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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곳에 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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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곳에 안기다

6월 고을학교는 <양주고을>

싱그러운 초여름의 6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20강은, 조선시대에 도읍인 한양과 인접해 있으면서 천혜의 왕릉지이고 왕실의 사냥터였으며 여말선초의 최대의 왕실사찰이 있었던 양주(楊州)고을을 찾아갑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양주고을은 지금은 양주시와 남양주시로 나눠졌지만 조선시대까지는 도읍인 한양에 인접한 곳으로, 한북정맥(漢北正脈) 상의 도봉산, 삼각산이 서울과 양주, 의정부를 나누고 있으며 거의 대부분이 산지지형으로 여러 산들 사이에 많은 계곡들이 들어서 있고 그 사이사이에 분지형(盆地形)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무척 넓은 고을이었습니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징으로 양주는 조선시대에 왕릉의 조성지로서 그리고 왕실의 사냥터로서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여말선초 최대의 왕실사찰이었던 회암사지 뒤로 천보산이 펼쳐져 있다. ⓒ회암사지박물관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20강은 6월 28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회암사지→회암사(선각왕사비/무학대사 홍융탑과 쌍사자석등/지공선사 부도와 석등/나옹선사 부도와 석등)→천보산 중턱→양주읍치구역(관아지/향교/어사대비/선정비)→점심식사 겸 뒤풀이→해유령 전첩지→권율장군묘→온릉→이수광묘→서울의 순입니다.

▲양주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20강 답사지인 양주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왕릉지

조선시대에는 왕이 붕어(崩御)하면 교(郊, 도성으로부터 사방 100리) 지역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강을 건너지 않는 곳에 왕릉을 조성하였는데 이러한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양주를 비롯한 한양 북쪽의 몇몇 고을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양주는 가장 우선적으로 왕릉이 조성되는 곳으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이 있는 동구릉을 비롯하여, 세조의 광릉 등이 양주 땅에 마련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주는 도읍인 한양과 가깝고, 산과 들이 알맞게 펼쳐져 있어 왕실의 사냥터인 강무장(講武場)으로 자주 활용되었지요. 서산(西山), 홍복산, 천보산, 묘적산, 녹양평, 풍양 등이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강무장, 즉 임금이 공식적으로 사냥하던 곳이었습니다.

특히 성종 대에 와서는 국왕이 계절에 따라 봄 사냥인 춘수(春蒐), 여름 사냥인 하묘(夏苗), 가을 사냥인 추선(秋獮), 겨울 사냥인 동수(冬狩)를 실시했는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조선 초기에 태종은 11회, 세종은 36회, 단종은 5회, 세조는 26회, 성종은 21회, 연산군은 15회 등 자주 양주 땅에 거동하여 사냥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양주에는 전통사회의 ‘삶과 농경’과 관련된 놀이, 굿, 농악, 소리가 <양주소놀이굿> <양주들노래> <양주농악> <양주별산대놀이> <양주상여와 회다지소리> 등 다섯 종류로 계승되고 있는데, 이들은 각기 그 전통성(傳統性)과 원형성(原型性)을 인정받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각기 체계적 전수교육과 정기공연을 통해 그 가치를 확산,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양주는 북쪽으로 감악산, 동쪽으로 칠봉산과 천보산, 남쪽으로 노고산, 상장봉, 오봉산, 도봉산, 서쪽으로 노고산, 앵무봉 등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형입니다. 칠봉산과 천보산을 뒤로 하여 남향을 하고 중심부에는 불곡산과 도락산이 우뚝 솟아 양주의 진산(鎭山)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의 남쪽에 양주 관아와 현재의 양주시청이 있습니다.

양주의 물줄기는 신천, 중랑천, 공릉천, 덕계천, 청담천, 회암천, 광사천, 우고천 등이 흐르고 있습니다. 불곡산과 천보산 남쪽으로부터 발원하는 물길은 남쪽으로 흘러 중랑천으로 들어간 뒤 한강에 합류하고 도락산, 칠봉산, 천보산의 물줄기는 신천을 이룬 뒤 동두천을 거슬러 흘러 한탄강에 합류되는데 큰 홍수 등 수해가 없는 장풍(藏風)의 형국을 가진 길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동두천 남단에서 의정부 북단에 이르기까지 반원형으로 둥글게 돌아가며 한북정맥의 지맥을 따라 칠봉산, 회암령, 석문봉(石門峰), 축석령(291m), 갈립산(336.8m) 등의 봉우리들로 이어지며 천보산군(天寶山群)을 이루고 남서쪽으로 계속해서 산줄기를 뻗어서 도봉산, 삼각산으로 닿아 있습니다.

