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삼촌, 오빠, 사촌형제까지 다 잃었어. 임신한 언니까지 쏴죽였지. 집에 돌아와보니 마을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고 하더라고. 우리가족 11명이 죽었어. 11명이."
국가추념일로 지정된 후 2번째 국가행사로 치러진 제67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한 유족들은 저마다 사연을 가슴에 품고 비석 앞에 고개를 떨구었다.
비가 오는 짓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유족들은 술와 과일, 빵, 손수 차린 음식 등을 챙기고 평화공원을 찾았다.
추념식 본 행사를 앞두고 제주평화공원에 마련된 각명비를 찾은 현모(80)할머니. 비석에 새겨진 가족들의 이름을 어루만지며 멈추지 않는 눈물을 흘렀다.
현 할머니는 4.3으로 가족 대부분을 잃었다. 1949년 겨울 제주시 봉개동에 토벌대가 들이닥쳐 마을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기 시작했다.
마을 곳곳에서 붙잡힌 사람들이 눈밭에 끌려나와 죽임을 당했다. 현 할머니의 아버지와 삼촌, 오빠, 사촌언니 등도 4.3의 광풍을 피하지 못했다.
1949년 1월7일 집에 있던 현 할머니 일가족이 끌려가 죽임을 당하고 한달뒤인 2월4일 사촌 형제들이 마을 동쪽으로 끌려가 무참히 살해됐다.
결혼 후 출산을 앞둔 사촌언니도 목숨을 잃었다. 당시 언니의 나이는 22세였다.
현 할머니는 "젊은이든 나이든 사람들이 모두 데려가 죽였다. 봉개마을 주변에 구덩이를 파서 시체를 쌓았다. 살기 위해서는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난 아랫마을에 있다 겨우 목숨을 구했다. 마을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가족들이 죽은 뒤였다"며 "홀로 남았다. 술한잔 드릴 사람이 나밖에 없다. 그래서 해매다 찾는다"고 말했다.
고계춘(80) 할머니는 4월3일만 되면 하나 뿐인 오빠를 찾아 평화공원으로 온다. 4.3 당시 고 할머니의 가족은 남원읍(당시 남원면) 위미리에 거주했고 오빠(당시 15세)만 서홍동에 있었다.
오빠는 '내려오지 않으면 모두 죽인다'는 소식에 사람들과 함께 바다 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잠깐의 헤어짐이 평생 동안 이별이 됐다. 이후 인천지역으로 끌려갔다는 소식만 들었다.
고 할머니는 "욕도 할 줄 모르고 얼마나 어질던 오빠였는데…"라며 눈물을 훔쳤다.
"이 나이가 되도록 오빠만 생각하면 가슴이 얼마나 찢어지는지 모른다.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하다. 이렇게 생이별한 사람이 제주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게 4.3이다."
프레시안=제주의소리 교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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