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편견을 가지고 산다. 그중 하나가 '대중은 무지하다'는 것인데 사실 편견이라는 것이 살면서 느낀 막연한 인상들의 조합에 불과해 근거나 이유가 그다지 탄탄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면서도 말하기 조심스러워하는 대중의 무지에 관한 나의 편견은 역사를 배우던 학창 시절 생긴 것이다. 4.19혁명 직후 군사 정권이 들어서고, 1987년 민주화 운동 직후 군인 출신 대통령이 다시 탄생했던 안타까운 역사 말이다. 공포 정치가 60년 넘게 지속된 북한이 우리 민족의 반쪽이라는 점까지 들어 이 민족이 그다지 위대하지는 않다는 또 다른 편견에 도달하기도 했다. 물론, 독재 정권을 살아보지도 않았고, 저항해 볼 기회도 없었으며, 북한의 체제를 경험한 적 없으니 이 근거들만으로 쉽게 말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저 후대인이거나, 외국인으로서 하는 비판 혹은 불평에 불과함도 안다.
이 지독하고도 하찮은 편견은 늘 새로운 이유를 찾아가며 내 안에 머물렀는데, 대학생이 되면서는 정치인과 미디어에 잘 속아 넘어가는 유권자들의 아둔함에 분노했고, 빈곤 계층이 부자를 위한 정당에 표를 던지는 일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근년에 들어서는 환경에 주목해 왔는데, 이 모든 것이 오랫동안 지속된 편향된 교육의 결과이며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표현되는 편중된 언론 환경 때문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기도 했다. 대중의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쏠리게 만드는 교묘한 전술이 있다고도 믿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껏 내게 대중은 자신들의 고달픔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충분히 고민하지 못하는 몽매하고, 피 흘려 거둔 성과를 쉽게 내줄 만큼 미련하며, 미디어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순진한 존재쯤으로 비쳐 왔다. 지금 이런 편견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뿐이다.
사진가 이상엽은 '변경'에서 무엇을 보았나
그 기록들은 처참하다. 중심에서 배제된 풍경들은 어둡고 무질서해 보인다. 용산 참사로 상징되는 재개발 문제나, 졸속적이고 무책임하게 추진된 4대강 사업, 자본의 탐욕이 그대로 드러난 비정규직 문제, 국가의 횡포로 점철된 밀양 송전탑 갈등, 그리고 국가의 무능을 증명한 세월호 사태까지 해피엔딩은 없다. 맞서 싸우다 패배하거나,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처진 어깨만 보인다. 무책임하게 파헤쳐진 강가나 분단 속에 고착된 서해 섬들의 풍경도 어김없이 그렇다.
작가는 여기서 지리적 변경을 넘어 심상적 변경이라는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 변경은 먼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신자유주의가 구체화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 구조에서 끊임없이 팽창하며 우리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중심으로 가고자 하지만 이 구조에서 누군가 중심으로 가면 누군가는 밀려나야 한다. 그 다툼 역시 변경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서로 타자화한다'는 지적은 매우 중요해 보인다. 변경을 확장하는 주체 중 하나가 우리이고 그 결과를 짊어지는 것 역시 우리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변경에서 자기 분열이 일어날수록 중심은 더욱 견고해진다.
이쯤 되면 우울해진다. 20대 80의 사회가 아니라 1퍼센트의 강력한 코어가 99퍼센트의 군중을 지배하는 시스템이 더욱 견고해지리라는 예언 같기도 하다.
이 책의 백미는 여기에서 나온다. '변경은 낡은 권력을 허무는 진지'라는 선언이다. 질서가 잡힌 중심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은 무질서한 변경에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분명 위안이 된다. 변경을 뜻하는 말 프론티어(frontier)는 '혁신'의 의미를 포함한다.
사진가는 '변경은 내 안에 있었다'고 책의 첫 문장을 썼다. 이 문장은 변화의 조짐도 내 안에 있다는 의미이면서 서로 타자화하는 것을 인정하는 말로도 읽힌다.
공감이 부족한 시대, 우울이라도 느끼자
앞서 나의 지독한 편견 얘기를 늘어놓았는데, 그러고 보면 나 역시 지금껏 어떤 결과의 책임을 다른 누군가에게만 돌렸던 것 같다. 그들의 일상을 함부로 말했던 것도 같다. 대중을 내가 상상하는 국가를 실현시킬 수단쯤으로 여기기도 했던 것 같다. 늘 나는 쏙 빠져 있었다. 분열하고 팽창하는 변경에 나도 가세해 왔고, 누군가의 삶을 쉽게 재단해 버리는 손쉬운 비난을 늘어놓았지만 화살은 늘 바깥을 향했다. 정답을 내놓고 거기에 끼워 맞추려는 태도는 낡고 허술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너무 쉽게 살아왔다. 이 편견은 책임에서 도피하려는 몸부림이었는지 모른다. 지금 이 시대는 누구만의 잘못으로 이렇게 된 것이 아닌 것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결론 따위는 없다. 결론은 간단치 않다는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우리 모두 변경에 있다. 문제도 답도 우리 안에 있다.
책장을 덮으며 공감이라는 말부터 떠오른 것은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투쟁이나 연대라는 말보다 더 폭넓고 친근하며 강력한 이 말은 미디어가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위력을 드러내곤 한다. 그래서 이 책의 독법으로 공감을 생각했다. 이 음울한 변경의 풍경 속에 내가 있을 수 있음을 가정하는 것은 달갑지 않더라도 필요한 태도다.
책은 편집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글과 사진이 아주 잘 부합한다. 텍스트를 읽고 넘겼을 때 나오는 무겁고 음울한 톤의 흑백사진에는 글과는 또 다른 힘이 있다. 한 장 한 장 쉽게 넘기기 어려운 이 사진들은 모두 고유한 파장을 가진다. 책의 또 하나의 미덕은 충실한 기록이다. '진실을 찾아내어 분명히 기록하고 목숨을 걸고 지키라'는 루트비히 볼츠만의 말을 책 맨 앞에 인용한 것에서도 드러나듯, 작가는 무엇보다 기록에 제일 큰 가치를 두었다.
공감이 부족한 시대라고 했던가. 이 책의 페이지를 무겁게 넘기며 우울이라도 느끼자. 당신의 삶도 나의 그것처럼 고달프다면 일단 책 속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처럼 읽고 우울해하는 것이 먼저다.
전체댓글 0