천보산군의 또 다른 산줄기는 해룡산(海龍山 660.7m), 왕방산(王方山 737.2m) 등으로 꽤 높은 봉우리를 일구고 왕방산에서 서북쪽으로 국사봉(國師峰 755m), 소요산(逍遙山 587m)으로 그 산줄기가 이어지고 있으며 양주의 중심에는 높지는 않지만 진산(鎭山)인 불곡산(佛谷山 466m)이 있고 그 북쪽으로 도락산(道樂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불곡산은 양주시 유양동에 있으며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양주의 진산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불곡산 정상과 상투봉, 임꺽정봉의 세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세가 빼어나고, 암봉에서의 전망이 뛰어납니다. 그 산자락에 신라시대 효공왕 2년(808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당시 불곡사(佛谷寺)라 불렀던 백화암(白華庵)이라는 고찰이 있으며 백화암 밑에 있는 약수터는 가뭄에도 물이 줄지 않고 혹한에도 얼지 않는다고 합니다.

▲온릉은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 능이다. ⓒ양주시

감악산,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령스러운 산

감악산(紺岳山 675m)은 그 이름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신령스러운 산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됩니다. 일설에는 멀리서 산을 보면 전체적으로 감색을 띠고 있어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합니다.

감악산은 경기5악(京畿五嶽)의 하나로 구붓한 모양을 가지고 있어 수덕(水德)을 상징하는 산으로 이해되며, 신령스러운 산으로 널리 알려져 토속신앙의 근원지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치성을 드리고 있습니다. 정상에는 빗돌대왕비 혹은 진흥왕순수비로 알려져 있는 연대 미상의 비석이 있고, 이미 태조2년(1393)에 삼각산(三角山)과 더불어 호국백(護國伯)으로 정해질 만큼 지리적으로나 신앙적 차원에서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천보산(天寶山)은 의정부, 포천, 동두천과 경계를 이루며 산줄기가 길게 늘어져 있어, 이곳에는 마을과 마을을 넘어 다니던 고개가 많이 생겼습니다. 대표적으로 조선 초기에 태조가 무학대사와 함께 회암사를 찾을 때 넘었다고 하여 붙여진 어하고개, 차돌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거나 혹은 호랑이 때문에 백 명씩 모여 다녀야 하는 고개라 하여 붙여진 백석이고개, 회암동에서 포천으로 넘어가는 회암고개, 율정동에서 포천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돌문이 있던 고개라 하여 석문령이라는 고개가 있습니다.

천보산 자락에는 고려 말에 세워진 회암사가 있던 회암사지와 회암사 무학대사 홍융탑, 회암사 쌍사자석등, 무학대사비가 남아 있습니다. 칠봉산(七峰山)은 일곱 봉우리로 이루어졌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가을에는 단풍나무 사이로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펼쳐 있어 금병산(錦屛山)으로 불렀고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많은 신하를 참형한 것을 후회하여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니다가 탑동에 위치한 상봉(上峰)을 국사봉(國射峰)으로 정하고 이 산을 지나갔기 때문에 어등산(御登山)으로 불렀다고도 합니다.

이런 연유로 칠봉산 일곱 봉우리의 이름은 모두 임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임금이 처음 등산하기 위해 떠난 곳이라 하여 발리봉(發離峯), 임금이 수렵에 필요한 매를 날렸던 곳이라 하여 응봉(鷹峯), 임금이 수렵하러 나가 수렵 표시 깃발을 꽂았다 하여 깃대봉[旗臺峯], 임금이 돌이 많다고 말한 곳이라 하여 석봉(石峯), 임금이 이곳에 쉬니 시위(侍衛)군사가 갑옷투구를 풀어놓았다 하여 투구봉(鬪具峯), 임금이 떠나며 돌이 많으니 뜻하지 않은 일에 조심하라고 당부하였다 하여 돌봉(突峯), 임금이 군사를 거느리고 떠날 준비를 하던 곳이라 하여 솔리봉(率離峯)이라고 부릅니다.

