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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것들을 다 부숴버리고 다시 시작해?"

<증언> 장지량 장군 회고록, 1·21사태에서 실미도까지

최근 실미도 사건 관련자들의 유골 발굴작업이 시작되면서 이 사건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과연 1971년 벌어진 실미도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공군 참모총장을 지낸 장지량 장군이 실미도 사건 전후의 국내외 상황을 정리해 국방일보에 연재하고 있어 이 사건 이해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회고록은 특히 1968년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피랍이 한국과 미국에 어떤 파장을 미쳤으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목을 따겠다는 북한 측의 동향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그리고 이런 정황 속에서 당시 중앙정보부는 어떻게 처신했는지 등의 '내면 풍경'을 들여다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자료로 꼽힌다.

장 장군이 연재 중인 회고록 '그 때 그 이야기 : 빨간 마후라, 하늘에 등불을 켜고' 가운데 실미도 사건 전후의 상황을 보여주는 대목만을 구술정리자인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의 양해를 얻어 소개한다. 이 회고록은 아직 완료되지 않은 것으로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편집자>

***북한 전함을 부술 것인가**

생포한 김신조의 진술에서도 그대로 이 문제가 드러났다. 적들은 우리 군의 비상경계망을 언제나 한발 앞서 뚫고 나갔고 세검정에 이르러서도 검문을 받았지만 특수부대원(방첩대)들이 훈련을 마치고 귀대중이라고 속이며 무사통과했다. 거의 2개 소대병력의 침투인데도 군경은 서로 자기 관할구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조체제에 미온적이었다. 합참이나 육군이 아니라 작전의 전문성이 떨어진 중앙정보부가 관할하니 통합 작전계획과 세부적인 작전수행의 프로세스가 작동하지 못했다. 이런 갈팡질팡이 초동진압을 어렵게 했다.

약 1주일간의 작전 끝에 이들을 일망타진했지만 아군의 손실도 컸다. 31명을 잡기 위해 수만 명의 병력이 투입됐으나 군과 경찰 및 민간인 34명이 희생됐으며 수십 명이 부상했다.

사살된 적의 시신에서 특이한 점이 나왔다. 한 공비가 휴대한 군사지도에는 청와대까지 이어진 산을 타고 남북으로 길게 침투로가 나타나있는데 도피로는 아예 생략된 지도였다. 말하자면 청와대를 습격한 뒤 되돌아가는 길은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노고산에서 붙잡은 나무꾼 네 명을 어떻게 처리할까로 갑론을박하기도 했다. 일부는 탄로가 나니 죽이자고 하고 일부는 민간인 피해까지 입히다 화를 자초할 수 있다며 살려 보내자고 해 통일된 지휘권이 행사되지 못했다. 말하자면 지휘자도 없었던 것이다. 지휘자가 없다면 살아 돌아가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그들이 살기 위해 악랄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그들을 초기에 제압하지 못하고 활동공간을 넓혀주고 말았다. 이건 작전의 실패인 것이다.

1.21사태가 터진 이틀 후인 23일 오후3시경. 나는 김포 11전투비행단 긴급 출격대기실에 나가 북한 전투기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별다른 움직임은 없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비상대기하며 전 기지를 진두지휘했다. 이때 오산의 미공군 314사단장으로부터 긴급 전화가 걸려왔다. 314사단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총장, 가능한 빠른 시간내에 동해상으로 전투기를 출격시키시오!"
"전투기 출격이오?"

나는 깜짝 놀랐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바로 전쟁이 아닌가. 그러자 다시 청천벽력 같은 말이 이어졌다.

"지금 이 시간 미해군 정보함 프에블로호가 북한군 해상부대에 체포(납치)돼 원산항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소. 빨리 전투기를 출격시켜 방어하시오."

