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후보의 정치경력도 불과 12년 밖에 안 되지만 이번 경선에서 그의 최대 강점은 다름 아닌 탄탄한 전국적 조직망이었다. '정치인 정동영'의 한 때 키워드였던 '신선함'이 더 이상 지배적 이미지로 남긴 힘들어 보인다.
이는 여당 경선 후보, 여당 당의장 두 차례 역임, 통일부 장관 등의 화려한 경력이 일차적 요인이겠지만 역설적으로 보면 조직력을 다져온 대신 역동성을 잃어왔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정 후보는 15대 총선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전주 덕진에 출마해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돼 동교동계의 총아로 정치인생을 시작한 후, 정풍운동의 깃발을 들어 권노갑 전 의원을 2선으로 물러 앉히고,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 경선지킴이로 '포스트 노무현'의 자리를 다지고, 현 정부 들어선 두 차례 여당 당의장과 통일부 장관 경력에도 불과하고 '차별화'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같은 한 발 빠른 행보가 오늘의 정동영을 만들었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은 편이다. 우여곡절 끝에 원내 제1당의 대선 후보 자리를 거머쥔 정 후보의 지난 12년 명암을 한 번 짚어보자.
호남의 기린아로 출발해 동교동의 심장을 찌르다
정 후보의 정치입문은 그 누구보다 화려했다. MBC 사회·정치부 기자, 미국 LA 특파원, 주말 뉴스데스크 앵커를 거치며 깔끔한 외모와 언변으로 좋은 이미지를 쌓았던 정 후보는 96년 고향인 전주에 출마해 압도적 표차로 당선됐다.
호남 출신이긴 하지만 방송사 기자가 야당을 통해 정치에 입문한 것도 당시엔 신선한 충격이었다.
DJ는 물론이고 동교동도 정 후보를 각별히 신경 썼고 정 후보도 기대에 부응했다. 뱃지를 달자마자 얻은 대변인 직에서도 합격점을 얻었고 16대 총선에서도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됐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정 후보는 신진기예의 범주를 벗어나진 못했다.
그러나 16대 총선 직후 정 후보는 승부수를 던졌다. 당시 40대 재선그룹인 천정배, 신기남 의원과 이른바 '천신정'으로 뭉쳐 일대 정풍을 일으켰던 것.
반응도 효과도 만점이었다. 집권 3년 차로 접어들면서 동교동계에서 새어나는 잡음들에 염증을 느낀 대중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권노갑 의원은 2선으로 물러섰다.
권 전 의원을 비롯한 동교동계는 '우리가 저희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면서 배신감을 토로했지만 '천신정 탈레반'의 대의 앞에선 구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조차 최근엔 정 후보에게 짐으로 작용하고 있다.
'경선 지킴이'로 한단계 도약해 '몽골 기병'정신으로
동교동을 딛고 선 정 후보는 2002년 또 한 번 과감한 선택을 했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사표를 던진 것. 이인제, 한화갑, 김중권, 노무현, 김근태 등 다른 후보에 비해 중량감이 현격히 떨어졌지만 경선을 완주한 사람은 노무현 후보와 정동영 의원 두 사람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정 후보는 '경선 지킴이'라는 찬사를 얻었고 대선 선대본 공동위원장, 국민참여운동본부 본부장으로 대선 승리에도 일조했다.
정몽준 의원이 대선을 하루 앞두고 단일화를 파기하게 된 큰 이유가 노 후보의 "차기에는 정동영도 있고 추미애도 있다"는 명동 연설 내용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당시 그의 위상을 짐작킨 어렵지 않다.
집권 이후 '천신정 탈레반'들이 주축이 돼 열린우리당을 창당하고 정 후보가 초대 당의장 자리를 꿰차 '몽골 기병론'을 설파하고 다닐 때, 정동영의 미래를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때 두 가지 리스크 요인이 등장했다. 이른바 '노인 폄하 발언'이 첫 번째이고 강원도 오대산 당선자 워크샵에서 채택된 우리당의 '실용주의 노선'이 두 번째다. 첫 번째 요인은 지금까지 지겨운 딱지로 남아있고 두 번째 요인은 정 후보에게서 개혁 이미지를 앗아가 버렸다.
그러나 이 당시 창당 당의장의 프리미엄은 이번 경선에서 위력을 발휘한 조직력의 기반이기도 하다.
'참여정부 황태자' 시절의 명암
설화로 인해 비례대표 순번을 포기해 뱃지를 달지 못한 정 후보를 구해준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노 대통령은 총선 석 달 후 정 후보와 김근태 전 의장을 나란히 입각시켰다.
