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양에도 대륙풍이 거세다. 21세기 해양 실크로드의 남진(南進)이 破竹之勢(파죽지세)이다. 특히 스리랑카, 몰디브, 모리셔스(Mauritius), 세이셸(Seychelles) 등, 도서 국가들이 거점이다. 언뜻 하와이, 괌, 필리핀, 오키나와를 발판으로 태평양에 진출했던 20세기의 미국을 연상시킨다.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양 날개로 비상했다. 중국은 태평양과 인도양을 양 축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으뜸은 스리랑카이다. 중국이 콜롬보와 함반토타(Hambantota) 항 건설을 주도하고 있다. 중국은 이미 세계 10대 항만 가운데 7개 항만을 보유한 해양 대국이다. 콜롬보와 함반토타 모두 '남아시아의 싱가포르'에 빗댈 만한 최고 수준으로 개발할 계획이다. 여기에 콜롬보, 갈레(Galle), 마타라(Matara)를 잇는 연안 도시 고속도로도 만들어주고 있다.
몰디브도 못지않다. 2013년 11월 압둘라 야민(Abdulla Yameen) 정부 출범 이래 중국과 더욱 밀착하는 모양새다. 이듬해 9월에는 시진핑 주석이 친히 방문했다. 중국 최고 지도자로는 최초의 행차였다. 관광, 건설, 해양의 3대 산업에 집중 투자하기로 했다. 구공항은 보수하고 신공항도 세운단다. 수도 말레(Male)와 국제공항이 자리한 훌후레(Hulhule)를 잇는 다리도 짓고 있다. 몰디브의 바다길, 육지길, 하늘 길을 모두 연결해주고 있는 것이다.
세이셸에도 정성이다. 위치가 중요하다. 인도의 서쪽은 아프리카의 동편이다. 중국은 아프리카의 자원과 에너지가 목마르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동해안이 잔잔하지 못하다. 수시로 해적이 출몰한다. 2011년 아덴만 해적 소탕 작전 이후 중국 해군이 정기적으로 순시하고 있다. 그들의 중간 연료 주입지로 낙착된 곳이 바로 세이셸이다.
실은 콜롬보 항에도 중국의 잠수함이 등장하여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그 여파로 올 1월 대선에서 스리랑카의 정권이 교체되었을 정도이다. 중국의 투자 덕에 연 7% 이상의 고성장을 구가하고 있음에도 중국 편중에 대한 우려가 높아진 것이다. 그래서 스리랑카 신정부는 한때 중국과의 대규모 사업을 전면 재검토할 것을 천명하기도 했다. 결국 계속 시행으로 귀착되기는 했지만, 중국의 인도양 진출에 대한 경각심이 점차 늘고 있음을 방증하는 일화였다.
그리하여 '재균형'의 축으로 호출된 나라가 인도이다. '인도양'은 말 그대로 인도의 텃밭이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3월 11일부터 스리랑카, 세이셸, 모리셔스를 잇달아 순방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웃부터 챙긴다는(Neighbourhood-First) 안성맞춤의 구호도 내세웠다. 순방 이후에는 인도의 동부 도시 부나네스와르(Bhubaneswar)에서 대규모 국제 회의도 주최했다. 'Indian Ocean : Renewing the Maritime Trade and Civilisational Linkages'를 주제로 인도양 9개국의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선언된 것이 '면화길(Cotton Route)'의 복원이다. 중국의 비단길 공세에 인도는 면화길로 응수한 것이다.
면화길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향하는 통로가 필요하다. 아시아의 거점으로는 이란이 꼽힌다. 인도는 이미 러시아와 함께 이란을 통하여 양국을 잇는 남북회랑을 구상 중이다. 인도의 뭄바이 항에서 선착한 화물이 이란의 반다르 아바스(Bandar Abbas)를 통과하고 카스피 해를 지나 러시아의 아스트라한(Astrakhan) 항에 도착하는 물류망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또 이란의 차바하르( Chabahar) 항을 통해서는 아프가니스탄과 접속하고, 더 나아가 터키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인도판 유라시아 구상에 이란이 관건적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거점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남아공은 이미 브릭스의 일원으로 돈독하다. 또 인도양에는 인도계 디아스포라가 산재한다. 그 중에서도 간디도 머물렀던 남아공에 특히 많다. 華僑(화교)가 비단길의 촉진자 역할을 하듯이, 2500만 印僑(인교) 또한 인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면화길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이집트에서 남아공까지 동아프리카를 종단하는 연결망을 인교 네트워크를 통하여 구축한다는 야심한 계획도 세워두었다.