한국공군은 도쿄의 미5공군사령부와 그 휘하의 오산 314사단장의 작전지휘를 받게 돼 있었다. 314사단장은 "직접 미공군기가 출격할 수 있지만 우리 정보함이 납치돼간 델리키트한 문제 때문에 한국 공군의 출격을 요청한다"고 덧붙였다. 목소리가 다급한 것으로 보아 미국도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즉각 전투기 3개 편대의 출격을 명령했다. 전투기는 평상시에도 완전무장을 하고 대기 중이지만 1.21 사태 때는 전투기에 폭탄을 만재한 상태로 24시간 만반의 출격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나는 각오를 하고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1.21사태와 함께 미 정보함 납치. 이것은 바로 선전포고인 것이다. 수차 휴전선에서의 도발행위가 있었지만 청와대 습격과 미 정보함 납치사건은 종전의 도발사건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이때 동해상으로 출격한 조종사로부터 무전연락이 왔다.

"미 정보함이 이미 북한 방공선(防空線) 안으로 끌려 들어가버렸습니다."

일촉즉발의 순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나. 북한 방공선 안으로 쫓아 들어가면 원산 청진 신포에 주둔해있는 북한 전투기들이 출격해 대응해올 것이고 그러면 동해상에서 공중전을 벌여야 한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시 자문했다. 아군기가 북한 방공선 안에서 프에블로호를 납치한 북한 전함을 부수고 프에블로호를 견인해 나온다면?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이다. 결단의 순간,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박대통령과 김형욱**

지휘관으로서 단호하게 결단을 내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나라의 운명이 걸린 전쟁 여부가 달려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직면했을 때 용단을 내리기는 더욱 어렵다. 국면을 회피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촌각을 다투는 시간에 어떻게든 결정을 내려줘야 할 때 정말 광야에 홀로 서있는 비장한 고독감마저 느낀다. 특히 역사에 대한 책임감을 생각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전투기가 공중에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긴박한 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 나는 냉정하게 출격한 전투기 3개 편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프에블로호가 북한 방공선 안으로 들어갔으면 돌아오기 바란다."

전쟁을 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 섰을 때 나는 최소한 국제법 조항에 기대야 한다고 생각했다. 북한 방공선 안으로 우리 전투기가 들어가 작전을 수행하면 물어보나마나 전쟁이다. 북의 전투기들이 달려들어 공중전이 벌어질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이런 때 나를 지탱하고 나라를 보전하는 지렛대는 원칙과 명분이다. 감정과 충동적 행동을 보일 때 오는 엄청난 재앙을 그동안의 세계전쟁사를 통해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나의 결단으로 우리 전투기는 무사히 기지로 귀대했다. 그때 내가 냉정을 잃지 않았다면 분명코 제2의 6.25가 터졌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남이나 북의 산하가 치유불능으로 파괴되고 수백만의 고귀한 인명이 희생됐을지도 모른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그것은 아찔한 순간이다.

이때 미국의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비롯 최신예 전함과 전투기들이 원산 앞바다에 집결하고 일본 괌 오키나와 기지까지 전시상황에 돌입해 있었다. 물론 프에블로호 납치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자 무력시위였지만 여차하면 전쟁을 하기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68년 1월28일 오전10시. 1.21사태와 프에블로호 납치사건이 난 지 약 1주일만이다. 청와대에서 전국 군검경 및 중앙정보부 핵심간부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 합동안보비상회의가 소집됐다. 이 회의는 직접 박대통령이 소집했으며 북에 대한 응징 방안과 치안유지 대책을 강구하는 자리였다.

각군 상황과 역할이 차례대로 보고되는 가운데 김형욱 중정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부진 체격의 김부장이 준비된 듯한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국내의 대간첩작전 임무를 중앙정보부에서 확실하게 책임을 지고 통합 수행하겠습니다."

이 말은 바로 합참의장이나 각군 참모총장을 엿 먹이는 보고나 다름이 없었다. 군을 자신이 지휘 통제한다는 뜻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무장공비가 청와대에 오기 전 일망타진했다면 몰라도 청와대 뒷마당까지 내준 책임자가 그런 제안을 하다니, 한마디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대통령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무겁게, 그러나 간단히 말했다.