고령산(高嶺山·高靈山 622m)은 계명산(鷄鳴山)이라 달리 부르기도 하며 그 이름이 15세기 중반의 문헌에서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세종실록> 30년(1448) 12월10일 조에는 삼군진사무소에서 고령산(高嶺山) 등을 강무장(講武場), 즉 왕의 수렵장소로 정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보이며 특히 영조, 정조 대에는 왕의 행차기록이 나오는데, 숙빈(叔嬪) 최씨의 묘소인 소령원(昭寧園)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일영봉(日迎峰)은 일영리라는 마을 이름과 관련되어 그 이름의 유래가 전해지는데 동쪽을 향해 있어 떠오르는 해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봉우리라 하여 붙여졌다는 설과 중종의 비 신씨가 폐출된 후 친가인 일영리 절골에 거주하면서 절을 짓고 부처님에게 임금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였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입니다. 즉 하루 종일(終日) 산에 올라 임금을 위해 기도하였다[迎山拜禮] 하였으니, 여기서 ‘日’자와 ‘迎’자를 따와 봉우리 이름을 지은 것이라는 설이 있으며, 이곳에는 온릉과 권율장군 묘 등의 문화재가 있습니다.

양주 지역에는 대모산성, 비석거리토성과 함께 27개소의 보루 관방 유적이 확인되었습니다. 양주 일대 성곽 유적은 주로 보루 등 관방 유적이었으며 평지 길목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해발 200~550m 능선상의 봉우리에 위치하며 각각의 보루는 작으나 서로 연결되어 거대한 방어 기지를 구축하였습니다.

대모산성(大母山城)은 근초고왕(近肖古王) 이래 백제가 양주 일대를 지배하면서 한강 이북을 방어하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에 세운 성의 하나로 여겨지며 양주산성(楊州山城)이라고도 부릅니다. 산성에서 발견된 세발토기를 비롯한 백제 토기와 ‘덕부사(德部舍)’ 등과 같은 명문 기와편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비석거리토성은 유물 등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시대를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삼국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양주 일대는 삼국시대에 고구려, 신라, 백제가 서로 패권을 다투던 지역이고,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점령한 후에는 신라와 당의 전쟁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방어 목적으로 축성되었으리라 여겨지며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 지역인 매초성(買肖城)터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양주는 한반도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양주의 남쪽과 북쪽을 흐르고 있는 한강과 임진강은 수로교통의 편리함, 풍부한 수자원, 광활한 평야라는 지리적 장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찍이 이를 둘러싼 군사적 쟁탈전이 빈번하였고 한강과 임진강에 접해 있으면서 넓은 평야와 나지막한 산지로 둘러싸인 지리적 이점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인식되어 왔습니다.

▲온릉은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 능이다. ⓒ양주시

양주 일대를 제일 먼저 차지한 나라는 백제

삼국시대에 양주 일대를 제일 먼저 차지한 나라는 백제였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에는 “백제 개루왕(蓋婁王) 5년인 132년에 북한산성을 쌓았고, 제21대 개로왕(蓋鹵王) 15년인 469년 10월에 북한산성에 병사를 주둔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마한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한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정책이 실시되는 5세기 중반 이전까지 양주지역을 자기 세력권 아래에 두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이곳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고 양주 지역을 점령한 고구려는 한강을 경계로 백제와 대치하는 최전선인 양주 지역에 각종 군사시설을 만들면서 이곳의 이름을 매성(買城)이라고 불렀습니다. 원래 ‘매성’이란 고구려말로 ‘맷골’ 혹은 ‘물골’로서 수성(水城)을 의미하며, 신라가 통일을 완성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던 매초성(買肖城)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신라는 당나라의 도움을 받아 삼국을 통일하였으나 당나라가 신라까지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자 20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로 진격한 당나라 장수 이근행(李謹行)의 부대는 매초성에 주둔하였는데, 신라는 이곳에서 게릴라 전술을 통해 이근행의 20만 대군을 물리쳤습니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弓裔)는 898년(신라 효공왕 2)에 송악성(지금의 개성)을 수리하고 난 뒤 당시 정기대감이었던 왕건(王建)을 시켜 후백제 견훤(甄萱)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양주와 견주(見州)를 공격하였습니다. 한강의 물길이 통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양주를 확보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물길에 익숙하고 지혜가 뛰어난 장수였던 왕건을 파견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양주가 983년(성종 2)에 지방의 12개 주요 거점 도시를 의미하는 12목(牧)의 하나로 편성되었고, 1067년(문종 21)에는 남경(南京)을 설치하여 인접 군민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숙종 때에는 수도를 개경에서 남경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무학대사(無學大師)와 함께 전국 각지를 찾아다니며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한 결과, 고려 후기까지 ‘양주’로 불리던 한강 북부의 한양부가 정치, 경제, 군사적 측면에서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도읍으로 선정하였으며, 한양부 가운데 도읍에 편입되지 않은 지역은 옛 양주를 계승하는 지역이라 하여 그대로 ‘양주’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새로운 도읍의 건설과 함께 양주군으로 강등되었던 양주 지역은 1395년에 양주부(楊州府)로 승격하였고, 1397년에는 치소(治所)를 견주 지역, 즉 오늘날의 고읍동 일대로 이전하였으며 1413년(태종 13)에는 양주도호부(楊州都護府)로, 다시 1466년(세조 12)에는 양주목(楊州牧)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양주가 목(牧)으로 승격된 배경이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임진왜란 최초의 육지전투 승전지였던 해유령 전첩지 ⓒ양주시

