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의 기운을 머금은 6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인문지리학자, 서울해설가)의 제39강은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청량리동·석관동에 걸쳐 있는 해발 140m의 천장산에서 바리봉을 지나 배봉산(拜峰山 108m)에 이르는 산줄기를 따라 그곳에 조성되었던 능원(陵園)와 그 원찰(願刹)들을 둘러보겠습니다.
천장산(天藏山 140m)은 불교사찰의 입지유형 가운데 가장 빼어난 명당터로서 ‘하늘이 숨겨놓은 곳[天藏]’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천장산과 배봉산은 도심의 빌딩 사이로 비죽이 고개를 내민 녹지대의 섬처럼 보입니다만 상상력을 동원하여 자세히 살펴보면 길게 이어진 산줄기의 봉우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울학교 제39강은 2015년 6월 14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 의릉 매표소 앞에 모여주세요(성북구 화랑로 32길 146-20, 전화 02-964-0579. 지하철 : 1호선 신이문역 1번 출구에서 도보 약 15분/6호선 돌곶이역 7번 출구에서 도보 약 15분. 버스 : 지하철 6호선 돌곶이역 7번 출구에서 120, 147, 261, 1222번 타고 의릉입구에서 하차, 4분 소요).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참가신청 바로가기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의릉→천장산→한국예술종합학교→경희의료원(회묘터)→연화사→세종대왕기념관(세종신도비)→영휘원/숭인원→점심식사 겸 뒤풀이→바리봉(청량사)→떡전고개→서울시립대→배봉산(영우원터/휘경원터)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6월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하늘이 숨긴 명당, 천장산
북한산성의 대동문과 보국문 사이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칼바위능선은 화계사의 주봉을 이루고 수유리 고개를 넘어 ‘북서울 꿈의숲’이 있는 오패산을 이루고 다시 동남쪽으로 장위동 고개를 넘어 천정산에 이릅니다. 이어 동쪽으로 의릉을 감싸고 서쪽으로는 경희대의료원이 들어선 ‘회묘터’를 감싸고 다시 뻗어 나와 회기동 고개인 안화현(安禾峴)을 넘어 청량사가 기대고 있는 바리봉을 지나 떡전고개를 넘어 서울시립대 뒷산인 배봉산을 이루고 촬영소 뒷산 기슭에서 중랑천과 청계천을 만나 그 산줄기의 뻗음을 마감합니다.
천장산은 이 산줄기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회기동, 청량리동, 석관동에 걸쳐서 있습니다. 회기동은 ‘회묘터’에서 유래됐고 석관동(石串洞)은 천장산의 한 지맥이 돌을 꽂아 놓은 듯이 보여 돌곶이마을이라고 하던 것을 한자명으로 옮긴 것이며 청량리동은 청량사(淸凉寺)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천장산은 예로부터 풍수지리상의 명당 터로 손꼽히는 곳인데 특히 연화사의 삼성각 상량문에 따르면 “진여불보(眞如佛寶)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시방삼세에 두루 하지만 드러나 보이지 않으므로 절의 뒷산을 천장산이라 부른다”고 하였듯이 사찰의 입지조건으로 가장 빼어난 명당 터로서 ‘하늘이 숨겨놓은 곳[天藏]’이라는 산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천장산 일대는 조선 왕족의 묘지가 많이 조성되었는데 조선 20대 왕인 경종(景宗)과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의 쌍릉(雙陵)인 의릉(懿陵)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또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묘도 이곳에 조성하였는데 훗날 연산군이 왕릉의 규모를 갖추고 회릉(懷陵)으로 격상시켰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다시 회묘로 격하되었지요. 이후 연산군의 왕비였던 신씨의 묘까지 이곳에 조성되었다가 지금은 모두 이장되어 ‘회묘터’라는 한자 이름이 전해오는데 그것도 ‘회묘터[懷基]’가 아니라 ‘돌아온 터[回基]’로 바뀌어 동네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묘가 고종(高宗)의 승하로 남양주 홍릉(洪陵)으로 합장되기 전까지 이곳에 있었습니다. 고종의 계비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 귀비 엄씨의 묘인 영휘원(永徽園)과 영친왕의 아들 이진(李晉)의 묘소인 숭인원(崇仁園)이 있으며 이를 모두 아울러 ‘홍릉’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주변에는 전씨(全氏)의 시조묘(始祖墓)와 단소재(壇所齋)가 있는데 전씨의 시조묘는 원래 북한에 있었던 것을 이곳에 옮겨와 새로 조성하였고, 단소재는 1925년에 의친왕 이강(李堈)이 전씨 종가의 세 공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입니다.