"안돼. 국방장관 책임 하에 두시오."

전국 군검경 정보부 수뇌가 모여 있는 자리에서 대통령이 김형욱에게 대간첩작전을 수행하도록 권한을 공개적으로 부여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그에게 대간첩작전이란 이름으로 군권까지 위임한다면? 지금도 그때를 되돌이보면 가슴이 써늘해진다.

회의는 무겁게 끝나고 참석자 전원이 착잡한 마음으로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200여명의 인원이 2층 강당을 빠져 나가려니 몇 분의 시간이 흘렀다. 김형욱 부장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맨 앞장서서 나갔다.

***124군부대를 찾아라**

나는 암울한 조국의 상황을 무겁게 어깨에 느끼며 맨 나중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1층 홀로 내려섰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니 대통령이 2층 로비 난간에 서서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참석자들을 내려다보다가 맨 후미의 나를 발견하고는 부른 것이었다.

"잠깐 올라와."

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내가 로비로 들어서자 대통령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한반도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통령은 내가 곁에 서 있어도 한동안 지도를 바라보더니 혼잣소리로 말했다.

"이것을 다 부숴버리고 다시 시작해?"

나는 시국이 여기까지 온 것이 마치 내 책임인 양 무겁게 대통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또 대통령이 지도를 보며 반복해 말했다.

"이것들을 다 부숴버리고 다시 시작해?"

그 말은 두말할 것 없이 전쟁을 해서 새 판을 짜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뇌에 찬 대통령의 독백은 차가울 만큼 냉정했다. 대통령은 한참 후 나를 돌아보며 "응, 왔구먼." 하더니 이렇게 물었다.

"장지량 총장은 김신조부대가 어디 있는 줄 아는가."
"모르고 있습니다."
"이노무 자식들이 내 목을 따러 와?"

대통령은 대단히 분개하고 있었다. 이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들어와 대통령과 내 뒤에 와 섰다. 나는 깜짝 놀랐다. 회의가 끝나기가 무섭게 맨 앞장서서 부랴부랴 나가던 사람이 어떻게 이것을 알고 다시 돌아와 우리측에 바짝 다가와 서는가. 맨 선두에 앞장서 나갔기 때문에 누가 달려가 대통령의 독대를 알려주었을 리도 만무하고 또 참석자 모두 나를 앞서 나갔기 때문에 내가 대통령을 독대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것이다. 그가 눈치가 비상하긴 했지만 대통령의 발언도 잡아내는 고도의 첨단도청기를 휴대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내용이라고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속으로 전율하며 "이 친구가 나나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도청하고 있구나"하고 판단했다.

대통령이 김부장을 보더니 "김부장도 왔구먼."하고 "김부장, 김신조부대가 어디 있는지 아는가"하고 물었다.

"모르고 있습니다."

중정 부장도 모른다는 말에 대통령은 대단히 실망하는 빛을 보였다. 나는 대통령의 고민을 덜어줄 생각으로 "각하, 1주일만 시간을 주십시오."하고 말했다.

"그래, 찾아봐. 우리가 몰라서 되겠어?"

나는 공군본부로 돌아와 오후 1시30분쯤 도쿄의 미 5공군사령관을 찾았다. 5공군 사령관인 세스 맥키 중장과 나는 사적으로도 친교가 깊은 사이였다. 프에블로호 납치의 순간에 전투기를 출격시켜준 데 대해 그는 대단히 고마워하고 있었다. 전화가 연결되자 나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가 오늘 대통령으로부터 질문을 받았지만 답변을 하지 못했소. 전화통화여서 자세한 얘기를 전달하지 못하는 고충을 이해하시오. 협조를 부탁하오. 필요하면 내가 그쪽으로 갈 수 있소. 어떻습니까."
"알겠소. 오후 5시까지 내가 가겠소."
"감사합니다. 기다리겠소."

