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발적 문제 제기, 신자유주의 내부에 은폐된 사회주의
<신자유주의의 좌파적 기원>(글항아리, 2015년 3월 펴냄)의 제목은 도발적이다. 신자유주의가 사회주의와 관련이 있다니! 출판사가 번역서를 내면서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원래 제목을 교묘하게 상업적으로 재창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이 책의 원제는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내건 시장(markets in the name of socialism)"이고 부제가 한국어판 번역서의 제목이니 물론 좌파 상업주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원제와 부제가 바뀌더라도 책의 핵심 주장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도발적인 제목만큼 이 책의 주장도 파격적이다. 이 책은 신고전파가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함께 추진된 급격한 시장경제로의 이행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에 의해 신고전파의 사회주의적 성격이 왜곡·변질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 따르면 1870년대 한계주의 혁명 이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신고전파의 이론은 시장 모형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모형을 포괄하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실'사회주의에서도 신고전학파 이론은 꾸준히 발전했다. 그러나 1989년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신고전파의 사회주의적 성격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의 공세 속에서 이에 흡수되거나 왜곡·변질되었다.
사실 전통적인 경제사상사의 분류 체계에서 신고전파는 시장 모형을 구축한 이론으로 신자유주의와 근친성을 갖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주장을 통해 이러한 전통적인 견해에 도전장을 내민다. 신자유주의로부터 신고전파를 구해내 담론의 지형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것이다. 게다가 좌파가 전유했던 사회주의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서 말이다.
사회주의적 신고전학파와 신고전파 사회주의라는 간극적 공간
책을 독해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필자는 이 책에 등장하는 학파들의 이론적 지형도를 그리고 핵심 주장을 포착하는 독해법을 이용했다. 이 책은 시장사회주의 모형 자체의 작동 메커니즘을 해명하는 책이 아니라 '현실'사회주의의 새로운 사회주의 실험과 몰락 이후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신고전파 경제학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서평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아래의 그림은 이 책에 등장하는 이론의 지형을 한눈에 보여 준다. 필자가 보기에 이 책에서 신고전학파는 '사회주의적 신고전파'와 '시장 근본 신자유주의'로 양분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신고전파'로 불리는 '사회주의적 신고전파'는 1870년대 이후 한계주의 혁명을 통해 형성되어 "개별 행위자들에 대한 연구, 주관적 가치 및 가격 이론, 한계 지점에서의 계산, 시장을 통한 집단적 행동 그리고 시장 균형 상태 등을 특징"으로 하며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체제와 상관없이 적용될 수 있는 일반균형모형을 제시했다.
다른 한편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는 '시장 근본 신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 국가, 인구 등을 조직하는 문제에 대한 정부 정책을 형성하는 아이디어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책에는 규제 완화, 무역 및 자본의 이동 자유화, 인플레이션의 억제 안정화, 공기업 사유화 등이 포함되며 자유롭고 아무 구속이 없는 경쟁적 시장 등이 포함된다.
사회주의와 관련해서는 '신고전파 사회주의'와 '국가사회주의'로 구분이 가능하다. '신고전파 사회주의'는 신고전파 이론을 사회주의에 적용하려는 일군의 학자들을 포함하며 대체로 시장사회주의의 지지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신고전파 경제학이 사회주의에 도움이 되며 동시에 사회주의는 신고전파 경제학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국가사회주의는 시장을 배제하고 중앙 계획을 통해 경제를 통제하는 것을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당 지도자들이 전반적인 국가의 경제계획을 결정하고 엔지니어들이 이 계획의 세부 사항을 구체화하며 통제관들이 그 계획의 수행을 감시한다. 이에 따라 경제학이 할 일은 당의 의사 결정에 대한 이론적 지지의 논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렇게 학파들을 분류하고 나면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핵심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이 책은 '사회주의적 신고전파'와 '신고전파 사회주의'의 공통분모와 초국가적 교류를 검토한다. '사회주의적 신고전파'는 자신들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의 개념을 활용해 시장과 마찬가지로 경제계획이 최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음을 보였다. 또한 '신고전파 사회주의'도 사회주의와 시장은 서로 배제할 수 없는 범주라는 사실을 깨달고 1921년 소련의 신경제정책의 실행 이후 '현실'사회주의에 신고전파 경제학의 모형을 도입하려는 노력을 해왔다(제1장).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적 지형에 있던 이 두 학파는 1953년 스탈린의 사망과 함께 극적인 교류를 시작한다. 미국 학자들의 소련 방문 연구, 미국 정부의 동유럽 학자 연수 프로그램, 국제회의의 개최 등을 통해 신고전파 경제학을 매개로 한 두 학파의 초국가적인 교류가 이루어진 것이다(제2장).
다른 한편 소련 체제를 거부한 동유럽의 나라들, 특히 유고슬라비아와 헝가리에서는 국가와 경제의 탈중앙화, 노동자에 기초한 경제적 민주주의,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로부터 이탈, 시장 역할의 확장 등을 결합한 새로운 시장사회주의 실험이 도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은 신고전파 경제학자들과 동맹을 맺고 이들의 이론을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의 '규범적 도구'로 사용했다(제3장과 제4장).