의릉, 경종과 선의왕후의 능
의릉(懿陵 eureung.cha.go.kr)은 조선 제20대 경종(景宗)과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의 능으로 왕과 왕비의 봉분을 앞뒤로 배치한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입니다. 조선시대 왕릉 가운데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가 묻힌 여주의 영릉(寧陵)이 같은 구조이며, 이때 왕은 위쪽, 왕비는 아래쪽에 모시게 됩니다.
능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으며 난간 석주에는 12지를 넣어 방위를 표시하였고 위쪽에 놓인 왕의 능에만 곡장(曲墻)을 두르고 있는데 이것은 부부의 예로서 한 곡장 안에 두 봉분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경종은 숙종(肅宗)의 장남으로 계비인 희빈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숙종에게는 희빈 장씨 외에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가 있었으나 이들에게는 후사를 이어줄 아들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인지 경종은 태어난 지 두 달여 만에 원자로 봉해지는데 이것은 당쟁으로 이어지고,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인현왕후가 아직 젊기에 후궁의 아들을 원자로 삼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주장을 펴다가 유배되어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사건으로 서인은 대거 축출되고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게 되며 경종은 3세의 나이로 다시 세자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종의 나이 14세 때,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 민씨를 저주하기 위해 취선당 서쪽에 마련해놓은 신당이 발각되어 ‘무고의 옥’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이때 사약을 받은 희빈 장씨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만나면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들의 하초를 잡아당겨 기절시키는 이해하지 못할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 때문인지 경종은 어릴 때부터 병약하였으며 임금이 된 후에도 병치레가 많았으며 더하여 후사가 없어 즉위년(1720)에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였는데 이는 노론과 소론의 당쟁 속에서 신축, 임인 옥사를 야기하였고 마침내 경종 4년(1724)에 창경궁 환취정에서 승하하니 춘추 37세였고 재위 4년이었습니다.
선의왕후는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영돈녕부사 어유구(魚有龜)의 딸로 1718년 세자빈이었던 단의왕후 심씨가 병으로 죽자 같은 해 15세로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가 경종의 즉위와 더불어 왕비가 되었으나 소생 없이 26세에 승하하였습니다.
의릉은 한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중앙정보부가 자리잡고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능 주변에 중앙정보부의 축구장을 만드는 바람에 많이 훼손되었으나 ‘중앙정보부’가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세곡동 대모산 아래로 이전하면서 다시 원상 복구되어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으며 한쪽 귀퉁이에 그 당시 중앙정보부 강당 건물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영휘원과 숭인원
영휘원(永徽園)은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사친(私親)인 순헌 귀비 엄씨의 원소(園所)입니다. 엄귀비는 1854년 11월 증찬정(贈贊政) 엄진삼(嚴鎭三)의 장녀로 태어나 8세에 경복궁에 들어가 명성황후 민씨의 시위상궁(侍衛尙宮)이 되었다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아관파천 때 고종을 모시며 후궁(後宮)이 되어 1897년 영친왕 이은을 출산하여 귀인(貴人)에 봉해졌고, 1901년 비(妃)에 진봉되고, 1903년에는 황비(皇妃)에 책봉되었습니다.
양정의숙, 진명여학교, 명신여학교의 설립에 참여하는 등 근대 여성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1911년 7월에 사망하자 8월에 안장하고 원호(園號)를 영휘라고 하였으며, 위패는 덕수궁 영복당(永福堂)에 봉안되었다가 칠궁(七宮)으로 이안(移安)하였습니다.
숭인원(崇仁園)은 영친왕과 이방자(李方子) 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원손(元孫) 이진(李晉)의 원소로서 진은 1921년 8월에 태어나 그 이듬해 5월에 1년도 채 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두 원의 묘역시설로는 곡장(曲牆), 상설(象設),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석마(石馬), 홍살문(紅箭門), 정자각(丁字閣), 비각(碑閣), 제실(祭室), 우물[靈泉], 사초지(莎草地) 등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습니다. 담장 밖 북쪽에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관이 있으며, 그 마당에는 구영릉(舊英陵, 內谷洞 獻仁陵)에서 수습해온 세종대왕신도비와 능호석(陵護石)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연화사(蓮華寺)는 1499년(연산군 5)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되었습니다. 1993년 자음(慈音)이 지은 <천장산연화사삼성각상량문>에 따르면, 부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머무는 곳이 연화장(蓮華藏) 세계여서 연화사(蓮華寺)라 하기도 하고, 중생의 근본적 자성(自性)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청정한 연꽃과 같으므로 연화사(蓮花寺)라 했다고 합니다.