상황이 상황인지라 한미 간의 군 협조도 긴박하게 잘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었다. 맥키 사령관은 전화를 마친 3시간 반 후인 오후 5시 정확하게 대방동 공군본부 헬기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전용기로 도쿄에서 오산 미공군비행장으로 날아오고, 오산에서 다시 헬기를 타고 공군본부로 온 것이었다. 그와 나는 내 집무실에 마주 앉았다.

***"김일성 숙소도 찾아냈다"**

맥키 사령관과 나는 보안유지를 위해 가능한 한 말을 아끼며 총장실에 마주 앉았다. 맥키 사령관은 미국의 정보함 프에블로호 납치 순간에 우리가 전투기를 출격시켜준 데 대해 거듭 사의를 표했다.

"유사시 서로 돕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더 빨리 출격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지요."
"그것만으로도 우리 병사들에게 힘이 됐을 테니 대단히 유용한 출격이었습니다. 그런데 만나자는 용건은 무엇입니까."
"청와대를 습격한 김신조부대(124군부대)와 김일성 숙소를 찾고 있소.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F5 가지고는 캐치할 수가 없소."

나는 "KCIA(한국중앙정보부)는 물론 국내의 어떤 첩보부대도 124군부대를 알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나의 이런 요청에 맥키 사령관은 흔쾌히 대답했다.

"알겠소. 오늘 저녁 펜타곤에 연락해 OK를 요청하겠소."

사실 미군은 A급 군사기밀에 관해서는 우리와 공유하려고 하지 않았다. 주한미군 주둔은 북을 겨냥한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북침하려는 것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맥키와 나는 개인적 친분관계와 함께 내가 프에블로호를 데려오기 위해 공중전까지 불사하며 전투기를 출격시켜준 것에 고마워한다. 끌려가는 선원들에게 우리 전투기가 나감으로써 안도하라는 심리적 효과를 주었을 것이니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있는 협력이었던 것이다.

"내일 오전10시까지 예스냐 노를 알려주겠소."

이렇게 약속을 하고 그는 전용기를 타고 다시 도쿄로 날아갔다. 다음날 오전10시. 정확하게 맥키 사령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헤이 모닝 찰리(그들은 나의 이름 '지량'을 본따 '찰리'라는 닉네임으로 불렀다), 원하는 것은 다 됐다. That's OK."
"댕큐, 세스."

나는 저절로 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이틀 후 레이더망 탐색 책임장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총장실로 뛰어왔다. 북의 영공을 탐지하는 레이더망에 깜짝 놀랄만한 물체가 들어왔다 사라졌다는 것이다.

"총장 각하, 큰일 났습니다. 서해안 진남포 상공에서 동해안 원산 방향으로 이상한 비행물체가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졌습니다. 그것도 두 차례나 그랬습니다. 10만피트(35000m) 이상의 고도를 유지한 것 같습니다. 이동시간은 불과 3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전쟁 발발 직전의 긴박한 상황이라 나 역시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 첩보기가 나왔나 하는 의구심을 갖고 나는 곧바로 국방장관에게 뛰어갔다. 내 보고를 받은 장관도 안절부절 못했다. 그 사흘 후인 68년 2월초. 도쿄의 맥키 사령관으로부터 직접 전화가 걸려왔다.

"총장이 원하는 것은 해결됐다. 오후에 정보국장을 보내겠다."

그제서야 나는 짐작이 갔다. 그것은 내 부탁을 받고 북한의 주요 지형지물을 촬영하며 지나간 미공군 첩보기였던 것이다. 이윽고 이날 오후 5공군사령부의 정보참모(대령)가 견고한 나무박스 두개에 필름을 담아가지고 도쿄로부터 날아왔다.

나는 이를 직접 받아 항공사진 판독반에 넘겼다. 이들은 밤새 수천 장의 필름 판독작업에 들어갔는데 마침내 124군부대와 김일성 숙소를 알아냈다. 원산 앞바다에 끌려와 정박해 있는 프에블로호도 찾아냈다.