아세안도 빠뜨릴 수 없겠다. 북으로는 미얀마의 시트웨(Sittwe) 항 건설을 돕고 있다. 벵골 만을 통하여 인도의 동북부와 아세안을 잇겠다는 뜻이다. 미얀마까지 가닿는 고속도로도 건설하여 동남아를 종횡하는 아세안 고속도로(ASEAN Highway)와도 접속할 계획이다. 남으로는 인도네시아가 중요하다. 세계 4위의 인구를 보유한 명실상부 아세안 최대 국가이다. 그 중에서도 핵심인 수마트라와 자바가 모두 인도양에 자리한다.
4월 22일 공식 취임한 인도 최초의 아세안 대사 또한 자카르타를 첫 부임지로 삼아 인도네시아를 예우했다. 기실 인도는 동남아의 기층문화를 일군 발상지라고 할 수 있다. 불교와 힌두교에 이슬람까지 막강한 소프트파워를 보유하고 있다. 儒彿道(유불도)의 중국에 견주어도 결코 밀리지 않는 매력이고 자산이다. 인도 역시 또 하나의 문명 국가(Civilization-State)인 것이다.
다만 인도가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가 복병이다. 갈대 같은 민심은 모디 정권 출범 채 1년이 되기도 전에 지방 선거에서 야당으로 돌아섰다. 정권이 교체되면 지난 정권의 노선은 일단 뒤집고 보는 것이 작금 민주주의의 병폐이다. 모처럼의 면화길 선언이 얼마나 지속 가능한 정책이 될는지 가늠하기 힘든 것이다.
주도면밀하게 十年之計(십년지계)를 세우고 일사분란하게 추진하는 중국에 비하자면, 인도의 거너번스는 아무래도 어수선하다. 그럼에도 장기적인 추세는 낙관적이다. 일국의 政勢(정세)가 유라시아 르네상스라는 세계사의 大勢(대세)를 정면으로 거스르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방향보다는 속도이겠다.
신드바드와 장보고
모디 총리는 '청색 경제(Blue Economy)'도 제창했다. 인도양의 해양 경제에 바탕을 둔 청색 혁명(Blue Revolution)을 표방한 것이다. 인도의 국기 한 복판에는 스물네 갈래로 뻗어가는 파란색의 法輪(법륜)이 자리한다. 실로 인도는 동아프리카, 호르무즈 해협, 수에즈 운하, 홍해, 아덴만, 페르시아만, 아라비아해, 벵골만, 말라카 해협, 남중국해를 잇는 광활한 바다의 한 가운데 자리한다. 인도양을 에워싸고 있는 국가들은 해양 생태계를 보존하고 기후 변화와 각종 재난에 공동 대처하는 운명 공동체(Indian Ocean Community)임을 선언한 것이다.
새삼 이를 일깨워준 비극적인 사건도 있었다. 10여 년 전 수마트라를 강타한 대지진과 쓰나미이다. 17만 명을 헤아리는 막대한 희생자 가운데는 소말리아, 케냐,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사람도 160명이 있었다. 쓰나미가 일어난 날은 2004년 12월 26일. 해일은 겨울 계절풍을 타고 2005년 1월 동아프리카까지 가닿았던 것이다. 인도양은 바람과 파도로 이어지는 하나의 생태계였다.
인도양 세계는 몬순 계절풍의 산물이다. 11월부터 3월까지는 인도양 동북부(아라비아 반도, 페르시아 만, 인도 아대륙)에서 동아프리카 해안(소말리아에서 마다가스카르까지)으로 건조하고 더운 북동 계절풍이 분다. 4월부터 6월까지는 폭풍과 장마가 잦다. 7월이 되어야 하늘이 걷히고 바람의 방향도 바뀐다. 인도양 서부에서 동부를 향해 여름 계절풍이 부는 것이다.
항해사와 상인들은 이 몬순의 순환을 따라서 인도양을 하나의 생활 세계로 만들어갔다. 동서의 문화 전파와 인구 이동을 매개했던 것이다. 대서양과 태평양이 발견과 정복의 거친 바다였다면, 인도양은 교류하고 소통하는 세련된 코스모폴리탄 세계였다. 그 인도양 세계의 보편어는 아랍어였고, 그 물길과 말길을 따라서 알라와 무함마드의 말씀도 널리널리 퍼져나갔다.