조선 중기에 한때 존폐의 위기에 놓이기도

양주는 조선 중기에 들어 한때 존폐의 위기에 놓이기도 하였는데 1504년(연산군 10)에 경기 북부 지역에 강무장(講武場), 즉 국왕의 무예 연마를 위한 공식 수렵장을 만들고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금표(禁標)를 설치하였습니다. 당시 양주 지역의 대부분이 금표 지역 안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연산군은 양주목의 백성들을 인접 지역으로 이주시켜 사실상 양주목이라는 행정구역을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1506년(중종 원년)에 양주는 양주목으로 다시 부활되었고 읍치 구역이 오늘날의 양주시 유양동의 불곡산 부근에 새로 조성되었는데 동헌, 향교, 사직단 그리고 각종 건물들이 이때 지어졌고 이때부터 유양동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양주시대가 열렸으며, 기존의 양주시 고읍동 지역은 일개 마을로 전락하였습니다.

양주의 읍치구역(邑治區域)은 원래 한양의 중심부에 있었으나 조선 태조 3년 조선의 도읍을 송도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지금의 서울 광진구 일대인 대동촌으로 밀려났다가 다시 견주(見州)의 옛터인 천보산(天寶山) 자락을 배경으로 한 고읍동 일대로 옮긴 후, 중종 때부터 불곡산 자락에 안겨 남향을 하고 있는 유양동(維楊洞) 일대로 옮겨졌습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불곡산 남쪽 자락 유양동에 양주관아를 설치하고 향교(鄕校)와 사직단(社稷壇) 등을 둠으로써 새로운 양주 시대를 열었으며 1506년(중종 1)부터 1922년 양주군청이 의정부로 옮겨지기 전까지 양주의 읍치 구역으로 객사(客舍), 관아(官衙), 포청(捕廳), 향교(鄕校) 등 통치를 위한 주요 시설이 밀집해 있었습니다.

읍치 구역에는 양주목의 관청(官廳)뿐만 아니라 수도 한양을 방어하는 군사기관인 기보중영(畿輔中營)이 설치되었는데 양주목사는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겸 중영장(中營將)의 직을 겸임하였으며 그만큼 군사적 중요성이 있기에 양주목사의 품계는 정3품 혹은 2품에 해당하였습니다.

관청 뒤 계곡 쪽으로는 금화정(金華亭)이 있고 목민관의 마음 다스리기를 뜻하는 ‘관민동락(官民同樂)’이 새겨진 바위가 있으며, 동헌 뒤편으로 사대(射臺)가 있었다고 하는데, 정조가 3일간 머물면서 여기서 활쏘기를 하고 지방민을 위로하는 윤음(綸音)을 내린 바 있어 이를 기념하는 어사대비(御射臺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외에도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氷庫)가 현 유양초등학교 남쪽 건너편의 핑구재 아래에 있었으며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도적 임꺽정의 생가는 불곡산 자락에 안겨 있는 백화암(白華庵) 위에 있습니다.

포청 터는 조선 시대 범죄자들을 잡아 다스리는 포도청이 있던 곳으로 사형수를 처형하는 장소가 같이 있었기 때문에 행형장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여제(厲祭)는 제사를 받지 못하는 무주고혼(無主孤魂)이나 전염병을 퍼뜨리는 귀신인 여귀(厲鬼)에게 지내는 제사를 일컫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과 지방의 각 군현에 여단을 두어 역병을 예방하였는데 동쪽의 성황단(城隍壇), 서쪽의 사직단(社稷壇)과 함께 관아에서 필수적으로 세우는 제단입니다. 여기에 매년 봄, 여름, 가을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으며 역병이 도는 해에는 수시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양주향교(楊州鄕校)는 태종 1년(1401)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광해군 2년(1610)에 재건되었다가 한국전쟁 때 다시 소실된 것을 1958년 양주지방 유림들에 의해 재건되었고 1984년에 복원되었습니다. 향교 앞에는 450년 된 느티나무가 서 있으며 전학후묘의 배치로 배향공간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5성을 대성전(大成殿)에 설총을 비롯한 동국 18현을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위패로 모셨습니다.

