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언론인 고토 겐지((後藤健二, 47)의 비참한 죽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반미-반이스라엘의 기치를 든 이슬람 원리주의 수니파 준 국가조직인 이슬람국가(IS)에게 고토가 끝내 목이 잘리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자, 전 세계는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인질로 잡혀 있던 또 다른 일본인 인질 유카와 하루나(湯川遙菜, 42)를 참수했다고 밝힌 지 꼭 8일 만이다.
겐지의 생명을 구하려고 지구촌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는 겐지다"(I Am Genji)라는 팻말을 들고 평화 시위를 벌였었다. 겐지의 어머니, 아내가 눈물로 그의 무사귀환을 바랬다. 그런 노력들은 2월 1일 오전 5시(한국시간) 겐지의 참수 사실을 알리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떠오르는 순간 물거품이 됐다.
참극의 씨앗 뿌린 아베
무엇이 고토 겐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을까.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그의 목숨을 구하려고 당사국인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가 얼마나 진정성 있게 힘을 썼을까. 혹시나 그의 죽음을 정치군사적으로 이용하려는 못된 생각을 품지는 않았을까.
다른 무엇보다 일본 우파 정부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지난 1월 17일 중동을 방문했을 때 이집트 카이로에서 "IS와 싸우는 주변 각국에 총액 2억 달러 정도 지원을 약속한다"고 발표했다. 미국의 주도 아래 벌이는 IS와의 전쟁,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에서 일본이 2억 달러를 내면서 동참하겠다고 뜻을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유카와 하루나와 고토 겐지, 두 사람의 일본인 인질로 잡고 있던 IS가 처음에 석방 조건으로 2억 달러를 요구하며 내세운 명분도 다름 아닌 아베 총리의 '2억 달러 지원 발표'였다. IS는 아베의 연설 사흘 뒤(1월 20일) 일본인 인질 2명의 영상을 공개하며 72시간 안에 2억 달러를 주지 않으면 이들을 죽이겠다고 발표했다. 일본 정부가 끝내 몸값 요구를 묵살하자, IS는 이미 공언한대로 24일 유카와를 참수형으로 죽였다.
일본 정부는 뒤늦게 이제와서 '2억 달러'가 군사적이 아닌 인도적 지원에 한정돼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IS와 싸우는 국가를 지원하겠다"고 말한 것은 분명히 신중하지 못했다. 아베 총리가 비극의 씨앗을 뿌렸음에도 인질 참수 위협이 불거지자, 그는 "테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원칙론만 되풀이했을 뿐이다.
테러와 타협 없다는 원칙론만 고집
유카와 하루나가 먼저 참수당한 뒤에도 일본 정부는 원칙론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2001년 9.11 테러 뒤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테러리스트와는 타협이 없다"는 미국의 지침을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지난 15년 동안 막후 협상을 통해 인질의 목숨을 구해낸 사례는 너무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조차 포로로 잡힌 이스라엘 병사를 구해내기 위해 팔레스타인 강경파 하마스는 물론 숙적인 레바논 헤즈볼라와 '타협'을 꾀하지 않았던가.
더욱 한심스러운 사실은 일본 정부는 남은 인질의 석방을 위해 IS와 직접 접촉을 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도 2월 1일 기자회견에서 "일본 정부와 IS 사이에 접촉이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자국민을 어떻게든 살리려 했다면, 물밑 접촉을 통해 IS의 의도를 파악하면서 시간을 벌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팔장을 낀 채 상황 악화를 지켜보기만 한 모습이다.
아베 총리가 한 일이라고는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나 영국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 수습의 조건을 구한 정도뿐인 것으로 알려진다. 일본 유권자들에게 "나는 팔짱만 끼고 있지는 않다"는 언론 플레이를 하려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사실이 외신을 통해 IS의 귀에 들어가면 가뜩이나 미국과 영국의 공습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IS 지도부를 자극한다는 점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내 세금으로 도와줘선 안 돼"
결국 IS는 고토 겐지를 참수하면서 아베 일본 총리를 향해 '이길 수 없는 전쟁에 동참하는 부주의한 결정' 때문에 고토를 죽인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IS는 "(겐지를 죽이는) 이 칼은 너희 (일본) 국민을 계속 겨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반도 넓이보다 더 넓은 영토를 점령한 준 국가집단이 아시아의 친미국가를 겨냥해 "일본의 악몽이 시작될 것이다"라며 전쟁선포를 한 셈이다.