그래서 인도양 세계의 출현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이슬람이 약진했던 8~9세기로 거슬러 오른다. 아랍과 페르시아의 상선들이 인도양을 순회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정크선도 동남아로 진출하여 이슬람 상인들과 합류했다. 페르시아와 남중국을 잇는 바닷길이 천 년 전에 완성된 것이다.
이로써 탄생한 여행서사가 바로 <신드바드의 모험>이다. 신드바드는 바그다드 출신 상인이었다. 동양의 진귀한 보물을 찾아 이라크의 바스라 항을 떠나 인도양으로 향했다. 南(남)으로는 동아프리카의 마다가스타르까지, 東(동)으로는 말레이와 자바까지 가닿았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계절풍에 대한 정보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거친 풍랑을 만나 무인도와 낯선 섬을 전전하며 온갖 고생과 고초를 겪는다. 그러다 끝내 사란디브, 오늘의 스리랑카에 도착해 보물을 발견한다. 각종 보석과 상아를 수입하여 대부호가 된 것이다. 물론 소설이다. 하더라도 허무맹랑한 소리도 아니다. 오히려 9~10세기, 인도양 세계를 누볐던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들의 생활상을 생동감 넘치게 전하는 리얼리즘에 가깝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중국의 광저우(廣州)였다. 그래서 광저우에는 이슬람 상인의 대규모 거류지였던 번방(番坊)이 있었고 모스크도 여럿이었다. 호기심 왕성한 일부는 중국 연해를 따라 북상했다. 복건성의 천주(泉州)나 장강 하구의 양주(扬州)에도 거류지가 생겨났다. 우리로서도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신라방이 자리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즉, 천주와 양주는 동아시아 교역권과 남아시아 교역권을 잇는 연결점(nod)이었다.
당시 동아시아 교역권을 주름잡았던 인물이 바로 海上王(해상왕) 장보고였다. 즉, 신드바드와 장보고는 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찻잔을 기울이고 실론티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을지 모른다. 엉뚱한 과장만도 아니다. 신드바드란 페르시아어로 '힌바드', 즉 '인도의 바람'이란 뜻이다. 인도양의 계절풍을 이용하여 항해했던 바닷사람들의 총칭인 것이다. 이슬람과 한반도의 바닷사람들이 조우하여 천일야화를 나누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그네들의 세계는 넓고도 가까웠다.
인도양 세계의 전성기는 13세기였다. 몽골세계제국이 중화 세계의 경제력과 이슬람 세계의 상업망을 커다랗게 통합했다. 대륙의 초원길과 해양의 바닷길이 하나로 연결되어 유라시아의 대동맥이 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13세기 세계 체제'라고도 부른다. 중심과 주변의 위계로 작동하는 근대 세계 체제와는 일선을 긋는 공존과 관용으로 작동하는 다중심적 세계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13세기 세계 체제'의 실체를 규명할 것까지는 없겠다. 오히려 근대 세계 체제의 기원을 16세기 지중해에서 구하는 기왕의 독법을 수정하는 편이 낫겠다. 지중해가 외따로 존재하여 자가 발전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중해는 인도양의 물결이 가장 늦게 도달하는 끝물에 자리했다. 그래서 바스코 다 가마도 콜럼버스도 그토록 인도로, 인도양으로 가고 싶어 했던 것이다. 지중해-인도양의 관계 양상이 지중해-대서양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수탈 방식으로 전환된 것도 19세기에서야 전면화 되었다. 그 전에는 그저 장사하고 무역하는 동인도'회사'에 그쳤을 뿐이다. 산업혁명 이후 증기선과 함포로 중무장한 전함들이 진군함으로써 정크선과 다우선들이 속수무책으로 밀려난 것이다.
그러자 '자유 무역'이 번창했다. 바람과 파도에 순응하고 팔다리의 근력에 의존했던 '자연 무역' 대신에 석탄과 석유를 떼어 해류를 거스르는 '자유 무역'이 이식된 것이다. 그러나 '자유 무역'은 결코 자유롭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았다. 소금, 목재, 면화, 비단, 도자기, 보석 등 '보이지 않는 손'의 비교 우위에 기반을 둔 천년의 교역 망이 왜곡되고 굴절되었다.
