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동지상고와 고려대를 졸업한 후 1965년 현대건설 공채 입사한 지 12년 만에 사장 자리에 오른 이 당선자는 1992년 14대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지 15년 만에 대통령에 당선, '초고속 출세'의 기록을 이어갔다.
재계에서건 정계에서건 고속도로만 달려온 이 당선자지만 걸림돌도 적지 않았다. 1990년대 초 현대 그룹의 2세 경영 승계 과정,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의 '국민당 창당' 과정의 갈등이 첫번 째 암초였다.
고 정주영 회장의 국민당 동행 권유를 뿌리치고 YS의 민자당 공천으로 전국구 의원에 당선되면서 이 당선자와 현대의 갈등은 극대화됐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서먹한 관계였지만 정몽준 의원의 합류로 인해 이 갈등은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지난 2002년 서울시장 당선 직후까지도 '정치인 이명박'의 행보가 매끄럽진 않았다. 김유찬 씨의 폭로로 잘 알려진 선거법 위반 사건, 서울시장 취임 이후에도 '샌들 신은 아들과 히딩크의 기념촬영'사건 등 갖가지 구설에 올랐다.
청계천 복구공사 이후 부터는 BBK에 대한 집중적 의혹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경선, 대선을 거침없이 돌파해왔지만 특검 통과로 인해 이는 여전한 '혹'이다.
한편 최종학력은 고려대학교 졸업이지만 포항에 있는 동지상고(현 동지고)를 졸업한 그는 목포상고 출신인 김대중 전 대통령, 부산상고 출신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상고 신화를 잇게 됐다.
이번 대선에서도 전주고 출신인 정동영 후보, 경기고 출신인 이회창 후보, 경남고 출신인 권영길 후보, 경복고 출신인 이인제 후보 등 전통적 명문고 출신이 맥없이 무너진 것.
'성공 신화'의 허상이 깨지면…
이명박 당선자의 개인사는 이처럼 정치권 입문 전과 후로 대분된다. '경제인 이명박'이 성공에 대한 신화로 어필했다면, 도덕적 결함이 두드러진 '정치인 이명박'은 마이너스 요인이었던 셈이다.
대통령에 당선이 됐으니 결과적으로는 '성공한 CEO 이명박'에 대한 신화가 유권자들에게 먹혔다고 볼 만하다. 그러나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된 이 당선자에게 CEO식 리더십이 궁극적으로 성공한 정부로 가는 보증수표가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도 이를 모르지 않는 것 같다. 한 때 이 당선자는 'CEO출신 대통령'론을 설파했었다. 하지만 이 논리는 곧바로 벽에 부딪혔다. 기업가 출신의 국가원수인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와 태국의 탁신 전 총리의 말로가 안 좋았기 때문이다.
'성공 신드롬'에 감각적으로 호소한 선거 캠페인도 두고두고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부자되세요"라는 신용카드 광고가 빅히트를 쳐 카드 회사 매출은 늘고 광고모델은 부자가 됐지만, 광고 보고 카드 긁은 이들은 빚만 늘어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인지 지난 16일 마지막 TV토론에서도 이 당선자는 "CEO의 마인드를 갖춘 대통령이 중요하다"면서 사업과는 별 관련도 없는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꼽기도 했다.
어쨌든 사상 초유의 기업가 출신의 '부자 대통령'이 5년 간 국가를 어떻게 운영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이명박 비판자들은 "자기가 회장 자리 앉았을 때 현대건설 덩치는 커졌겠지만 빠져 나간 다음에 부실이 드러나서 결국 회사는 망하고 말았다"고 비판하곤 한다.
"이명박 현대건설이 실패했다"고 단언하긴 힘들지만 하여튼 회사는 이후 망했고, "(주)다스와 BBK는 내 것이 아니다"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도 자신의 사업체 LK-e뱅크도 망했다. '경제인 이명박'에게도 엄연한 실패기가 존재했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국민 성공시대''를 약속해 청와대에 입성한 이 당선자의 '정서적 통치기반'을 불안하게 보는 시각도 많다. 성공시대의 허상이 깨지는 건 순식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장과 친기업 일변도의 경제정책이 구사될 경우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지지층은 급속하게 붕괴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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