나는 순간 일을 완수했다는 안도감보다 또다시 긴장감이 들었다. 보복은 불가피한 선택이다. 대통령의 목을 따러 청와대까지 침입해 왔으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도 져야 한다. 우리 국민도 누구나 보복을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나는 필름 판독반에게 철저히 보안을 유지시킨 가운데 사진을 뽑도록 지시했다.

***"그러면 그렇지. 큰일 했어!"**

사진 판독 결과 124군부대는 평양에서 동남쪽 100km 이내의 험준한 산속에 있었다. 훈련장은 엄폐돼 있어 별다른 점을 발견하기 어려웠고 대신 퀀셋 30여 동이 골짜기 이곳저곳에 산개돼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밤에는 산을 타며 청와대까지 오는 산악훈련을 했을 것이고 낮에는 이 퀀셋에서 대남침투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특수부대원들은 당성 강한 청년과 강력범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 숙소는 평양 시내 한쪽에 있었다. 정보팀의 사진 분석관들은 평소 평양시가지 지도와 최근의 사진, 첩보활동에서 얻어진 지형을 꿰고 있었기 때문에 구체적 사진만 있으면 숙지한 기술로 지형지물을 판독해내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다만 실제상황일 경우 철통같은 경비망을 뚫고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나는 완성된 사진을 하나하나 체크한 뒤 이중 수십 장만을 골라 봉투에 넣어 밀봉해 들고 김성은 국방장관을 찾았다.

"124군부대와 김일성 숙소, 프에블로호 정박 장소까지 알아냈습니다. 프에블로호는 선수쪽 부서진 부분도 나와 있습니다. 나포 당시 함포사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나는 준비해 온 사진들을 펼쳐보이며 설명했다.

"큰일을 했소. 김일성 이자의 잠자는 곳까지 알아냈으니 저놈들 이제 사시나무 떨 듯 할 거요. 김일성도 잠을 못잘 거요."
"이 사진들을 직접 대통령께 갖다 드리고 설명해 주십시오."

그러자 국방장관이 크게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다.

"안 돼. 전문가가 가서 설명을 해야지 내가 가서 뭐 하겠소. 공군총장이 지금 가서 보고 드리도록 전화 해놓겠소. 그게 원칙이야. 항공사진이니 공군총장이 가서 설명해야지."

국방장관실에서 '이머전시 콜'로 대통령께 핫라인이 연결되자 대통령이 곧바로 들어오라고 해 나는 그길로 청와대로 올라갔다. 대통령께 1주일만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던 약속을 나는 정확히 지킨 셈이었다. 대통령은 만백사 제하고 나를 마주하더니 밀폐된 별실에서 사진 한장 한장에 매달렸다. 대통령이 김일성숙소와 124군부대에 대해 그처럼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다.

"각하, 이 사진이 김신조부대가 훈련받고 있는 훈련장입니다. 막사들이 특이합니다. 솜이불에 이 박히듯 박혀있습니다."

내가 사진마다 설명을 이어가자 대통령은 "그러면 그렇지"하고 말했다. 대통령은 기분이 흡족해지면 늘 이 말을 사용했다.

"요게 김일성 숙소란 말이지?" 여기에 이르러선 대통령이 입을 한일자로 꾹 다물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대통령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미군들이 잘 협조를 해주지 않았을 텐데?"

대통령은 미국이 특급 정보는 우리와 공유하지 않으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세스 맥키 미 태평양 5공군사령관과의 친교와 프에블로호 납치 순간에 그의 부탁을 받고 우리 전투기 3개 편대를 출격시켜준데 대해 고마워한 답례였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사실 우정은 이처럼 그 사람 인생의 값진 도반이 되어준다는 것을 그때 실감했다.

"그러면 그렇지. 큰 일 했어."

다시 대통령이 흐뭇해한 모습을 보였다. 그 2일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으로부터 크게 혼찌검을 당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순간 나는 조금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첩보에 따르면 김부장이 업무 보고차 청와대를 방문했는데 대통령이 격노하며 내가 제출한 사진을 꺼내 보이며 "대간첩작전을 다하겠다는 놈이 이런 사진 한 장 구해오지도 못 하냐"고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김형욱 정보부장과의 악연**

박정희 대통령은 대단히 화가 나있었던지 김형욱 정보부장을 계속 닦달했다.