해유령 전첩지, 임진왜란 최초의 육지전투 승전지

해유령 전첩지(蟹踰嶺戰捷地)는 임진왜란 최초의 육지전투 승전지입니다. 한강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부원수 신각(申恪)은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과 함께 양주 산중으로 들어가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함경도병사 이혼(李渾)으로부터 지원병을 얻어 서울로부터 북상하는 왜군 선봉부대를 해유령 입구에서 맞이하여 목 70여 급(級)을 베어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임진강으로 도망하였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은 한강 패전의 책임을 신각에게 미루고 ‘명령불복종죄’로 무고하는 장계를 올렸으며 이에 우의정 유홍(兪泓)은 그 내용을 믿고 신각의 참형을 주창하여 신각은 양주에서 참살되었는데 뒤늦게 승전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형 집행을 중지하기 위하여 선전관을 파견하였으나 형은 이미 집행되었습니다.

해유령(게너미고개)은 양주 백석 연곡리(蓮谷里)에서 파주 광탄(廣灘)으로 넘어가는 고개 길입니다. 연곡리 입구가 좌우로 낮은 산이 마치 삼태기 모양으로 둘러있어 산 위에 매복해 있으면 그 안으로 들어오는 적을 포위하여 섬멸할 수 있는 전략상으로 매우 주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지금은 이곳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 아래에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신각, 이양원, 이혼의 넋을 기리는 사당인 충현사(忠顯祠)를 세워 매년 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

천보산 자락에 자리 잡은 회암사(檜巖寺)는 여말선초의 왕실사찰(王室寺刹)로서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던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등 고승(高僧)들이 주석(主席)하였던 최고의 가람이었습니다.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승려 지공(指空)이 고국인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실제로는 1378년(우왕 4) 지공의 제자 나옹(懶翁)이 회암사를 중건한 후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고,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을 때는 승려 수가 3,000명에 이르렀으며, 조선 초기까지도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절이었습니다.

온릉(溫陵)은 중종의 원비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의 능입니다. 단경왕후는 익창 부원군 신수근의 딸로서 연산군 5년(1499) 진성대군(중종)과 혼인하여 부부인에 봉해졌고 중종반정으로 중종 1년(1506)에 비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친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으로서 연산군의 축출을 반대했기 때문에 공신들의 반대로 7일 만에 폐출된 후 명종 12년(1577) 71세로 사저에서 후사 없이 승하하여 신씨 묘역에 묻혔다가 영조 15년(1739)에 왕후로 복위되었고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어 묘호를 단경, 능호를 온릉이라 하였습니다.

▲양주고을의 무형문화재 <양주별산대놀이> ⓒ양주시

권율 장군과 실학자 이수광의 묘

만취당(晩翠堂) 권율(1537~1599)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선조 15년에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55세 때에는 의주목사로 부임하여 북방 여진족을 방어하였고 임진왜란(1592~1598) 중에는 전주에서 군사 만 여명을 지휘하여 독산성에 진을 치고 적이 서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선조 26년(1593)에는 한양을 회복하고자 행주산성으로 진을 옮겨 군, 관, 민이 힘을 합쳐 3만의 왜군을 물리쳤는데 이것이 임진왜란 3대 대첩(진주대첩, 한산도대첩, 행주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입니다.

이수광(李睟光)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하면서 마테오리치(Matteo Ricci)의 <천주실의(天主實義)> 등 여러 서양 서적을 통하여 새로운 학문을 연구 개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와 서양의 문물을 소개하는 백과사전격인 <지봉유설(芝峰類說)>를 펴낸 실학자입니다.

이수광 선생묘는 위로부터 아버지 이희검(李希儉), 이수광, 아들 이성구(李聖求)의 묘가 함께 놓여 있으며 묘역의 초입에는 세 사람의 신도비가 비각 안에 세워져 있는데 시기별로 첫째는 1613년(광해군 5)에 건립된 것으로 신흠(申欽)이 찬(撰)한 것이고, 둘째는 1632년(인조 10)에 건립된 것으로 이정구(李廷龜)가 찬한 것이며, 세째는 증손인 이현석(李玄錫)이 쓴 것입니다.

특히 이수광의 신도비는 비문은 좌의정 이정구(李廷龜)가 짓고, 병조참판 오준(吳竣)이 쓰고,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전을 썼는데 비문에 이수광의 시호인 ‘문간(文簡)’이 붙여진 이유에 대해 “배움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한결같이 덕을 베풂에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 ‘간(簡)’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필히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 제20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관람료,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 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 주십시오. 버스 사전예약 관계상 6월 24일까지 참가접수를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최소출발인원 20명).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고을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goeulschool에도 꼭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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