이후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이듬해 정담(淨潭)이 남화(南化), 완허(玩虛)의 도움을 받아 복원하였고 이때 궁인 박씨와 상궁 최씨, 김씨 등이 발원하여 탱화를 제작하였습니다.
1504년(연산군 10)에 윤씨의 묘를 회릉(懷陵)으로 승격시키고 석물을 조성하였고 1724년 경종이 죽자 그 이듬해에 회릉 근처에 의릉(懿陵)을 만들고 연화사를 원찰로 삼았는데 회릉은 의릉과 함께 이곳에 있다가 1969년 서삼릉(西三陵)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청량사(淸凉寺)는 신라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1117년(고려 예종 12) 예종이 불교 거사(居士)였던 이자현(李資賢)을 불러 이 절에 머물게 하였다고 하며 원래는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이 옛 절터였는데 1897년 명성황후의 홍릉을 만들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으며 일제강점기에는 한용운(韓龍雲)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습니다. 극락전(極樂殿)의 현판과 주련(柱聯)은 모두 박한영(朴漢永) 스님의 글씨입니다.
떡전고개는 서울시립대학교가 있는 전농동에서 청량리정신병원이 있는 청량리 쪽으로 넘어 가는 고개로서 지금은 철로가 가로지르고 있어 '떡전교' 또는 '떡전다리'라 불리는 철도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야 하지만 예전에는 이 부근에 떡을 만들어 파는 떡집이 많아 사람들이 그곳을 떡점(餠店)거리, 또는 떡전고개라 불렀습니다.
떡전고개는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으로서 경기북부, 강원도, 그리고 함경도에서 한양으로 올 때 도성(都城)에서 약 시오리 거리에 있는 이곳에 이르러서는 배고픔도 달래고 옷매무새도 고치면서 잠시 쉬었다 가거나 하루 밤을 묵어가기도 했던 곳입니다.
배봉산 자락의 영우원터·휘경원터
배봉산(拜峰山) 자락에는 영우원((永祐園)과 휘경원(徽慶園)터가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우원은 조선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소이며 휘경원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였던 수빈 박씨의 묘소입니다.
배봉산의 이름도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정조가 평생에 못 다한 불효를 한다며 날마다 부친의 묘소를 향해 배례하게 되면서 산 이름을 ‘배봉산‘으로 불렸다는 설과, 이곳 산기슭에 영우원과 휘경원 등 왕실의 묘원이 마련되면서 길손들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기 때문에 배봉(拜峰)으로 불렸다는 설과, 산의 형상이 도성(都城)을 향하여 절하는 형세를 띄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영우원((永祐園)은 정조(正祖)의 생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로서 원래는 수은묘(垂恩墓)라 하였으나 정조가 임금에 오르고 영우원이라 고쳐 부르다가 정조 13년(1789)에 화성(華城)으로 이장한 후에는 현륭원(顯隆園)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광무(光武) 3년(1899)에는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追尊)되면서 ‘융릉(隆陵)’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휘경원(徽慶園)은 조선 제22대 정조의 후궁이자 제23대 순조의 생모인 수빈(綬嬪) 박씨의 묘인데 수빈 박씨는 1770년(영조 46)에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 박준원(朴準源)의 3녀로 태어나, 1787년(정조 11) 정조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선옹주(淑善翁主)를 낳고 수빈에 책봉되었지요. 1790년(정조 14) 순조를 출산한 후 1822년(순조 22)에 사망하여 1823년에 배봉산 아래 묻혔으나 1855년(철종 6)에 순조의 능인 인릉(仁陵)을 천장(遷葬)하면서 휘경원도 같은 진접읍의 내각리(內閣里)에 있는 순강원(順康園) 옆으로 옮겼다가 풍수지리상 적당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다시 진접읍 부평리로 이장하였으며, 그 위패는 칠궁 안에 있는 경우궁(景祐宮)에 봉안되어 있습니다. 휘경원은 그 자취를 찾아 볼 수 없고 휘경동이라는 지명으로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 제39강 참가비는 5만원입니다.(강의비, 점심식사 겸 뒤풀이, 관람료,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현장에서는 참가 접수를 받지 않습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서울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seoulschool2 에도 꼭 놀러오세요.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 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번씩, 둘째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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