"이거 봐, 이 사진이 김신조 일당의 훈련장이고 이 숲 쪽이 김일성이 숙소다. 푸에블로호가 끌려가 원산항에 정박해있는 사진도 여기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귀하는 막대한 조직,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정보력, 정부의 천문학적인 돈을 가져다 쓰면서도 이런 사진 한 장을 못 구해왔다. 도대체 중정이 뭐하는 곳이야? 그러고도 대간첩작전을 책임지겠다고?"

대통령은 몰아붙인 김에 더 거칠게 김부장을 몰아붙였다.

"이 사진은 공군총장이 돈 한 푼 안들이고 만들어온 거야. 돈 안들이고 선물 받아온 것이란 말이야!"

이 첩보를 듣고 나는 기분이 미묘했다. 좋자고 한 일이 결과적으로 중앙정보부장의 입장을 난처하게 했으니 말이다. 김부장은 대통령으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지 못한 것이 주위 사람들 때문으로 오판하고 있었고 그것이 나에게도 영향이 미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대통령은 평소 미덥지 않게 보이던 김부장을 나의 사진해결을 보고 잘됐다 싶어 질책한 것이었지만 평소 김부장의 성격으로 보아 이 일이 잡음 없이 넘어갈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이철희 중앙정보부 차장이 나한테 "사진접수 명령서'를 보내왔다. 공군 정보국장을 중정으로 불러 이 문건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사진을 모두 내놓으라고 합니다."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접수명령서'라니? 그러나 정보국장은 이 명령서를 나에게 내밀고는 발발 떨고 있었다. 나는 어느 정도 예감했기 때문에 "이런 나쁜 놈의 새끼들, (사진) 한 장도 내주지 마라!" 하고 명령했다.

김형욱과 나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은 어떤 안개 같은 악연이 있었다. 이것이 또 나를 압박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으나 이런 때는 정면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중정과는 썩 좋은 인연을 갖고 있지 않았다. 공군참모차장 때 나를 몰아내려고 전투조종사용 관사를 지어준 것을 공금 착복이라고 국회의원까지 동원해 모략, 대대적인 수사를 편 적이 있고 또 인사비리에 연루시켜 나를 쫓아내려고 별 음해공작을 폈었다. 중정 3국장 등 나와 관계가 매끄럽지 않던 군대내 경쟁자의 친제를 비롯해 정보부 간부들이 나를 몰아내려고 혈안이 돼있었는데 그 중심에 김형욱이 있었다.

이런 구원 때문에 김형욱은 직접 문건으로 '사진접수 명령서'라는 것을 만들어 나를 압박해왔으나 나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그 옛날 나를 엿 먹였던 것까지 떠올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공군 정보국장이 계속 난처한 얼굴로 내 앞에서 떨고 있었다. 하긴 그는 그동안 중정의 하수인처럼 업무를 수행해왔고 단 하루도 중정과 협조를 하지 않으면 업무가 마비되는 입장에 있었다.

"총장 각하, 저쪽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제가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도 그들의 '급사'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정보부를 상대하는 당시의 부서 상황은 그랬다. 다음날까지 정보국장이 나를 따라다니며 몇 장이라도 주자고 건의하자 나는 124군부대와 김일성숙소를 알아볼 수 있는 사진 두 장만을 내주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곧바로 김형욱 정보부장이 육해공군 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을 불러 안보회의를 소집했다.

"김신조 부대를 알아냈소. 우리도 김신조 부대를 부수겠소. 특수부대원 30-40명을 차출해놓았소. 이들 중에는 상당수의 사형수 등 재소자가 포함돼 있소."

김형욱 부장이 한 건 하겠다는 듯 다부지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실미도 사건'의 뿌리다.

