다. 산더미같이 많은 채소볶음이 만들어졌다. 남은 감자를 라면에 넣고, 쪄 먹었다. 그래도 남아돌았다. 더 다양한 요리를 하자니 아예 조리 도구까지 추가로 장만해야 할 판이었다. 먹지 못하게 된 채소 더미를 음식쓰레기 봉투에 눌러 담는 안타까운 사연으로 무모한 도전은 끝났다(A가 뒤처리를 어찌했는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그는 집에 불러들일 사람이 나보단 많을 테니 그나마 수월했으리라 짐작할 뿐).

▲TV 음식 예능 프로그램에는 혼자 밥 먹는 이가 없다. ⓒtvN 제공

음식이라면 모르는 게 없을 것 같은 백종원이 털털한 말투로 '당신도 할 수 있다', '실수해도 괜찮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어설픈 실력으로 만든 음식을 나눠 먹는 <삼시세끼>의 연예인들을 보며, 식당 밥과 인스턴트 음식에 길든 스스로가 어쩐지 부끄럽다고 느낀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래, 나도 해 보자'는 결심을 실천에 옮긴 이도 적잖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현실로 소비하는 순간, 환상은 깨졌다. 단출한 일인 가구를 꾸려가는 한국 직장인의 '직접 만드는 집밥' 실현 꿈은 현실로 소환하기에 무리가 따랐다. 음식 예능 프로그램의 따뜻한 식사 모습은 교과서에서나 확인 가능하다. TV에는 혼자 밥 먹는 이가 나오지 않는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음식을 두고 얘기를 나누며 식사를 즐긴다. 어머니는 집 안에만 있고, 반드시 아침 식사는 네 식구가 함께하던 과거에나 존재하던 유물이다. 도시 생활에 지친 독신가구주들에게는 닿을 수 없는 환상이다. 함께 밥을 나눠 먹을 이는 이웃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맞벌이가 일상화되고 아이는 학원을 돌다 새벽에야 들어오는 4인 가구의 현실과도 다르다. <심야식당>이 독신 사회가 꿈꾸는 지척의 환상을 소환했다면, 요리 예능 프로그램은 더 먼 과거를 환상하고 있다.

현실은 비루하고, 보다 서글프다. 일에 지쳐 퇴근한 사람들에게 만만한 찬 거리는 편의점에서 파는 즉석 도시락이요, 식당 밥이다. 노인 독신자들을 위해 여전히 1000원대의 식당이 서울 시내 곳곳에 있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혼자 밥 먹기 단계' 따위의 글들이 자조 섞인 웃음을 먹고 돈다. 밥을 함께 먹을 이는 모니터 너머의 그 혹은 그녀뿐이다. 한국보다 일인 가구화가 더 빨리 진행된 일본의 최신 히트상품이 '밥 먹을 때 말 걸어주는 사람 DVD 프로그램'이라는 게 뭘 말하겠는가. 백종원이 가르쳐 준 방식을 따라한 된장찌개를 만들어 놓아도, 백종원과 제자 넷이 함께 먹는 밥상 풍경은 따라 할 수 없다.

아무리 채워도 부족한 온기에 배고픈 이들에게는 환상이 아닌 현실이 필요하다. 당장은 일주일에 집에서 밥을 먹을 시간이 기껏해야 절반도 되지 않을 이들을 위한 맞춤 조리 재료가 판매되어야 할 터이다. 근본적으로는, 혼자 사는 이들 간의 네트워크가 잘 작동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가족을 꾸리는 데 용기가 아닌, 순수한 애정이 작동하는 사회가 정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게 마을 살리기이든, 자식을 낳기 좋은 사회가 되든 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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