누가 복지부를 맡느냐 통일부를 맡느냐 문제는 지금까지도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지만 하여튼 '정동영 통일부 장관'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박하진 않다. '개성 동영'이라는 자칭답게 개성공단 사업을 밀어붙였고 방북을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접견하기도 했다.
게다가 전문가들의 목소리에도 대체로 귀를 기울였고 정치인 출신답게 조정력도 발휘했다는 평가가 많다.
그러나 통일부 장관으로 큰 그림을 그리며 대권수업에 전념하는 사이 당은 바닥부터 쉬가 슬었다. 당청 간 갈등이 벌어지는 동안 정 후보는 별다른 리더쉽이나 조정 능력을 발휘하지도 못했고 두 번째 당의장을 맡아 치른 2006년 5.31 지방선거는 열린우리당에 말 그대로 조종을 울렸다.
물론 지방선거 결과의 책임을 정 후보에게만 오롯이 떠넘기긴 힘들다는 것도 중론이다.
타이밍의 달인이냐, 살모사 정치인이냐
지방선거 이후 은인자중하던 정 후보가 선택한 카드는 '차별화'였다. 김근태 전 의장의 어설픈 차별화 시도에 이은 부메랑을 지켜만 보던 정 후보였고 그 자신이 창당 주역이었지만 그는 '열린우리당 해체론'을 꺼내들었다.
이 와중에 청와대와 정 후보의 골은 깊어졌다. 친노세력은 물론 노 대통령이 나서 연일 정 후보를 향해 '차별화로 성공한 사람이 있더냐, 우리당이 어떤 당이더냐'고 공세를 가했지만 정 후보와 김근태 전 의장의 합작에 의해 결국 열린우리당은 소멸됐고 대통합민주신당이 창당됐다.
여당의 조직을 누가 틀어쥐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고 노 대통령도 "질서 있는 통합은 애초부터 반대하지 않았다"고 물러섰지만 이를 통해 청와대의 배신감은 극심해졌다.
친노 인사들은 정 후보를 향해 '배신으로 성장한 살모사 정치인'이라고 극언을 퍼부었고 노 대통령은 "원칙 없는 기회주의자들의 싸움에는 관심도 없다"고 일갈했다.
2000년 정풍 운동에 분루를 삼킨 동교동계가 '두고 보자'고 이를 갈았던 것과 닮은 꼴인 것.
어쨌든 이같은 12년의 행보를 통해 정 후보는 경선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발만 빠르지 진중치 못하다'는 비판을 반박하는 것은 오롯이 그 자신의 몫이다. 이는 어쩌면 12월 19일 대선 결과와도 별개일지도 모른다.
화려한 이미지, 독일까 약일까?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민주당 후보로 확실시 되는 이인제 의원,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 , 창조한국의 문국현 후보 등 다수의 대선후보군과 견주어 볼 때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의 '외적 이미지'가 탁월하다는 데 이론은 거의 없는 편이다. 깔끔한 외모, 정리된 언변, 탁월한 웅변 능력 등 무엇 하나 빠질 것이 없다. 게다가 이명박·권영길 후보가 1941년 생이고 이인제·문국현 후보가 1948년 생이지만 정 후보는 1953년 생으로 유일한 전후세대 후보다. 대통합민주신당 경선 기간 이해찬 후보가 뻣뻣한 자세로 사진기자들의 애를 먹였지만 정 후보는 방송기자 출신답게 '포토제닉'에도 뛰어나다. 현대 정치를 '이미지 정치'라고 규정한다면 정 후보 보다 이에 적합한 인물을 찾기도 힘들다. 정 후보가 몸을 담았던 MBC의 한 현직 기자는 "정 후보가 1991년 걸프전 당시 현지에 취재를 갔었는데 낙타를 타고 사막에 가서 모래를 한 줌 쥐고 주먹 사이로 그 모래를 흘리면서 '모래 밖에 없는 땅에 석유가 발견되면서 비극이 일어났다'는 리포트를 한 적이 있다"면서 "한 마디로 비쥬얼적인 분야에서는 방송국내에서도 탁월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명박 후보가 비쥬얼이 뛰어나서 지지율 고공행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듯, '대선후보 정동영'에게는 빼어난 이미지가 오히려 손해라는 지적도 많다. 박근혜 의원의 단아한 외모는 신비감과 카리스마를 더했지만 정 후보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어떻게 이 간극을 메꿀지도 정 캠프의 중요한 숙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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