***특공대 훈련**

긴급 안보회의라고 했지만 사실은 보복작전 회의였다. 김형욱 부장은 1.21사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실추된 이미지를 만회해보려는 듯 의욕을 보였다. 내가 제공한 사진을 마치 자신이 얻어낸 것처럼 대형 사진으로 만들어 브리핑을 하는 가운데 반드시 124군부대를 부숴버려야 두 번 다시 이런 만행이 나오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경고의 의미로 보복하겠다고 언명했다.

"중정이 특수부대원 인력을 제공하겠소. 어느 부대서 훈련을 맡아줄 수 있겠소. 먼저 육군부터 말해보시오."

김계원 참모총장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육군이 휴전선에 배치해놓은 대포로 포격을 해도 20km 이상 나가지 않습니다. 124군부대까지 사거리가 150km는 돼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니 답답하오."

"그렇다면 해군은 어떻소."

김영관 해군참모총장 역시 난색을 표하며 대답했다.

"배로 들어가 상륙해야 하는데 잠수함이 한 척도 없고, 또 육상침투하려면 수백km를 가야하는데 해군으로서는 대책이 별무요."

그러자 김형욱 부장이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나와의 관계가 매끄럽지 못했지만 그는 언제 그랬더냐 싶게 표정을 감추고 엄숙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공군이 맡아야겠구먼. 고공 침투가 최상의 방법 아니오?"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각군 총장회의를 소집한 것이었다. 한밤중 비행기로 지정된 장소에 침투해 낙하산으로 내려가 순식간에 특공작전을 수행하는 것이다.

나는 이와는 별도로 김일성 숙소를 부숴버릴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우리 대통령 목을 따러 왔다면 그들의 영도자 목도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극비로 이 계획을 세워 1편대기는 직접 내가 몰아 적진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이스라엘 다얀장군이 수행한 엔테베작전을 그대로 수행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김형욱 부장도 이와 유사한 계획을 내놓고 공군이 맡을 것을 강권하는 것이다.

"특수임무를 띤 대원을 우리가 차출하고 소속도 중정으로 하고 예산집행도 중정에서 할 것이오. 공군에서 고공침투 훈련만 맡아주시오."

그러면서 차출된 인력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했다.

"특공대원은 중정에서 특별히 선발한 자들인데 대부분 강력범 출신이오. 이 중에는 사형수가 6-7명 포함돼 있소. 이 자들이 특공작전을 펴다 살아 돌아오면 그 공으로 자유의 몸으로 해줄 것이오. 공군이 갈 수 있는 길을 제공하시오."

68년 4월말 공군은 30수명을 인수받아 특수부대로 배치해 훈련에 들어갔다. 124군부대가 평양으로부터 동남방 100km 거리에 있으므로 우리의 특수부대 훈련장도 그와 유사한 서울 동남방 100km 지점의 산악지대에 마련하고 야간훈련을 실시했다. 야간 고공침투가 주임무이기 때문에 파라슈트 투하훈련이 위주였다. 이들이 거칠고 용맹스러워 훈련은 120% 달성되고 있다는 보고가 매일 들어왔다. 공군 특수부대는 6.25 때도 운영해왔기 때문에 훈련상 큰 어려움은 없었다. 대신 중정에서 관리자가 파견돼 이들의 숙식, 하다못해 주부식 식단까지 마련해주었다.

한편 나는 별도로 김일성 숙소를 타격할 프로그램을 진행해나갔다. 가장 신임하는 전투조종사 몇 명을 마음속으로 지목해놓고 계획을 진행했다. 어느날 나는 참모차장과 주요 참모부장만을 한정시킨 가운데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공군타격대 2개 편대를 편성한다. 1편대장은 내가 직접 맡겠다. 휴전선을 넘다 보면 북한의 대포를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부 맞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목표지점에 도달할지 모르지만 김일성 숙소를 부수고 돌아올 것이다."

그러자 한 참모가 걱정을 했다.

"총장님이 직접 나서시는 일은 좀…. 총장님 유고라도 된다면 공군의 앞날이…."
"무슨 쓸데없는 마라. 참모차장은 뭐하는 사람이야. 내가 없으면 그 다음 사람이 하는 거다!"