일본의 우파적인 여론도 인질 참수에 이른 지금의 상황에 대해 책임 공방을 피해가기 어렵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2억 달러를 주고 인질을 풀려나도록 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란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썰렁하기 그지없다. "왜 그렇게 위험한 곳에 제 발로 들어가 위험한 상황을 만들었느냐", "여행금지 지역을 어기고 들어간 인질을 일본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도와줘선 안 된다"는 투의 글들이 줄을 이었다.
"어떻게든 인질의 목숨을 구해놓고 봐야한다"는 주장보다는 한마디로 '자기 책임론'이 우세했다. "인질 가족들의 눈물어린 호소에 귀를 기울이자"는 내용의 댓글을 단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인 특유의 집단주의가 극우적인 국가지상주의라는 살벌한 형태로 기승을 부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일본 우파의 노림수
인질 2명이 잇달아 목숨을 잃게 되는 상황에서 일본 우파 정부가 자국민의 목숨을 구하려는 절실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베 총리는 고토 겐지의 참수 소식이 전해진 뒤 "비도덕적이고 비열하기 그지없는 테러행위에 강한 분노를 느낀다. 테러리스트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베의 발언에서 일본 우파 정부의 입장이 확실히 묻어난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전임자인 조지 부시가 판을 벌여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의 제2라운드에서 일본이 확실히 미국의 줄을 서겠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일본 우파가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일본의 우파들은 오래전부터 자위대 해외파병의 조건을 완화시키려 애써왔다. 현행 일본 평화헌법의 틀에 따르면, 일본 자위대는 유엔 평화유지 활동(PKO)의 경우에 한해 해외 파병이 가능하고, 자기 방어 말고는 무기를 함부로 사용할 수 없도록 돼있다. 지난날 대동아공영이란 헛된 구호를 내세웠던 일본제국주의에 향수를 지닌 일본 우파는 그런 제한규정을 없애는 게 꿈이다.
'경찰권' 내세워 자위대 파병
지금 일본 아베 정권의 행태는 마치 일본인 인질 2명의 죽음을 오히려 기다렸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고토 겐지가 참수된 바로 뒤 일본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한 아베 총리는 "세계 곳곳에서 인도적 지원을 하는 일본 비정부 기구(NGO) 요원들이 위험에 빠질 경우 자위대가 무기를 사용해 구출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아베는 '경찰권'이란 수상쩍은 용어를 써가며 평화헌법에서 엄격히 규정한 집단적 자위권의 해석을 고무줄처럼 늘리려는 모습이다. 전 세계 어디든지 일본 자위대 파병 길을 넓히려는 일본 우파의 속내가 드러난다.
고토의 죽음이 더 안타까운 까닭
일본 언론인 고토 겐지는 메이저 언론사 소속이 아닌 프리랜서였다. 취재 경비를 아껴 써야 하고 안전도 보장받기 어려운 힘든 취재과정 속에서도 지난 20년 동안 꿋꿋이 분쟁지역을 누비며 난민들의 고난을 비롯한 분쟁지역의 참상을 알려왔다. 그러면서 평화로운 세상을 늘 꿈꾸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고토의 숭고한 뜻과는 달리, 일본 우파는 그의 죽음을 틈타 지난날 일본제국주의의 망령을 되살리려는 음흉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결론적으로, 일본 우파 정부가 자국민이 참수되는 끔찍한 일을 방치한 것은 그를 정치군사적으로 이용해 일본 군국주의 부활로 나아갈 물꼬를 트려는 음흉한 속셈을 지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토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운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