'사회주의적 신고전파'와 '신고전파 사회주의'는 이데올로기적 지형이 상반됨에도 불구하고 신고전파 경제학을 활용해 사회주의 모형을 구축하려 했다. 그러면서 이 두 학파는 시장의 중심성을 강조한 신자유주의나 국가계획을 강조한 국가사회주의와 대립적 관계를 형성하는 이론적 기반을 확립했다. 그리고 이들은 초국가적 교류를 통해 자신들의 이론의 유사성을 확인하고 점차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이 책의 두 번째 핵심 내용은 '신고전파 사회주의'가 '시장 근본 신자유주의'에 흡수되고 왜곡·변질되는 과정이다. 우선 이 책은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경제 및 사회문제 연구센터(CESES)의 사례를 통해 신자유주의 사상이 미국의 헤게모니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미국 자본주의와 소련 국가사회주의를 넘어선 '간극적 공간들'(우파와 좌파가 결합된 형태로 민주적 사회주의,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시장사회주의 등 현실 사회주의와 미래의 실현 가능한 여러 사회주의)로부터 생겨났음을 보인다(제5장).
그러나 1989년 소련의 몰락은 이러한 간극적 공간을 급격하게 축소시키고 '시장 근본 신자유주의'로 흡수되는 전환점을 만들었다. 소련이 몰락한 직후 '사회주의적 신고전파'와 '신고전파 사회주의'는 시장사회주의가 실현될 호기가 왔다고 보았다. 그러나 급격히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신자유주의 프로젝트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간극적 공간에 머무르던 이 두 학파는 뿌리 뽑히고 신자유주의 내부로 흡수되거나 왜곡·변질되었다(제6장과 제7장).
전체적으로 보면 이들의 대립 관계는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시장 근본 신자유주의'로 수렴되었다. 다시 말해 '국가사회주의'는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소멸했고 '사회주의적 신고전파'와 '신고전파 사회주의'는 '시장 근본 신자유주의'에 의해 왜곡된 형태로 수렴되면서 대립적인 이론 지형은 붕괴했고 '현실'사회주의는 시장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로 이행하고 말았다.
[프레시안 북스 지난 호 바로 가기]
담론을 통한 시장사회주의 분석의 아쉬움
나아가 소련의 국가사회주의 내부에서도 그리고 동유럽 사회주의의 새로운 시장사회주의의 실험에서도 신고전파 이론을 적용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며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 신자유주의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시장 대 국가의 이항 대립을 넘어서는 간극적 공간, 즉 시장사회주의 이론은 여전히 존재하며 이를 복원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을 통해 이 책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는 신자유주의에 의해 배제당한 급진적 민주주의를 복원한 "탈중앙적이고 평등주의에 입각한" 실현 가능한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시장 근본주의와 국가사회주의의 이항 대립을 극복하고 그 간극에 존재하던 시장사회주의를 복원함으로써 새로운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열려 한다.
이 책이 도발과 파격의 주장을 통해 던지려는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과연 이 책의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통찰을 줄 수 있는지는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우선 신고전파를 신자유주의로부터 구해내서 이를 사회주의와 접목하려는 노력은 중요하지만, 이러한 전술적 글쓰기로 인해 신고전파의 한계를 덮어버리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던컨 폴리(Duncan Foley)가 <아담의 오류>에서 잘 지적하고 있듯이 공리에 기초해 수리경제학을 사용한 추상적인 정학 분석을 핵심으로 하는 신고전파 이론은 계급 대립, 사회적 분배, 인구 성장 그리고 자본 축적과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해 균형 분석에 집중하는 신고전파 이론에서 자본주의는 정태적이고 역사가 없는 조직 형태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신고전파 이론이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모든 체제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고 '현실'사회주의에 적용될 수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신고전파 이론은 자본주의에 훨씬 더 광범위하게 적용되었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신고전파 이론이 자본주의에 적용되면서 자본주의는 효율적이고 심지어 아름다운 세계가 되었다는 점은 경제학원론 교과서만 봐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효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른 한편 신자유주의에 사회주의가 내재해 있다는 이 책의 주장은 과도해 보인다. 설령 신자유주의 이론에 사회주의적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자본주의든 '현실'사회주의의 자본주의로의 이행이든 신자유주의가 위세를 떨친 이유는 이론적 요소 때문이 아니라 정치 프로젝트로서 권력 때문이다. 그리고 그 권력을 활용하기 위해 시장 대 국가라는 이항 대립을 만들어 낸 것도 신자유주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신자유주의에서 사회주의적 요소를 찾으려는 이 책의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나아가 시장 대 국가의 이항 대립 문제를 극복하는 시도는 여러 방식으로 가능하다. 예를 들어 시장을 자본으로 치환해 보면 이항 대립 자체가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정치적 프로젝트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강력한 국가를 활용했다. 따라서 "시장이냐 국가냐"라는 단순한 질문은 이 관점에서는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시장 대 국가의 이항 대립 속에 은폐된 간극적 공간을 복원하려는 이 책의 시도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시장 근본주의 자본주의와 국가사회주의 이외에 다른 사회주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은 이미 1989년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다른 사회주의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주장은 그다지 신선한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경제학적 담론 분석을 통해 시장사회주의를 복원한다. 그러나 담론 분석이 가진 한계도 명확해 보인다. 다시 말해 주장은 도발적이고 파격적이지만, 그 주장이 현실에 주는 통찰은 미약한 것 같다. 경제학 교류의 숨겨진 역사를 밝히는 것만으로는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현실을 변혁하고 미래의 새로운 사회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모색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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