***미군 책임자의 긴급전화**

이런 나의 결의를 본 참모들은 그 이후 내가 하는 일을 그대로 묵묵히 따랐다. 전쟁을 불사하는 비상시국, 나는 공군특공대에 심혈을 쏟으며 11전투비행단 벙커에 나가 전열을 가다듬었다.

1.21사태에 이어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납치되자 미국은 핵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7함대의 주력 전함을 원산 앞바다에 집결시켰다. 단순한 군사위협이 아니라 여차하면 북한을 초토화시켜버릴 태세였다. 사실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은 미국이 중대한 군사기밀을 노출하는 전력상의 엄청난 손실과 함께 83명의 승무원(장교 6명, 사병 75명, 민간인 2명)이 납치된 수모를 한 몸에 받는 처지였다. 세계 최강 미국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짓밟혀버린 사건인 것이다.

푸에블로호에는 첨단 정보수집 기재들이 탑재돼 있는데 이것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수모도 겪게 되는 순간이다. 이 때문에 미국은 푸에블로호를 불법납치로 규정하고 괌과 오키나와는 물론 미국 본토에서 공중급유를 받으면서까지 전폭기를 한반도로 급파했는데 1월28일부터 2월 초까지는 군산 오산 대구 광주 김해 강릉기지 등 국내 비행장에 미군 전투기들이 빼곡히 들어차버렸다. 함대에 만재한 전투기까지 포함하면 1500대는 넘어보였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이때 평양을 두들긴다면 그야말로 북한은 가루가 될 판이었다.

52년 미 공군대학시절 나의 클라스메이트였던 척 에이거 장군도 전폭기를 직접 몰고 군산에 와 있었다. 에이거 장군은 미 공군의 전설적인 인물로 세계 최초로 음속 돌파한 전투조종사였다. 그 역시 전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따라서 응징 차원을 떠나 전면전은 거의 기정사실화되는 듯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1,21사태 직후 청와대에서 가진 군검경 긴급 안보대책회의에서 "전부 부숴버리고 새롭게 판을 짜겠다"고 전의를 다지고 있었으니 어쩌면 미국보다 더 강경한 입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영향이 알게 모르게 전군에 파급됐고 육해공군 모두 여차하면 치고 올라갈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긴장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68년 4월 어느날 도쿄의 미 5공군사령관 세스 맥키 장군으로부터 급전이 날아왔다.

"헤이 찰리(지량), 별 일 없나."

'이머전시 콜' 치고는 싱거운 안부전화였다.

"별 일 없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만반의 준비가 완료된 상태다."
"내가 하고자 한 말이 그것이다. 그럴수록 신중하라. 감정적으로 사태를 판단해선 안된다."

이게 무슨 뜻인가.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기분이 좀 언짢았다. 동해상에 7함대를 집결시켜 놓고 여차하면 북을 치려는 미국이 이처럼 늘어진 소리를 하다니. 나는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엔 오산의 미 314사단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제네랄 플리스(장총장), 자중해야 합니다."

그 역시 미 5공군사령관과 유사한 말을 하고 있었다. 이런 전화를 김계원 육군참모총장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미 육군고문단장(KAMG)으로부터 매일 안부 전화를 받는데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듯 하다고 했다. 그 제서야 그들이 우리의 육해공군 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의 카운터파트가 돼 동태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는 미 5공군사령관과 오산의 314사단장이 따라붙은 셈이었다.

그들은 매일 나에게 안부전화를 걸어왔는데 내용은 "우리가 다 알고 있다. 제발 자중해달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북 침공을 자제해달라는 요구였다. 어느날 나는 화가 나서 314사단장에게 호통을 쳤다.

"당신들 왜 그러는가."
"미안하오. 우리 정보함이 끌려가있지 않은가. 부커 함장을 비롯해 83명의 우리 해군이 끌려가 있소. 전쟁이 나면 이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된 뒤에 해도 늦지 않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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