고무와 사탕수수, 아편을 단작 경영하는 플랜테이션도 확산되었다. 인도양 사회만큼이나 생태와 식생 또한 식민화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상인들이 주도했던 말랑말랑하고 물렁물렁했던 유기적이고 액체적인 세계가 군인들이 앞장서는 딱딱하고 단단한 기계적 세계(=국가 간 체제)로 경직화되어 갔다.
본디 바다에는 산과 강처럼 대지를 가르는 자연적 경계가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영해'(領海)라는 관념과 국제법을 들이밀며 바다 역시 육지화하고, 영토화하고, 군사화 되었다. 이러한 전환을 두고 20세기에는 '문명화'라거나 '근대화'라며 높이 떠받들었다. 그 가당찮은 語不成說(어불성설)이 표준적 지식과 이론으로 군림함으로써 천 년 간 유라시아의 허브로 약동했던 인도양 세계 또한 체계적으로 은폐되고 망각되었던 것이다. 인도양도 100년이나 고독했다.
역풍과 순풍
딱딱하게 굳어진 세계가 쉬이 풀리지는 않았다. 간디의 읍소에도 불구하고 국가 간 체제가 아대륙에서도 복제되었다. 인도는 파키스탄과 분단되었고, 방글라데시마저 떨어져 나갔다. 영국 식민주의의 반작용으로 민족주의가 세계주의를 대체했다. 특히 인도는 간디식 자급/자립주의와 네루식 일국 사회주의를 추구하며 제3세계에 자족했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자본주의가 생산 및 유통, 소비 네트워크를 촘촘하게 구축하여 중화 세계를 회복해갔던 것에 비하여, 남아시아는 여전히 재통합과 재융합이 더디고 무딘 편이다.
그럼에도 지구는 돌고, 계절은 순환하고, 바람도 방향이 바뀐다. 인도서도 변화의 바람, 반전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인도가 모삼 프로젝트(Project Mausam)를 공식화한 것은 2014년 중반이었다. 중국이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표방하고 1년 후였다. 모삼은 몬순(Monsoon)의 힌두식 발음이다.
몬순 계절풍에 기댄 고전적 교역망을 재건함으로써 인도양 세계의 복원을 추진하겠다는 뜻이다. 중앙 정부의 방침에 가장 기민하게 호응하고 있는 곳은 남서부의 케랄라(Kerala) 주이다. 벌써 주 정부 차원에서 왕년의 향신로를 따라서 아라비아 반도를 지나 동아프리카에 가닿는 여행 상품을 개발했다. 인도양 세계서도 재차 活氣(활기)가 넘쳐나고 活力(활력)이 솟아난다.
물론 비단길과 면화길의 충돌을 우려하는 견해가 없지 않다. 국제관계학 이론을 빙자하여 은근슬쩍 아시아 양 대국의 이간질을 꾀하는 글들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친디아(CHINDIA)의 시너지 효과에 낙관적인 편이다. 모자란 것은 보태고, 남는 것은 나눌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중국은 자본이 넘쳐나지만 노동력이 줄고 있다. 인도는 자본은 부족한데 인력은 넉넉하다. 상호 보완할 수 있다.
또 중국은 세계 최고의 인프라 대국이고, 지금 인도가 필요한 것이 바로 인프라 재건이다. 상부상조(win-win) 할 수 있다. 유라시아의 대국적 견지에서도 양국의 협동은 중차대하다. 오늘의 G2는 미국과 중국이지만, 내일의 G2는 중국과 인도이기 때문이다. 하여 5월로 예정된 모디와 시진핑의 만남은 2015년 가장 중요한 양자 회담이라 하겠다. '中印大同'(중인대동)이야말로 太平天下(태평천하)의 주춧돌이 될 신형 대국 관계이기 때문이다.
막연한 소망만은 아니다. 근거 없는 억측도 아니다. 엄연하게 역사에 기초한 나름의 전망이다. 신중국과 신인도는 '평화 공존'에 충성할 것을 굳게 맹세한 바 있다. 60년 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서였다. 네루와 저우언라이, 나세르와 수카르노 등 아시아-아프리카의 거인들이 집결한 획기적인 모임이었다. 돌아보면 인도양 세계를 재건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인도양의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인도네시아가 괜히 주최국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남남(南-南)연대를 조숙하게 다짐함으로써 새 천년의 세계질서를 준비하는 기원이었다고도 하겠다. 백년의 逆風(역풍)을 천년 順風(순풍)으로 되돌리는 '장기 21세기'의 발원지였던 것이다. 이만하면 반둥으로, 자카르타로, 인도네시아로, 가지 않을 수가 없겠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